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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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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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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3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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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DUMMY

청운이 얼마나 고수인지 가늠하지 못하던 묵기는 이제야 알았다.

청운은 하늘이 내린 절대고수다.

멍하니 멈춰 있는 백합의 옆에 서며 묵기는 확신했다.

누가 만든 건지 모르는 거대한 기계장치들이 설치된 산 전체를 청운이 혼자 박살 내고 있다.


“맙소사.”


청운의 손에서 쏟아지는 강기를 보며 묵기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의 대수인도 나름 장법이라는 걸 표현하며 날아가지만.

저건 차원이 달랐다.

저토록 확실하고 또렷하게 보이는 기의 파동이라니.


“저런지 얼마나 됐지?”


침울한 표정으로 청운을 보고 있는 백합에게 묵기가 물었다.


“반다경.”


백합은 감정이 없던 예전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반다경만에 산의 반절이 날아갔다는 이야기에 묵기는 놀라다 못해 넋이 나가 버렸다.

다시 반각. 완전히 산을 밀어버린 청운이 드디어 움직임을 멈췄다.

초토화된 자리의 중심에서 청운은 얼굴에 흐르는 땀 한 방울을 손가락 두 개로 훔치고 활짝 웃어 보였다.


“갈까요?”


웃고는 있지만 화가 났다는 걸 묵기는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가 뾰족뾰족해서 같이 걸으면서도 말 걸기가 힘들었다.

청운의 손을 잡은 백합도 말이 없어 침묵이 더 아팠다.


“하아. 젠장.”


묵기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왔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렸다.


“운형. 내가 말이오. 남을 위로하거나 그런 건 잘 못하거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데 재주가 없단 말이오.”


묵기는 그렇게 말하며 가족을 생각했다.

큰형인 백청기는 고고한 인간이라 위로 따윈 필요가 없다.

작은형인 백군기는 오로지 가문만 중요시해 자기 자신조차 그 재료로 쓰는 무감각한 인간이고.

동생인 백연이야 말할 것도 없는 말괄량이.

이런. 생각해 보니 다들 위로라곤 필요가 없는 인간군상들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된 것인가! 내가 위로도 못하는 멍청이가 된 건 다 우리 가족 탓이었어!”


묵기가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혼자 난리를 치는 묵기를 물끄러미 보던 청운의 입에서 순간 큭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묵기가 뒤돌아봤지만 청운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


“운형. 방금 웃지 않았소?”


그 질문에 청운은 고개를 살짝 숙여 새초롬하게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백합이 해바라기처럼 그녀를 보며 웃는 바람에 다 들통나고 말았다.


“아! 이거 웃었구만! 웃었어!”


묵기가 손가락으로 청운을 가리키며 즐거워했다.


“공자님 모습이 너무 눈 시려서 어이가 없어서 웃은 겁니다. 웃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쨌거나 웃긴 한 거 아니오. 난 또 얼마나 심각한 일이기에 산을 부수면서 화를 내나 싶었는데 내 꼴을 보고 웃었다니 별거 아니구만.”

“화를 내요? 그건 공자님 오해입니다.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지만.”


화를 냈다는 말에 청운이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했다.


“화도 나지 않았는데 산을 박살 냈단 말이오?”

“그게 이곳에 사는 제 지인이 묵가를 고용해 기관진식을 이 산에 설치해서 부순 겁니다. 여기 있는 백합이나 묵기 공자가 다칠까 봐요.”

“그렇소?”


하기야 파괴된 기관들을 보니 날카로운 검이나 톱날이며 위험한 것들이 즐비했다.


“지인은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위험한 것들을 산에 설치한 거요? 제갈가라도 되나?”

“천상 무인입니다. 그리고 아마 죽었을 겁니다.”

“죽었다고?”


청운이 기분 나쁘다고 한 이유가 드러났다.

지인이 죽었다고 한 이유는 아마도 지나쳐온 분지에서 본 전투의 흔적 때문인 것 같았다.


“아마도요.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공자. 가보면 알겠지요.”


청운이 발길을 재촉했다.

경공까진 아니었으나 진실을 쫓을 만큼 빨랐다.

묵기 일행이 멈춰 선 곳은 청운이 방금 박살 낸 산만큼이나 엉망인 곳이었다.

여기저기 가꾼 흔적이 있는 소로는 멀쩡했지만 집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곳은 완전히 파헤쳐져 있었다.


“고독.”


소로의 끝. 아직 물들지 않은 푸른 잎이 펼쳐져 있는 나무 아래 온전한 머리가 하나 있었다.

