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청운을 따라 오른 팔천계단의 끝에는 원형으로 파인 거대한 분화구가 나왔다.
풀과 나무 사이로 걸어가는 청운의 앞으로 자연 경관에 녹아든 세 개의 거대한 목조 건물이 보인다.