말라 갈라진 입술을 보니 죽은지 좀 된 이의 머리인데 누굴 기다렸다는 듯 썩지는 않았다.

개미 한 마리 덤비지 않은 걸 보니 뭔가 술수가 부려진 머리였다.


“그분이 왔다가 갔군요. 결국 우리의 계획은 실패한 셈이네요.”


청운은 백합의 손을 놓고 두 손으로 잘린 머리의 뺨을 잡아 안았다.


“학사.”


청운이 머리를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리자 묵기는 안타까움에 손을 들어 다가가려다 그만두었다.

학사에겐 슬픔을 삭일 시간이 필요했다.


“됐습니다. 안타깝지만 이제 서두를 일은 하나도 없어졌네요.”


한참을 끌어안은 머리와 함께 상념에 잡혀 있던 청운은 어지러운 감정을 마침내 정리했다.

작별 인사를 마친 고독의 머리는 나무 아래 다시 돌려 놓았다. 


“언제는 서두르고 있었단 말이오? 운형은 항상 느긋했는데.”


이게 묵기가 건넬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위로라기보단 농담이었지만.


“하하. 그랬나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네요. 서두르지 말라고 항상 교육을 받은 터라.”

“그나저나 여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엉망인지 모르겠군. 거인이라도 와서 땅을 파낸 꼴이잖소.”

“여기 죽은 제 지인과 누군가 혈투를 벌인 흔적이겠지요.”

“이게 사람이 한 흔적이란 말이오?”


하기야 청운은 산도 박살 냈는데 못 할 것이 뭐란 말인가 하는 생각 하며 묵기는 땅이 파헤쳐진 자리로 다가갔다.

깊게 파인 땅 밑 아래 뭔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음? 저 아래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묵기는 경사진 지면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봤다.

흑과 돌이 섞인 지층 사이에 금색을 띤 모서리가 정말 손톱만 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힘주어 빼보니 잘 정제된 금괴가 툭 튀어나왔다.


“세상에. 운형! 이거 보시오! 금괴요! 금괴!”


눈이 휘둥그레진 묵기가 흙 묻은 금괴를 들고 소리쳤다.


“독심호가 빼돌린 금괴 같은데. 그것까지 찾아가셨나요. 정말 알뜰하게도 챙겨가셨네요. 역시 당신다워요.”


청운이 묵기의 손에 들린 금괴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옆에 있는 백합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


화산검과 흑기린이 끓어오르는 검은 점액 앞에서 기다린 지 벌써 며칠째다.

하얀 나신 상태로 안으로 들어간 백연이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라 화산검 명진은 몸이 달아올랐다.


“흑기린. 소저에겐 별일이 없겠지?”

“난들 알겠나. 나도 이곳에 와보긴 처음이네.”

“그래도 소교주였는데 아예 처음 보는 곳이란 말인가?”

“이런 곳이 있다고 사부에게 말만 들었지. 여긴 살성이 아닌 자는 들어올 수 없는 금지야.”


며칠간 대화도 나누지 않고 버틴 그들이다.

하지만 연이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대화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란 말이야. 숨을 쉬어야 하네. 마교의 무공이 기기괴괴하다는 말은 내 익히 들어 알지만 정말 소저가 무사할까?”

“천마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야. 안에 들어간 소저에게 이득이 되면 되었지 실이 되진 않을 거네.”

“그건 자네가 마교도라 할 수 있는 생각이겠지. 난 지금 당장이라도 저 안에 들어가고 싶은 맘일세.”

“그랬다간 내 손에 죽을 거네.”

“자네도 연소저가 무사한지 궁금하지 않나?”

“아까부터 자꾸 연소저라고 부르는데 소교주님이라 부르게.”

“끙. 이런 고리타분한 친구를 봤나. 아무튼 난 자네에게 목이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확인해 봐야겠네.”


자신을 살리려고 천마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던 흑기린이다.

쉽게 말리지 못할 걸 아는 명진이 웃통을 훌렁 벗어 던졌다.


“화산검. 기다리게.”


흑기린이 명진을 말리려고 손을 뻗은 순간 부글부글 거품을 터트리며 끓던 검은 액체 위로 도톰하고 매력적인 입술이 오뚝한 코와 함께 천천히 올라왔다.


“들어오면 죽는다.”


그건 백연의 입과 코였다.

마침내 들려온 연의 목소리에 탕 안에 들어가려던 명진의 발이 바로 멈췄다.


“소저. 무사하시오?”

“소교주님!”


흑기린도 재빨리 달려와 검은 액체로 뒤덮인 코와 입을 맞았다.

어미가 가져올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들처럼 목을 길게 뺀 두 남자에게 검은 입술이 대답했다.


“조용히 해. 조금만 있으면 감잡을 거 같으니까.”


그러더니 입과 코가 다시 쏙 점액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덩그러니 남은 두 남자의 얼굴이 허탈해졌다.

그래도 생사는 확인되었으니 초조함은 덜했다.

벽곡단과 물로 연명하며 기다리길 다시 며칠 이상한 낌새를 발견한 건 연이 있는 탕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던 명진이었다.


“흑기린. 어째 탕 속에 내용물이 조금 줄어든 것 같지 않나?


그 말에 흑기린이 쳐다보자 명진의 말처럼 수위가 내려간 흔적이 띠처럼 남아 있었다.


“그렇군.”

“소저가 저걸 마시진 않았을 테고.”

“저리 보여도 저것 전체가 공청석유에 각종 영약이 섞인 탕이야.”


긴 고독때문이었는지 둘은 쓸데없는 걸로 토론을 나눴다.


촤악!


물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백연이 솟구쳐 올랐다.

그런데 혼자 올라온 건 아니었다.

탕에 가득한 액체 전체가 살아 있는 듯 그녀의 육체로 빨려 들어갔다.

명진과 흑기린은 그 광경을 홀린 듯 바라봤다.


“공청석유가 꼭 천 모 양처럼 나풀거리는군.”

 “어째 등 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 날개 같지 않은가?”

“화산검.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씐 거 아닌가?”

“사돈 남 말 하는 군.”


엄청나게 많은 영약이 모조리 흡수한 백연의 육체는 마지막으로 귀곡성을 토한 후 석상으로 변했다.

연의 외관상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석상이 검은색 보석처럼 빛났다.


“끝난 건가?”


석상으로 변한 연을 보며 명진이 물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흑기린 뿐.


“환골탈태를 말만 들었지 보지는 못했으니···”


말이야하고 대답하려는 찰나 쿠쿵하고 지면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천장을 뚫고 천마가 내려왔다.


“종결의 귀곡성이 천마 전까지 울리더군. 끝났느냐? 나의 제자. 교의 소교주는 어디 있지?”


천마의 등장에 흑기린이 곧바로 오체투지를 했다.

화산검은 그런 흑기린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곳에 몸담고 연을 따르기로 한 이상 예를 갖춰야 했다.

결국 그도 자존심을 접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자. 환골탈태를 경험한 적 없어 소교주님의 정확한 상태는 모르겠지만 아직 공청석유 탕안에 계십니다.”


머리도 들지 못하고 한 흑기린의 대답에 천마가 뒤돌아봤다.

그의 말처럼 연은 탕 안에 있었다.

수정 같은 석상으로 변한 모습으로.


“오오오.”


천마는 그 모습을 보고 정말 감탄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천마의 저런 즐거운 반응은 흑기린이 그에게 주워진 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탐이 강한 아이인 것은 알았지만 몇천 년 동안 쌓인 이곳의 공청석유를 모조리 흡수해 버리다니. 참으로 무서운 탐욕이로다.”


천마조차 젊은 시절 육체를 다시 수복하고 겨우 살아나온 탕이다.

그런데 그걸 모조리 자신의 품 안에 넣다니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탐욕이야말로 천마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 이번 대에는 드디어 우리 일월신교가 중원을 일통하겠구나!”

-중원의 일통? 나는 그런 것 따위는 관심이 없다!-


천마의 말에 연의 모습을 한 검은 석상이 진동하며 흔들거렸다.


-백검문의 백청기! 그가 좌절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창문 틈으로 봤던 그 모습! 대들보에서 흔들리던 세상 쓸모없던 거구의 남자! 그 매력적인 모습을 다시 한번!-


석상에서 나오는 진동음이 점점 커지더니 정수리부근이 파각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쩌적! 쩌적! 쩌저적!


벼락을 맞은 듯 좌우로 벌어지며 석상이 부서져 내리자 하늘에 뜬 백연의 모습이 마침내 드러났다.

머리 뒤 비치는 핏빛 후광이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고개를 치켜들고 천마를 비롯한 두 호위를 내려다보는 연의 흰자위에 미처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검은 공청석유가 넘실거렸다.


“무엇이 먼저이든 너는 결국 모든 걸 원할 것이다. 그것이 천마라는 자리에 앉는 인간의 본성이니까.”


검은 흰자위와 붉은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백연에게 천마가 호언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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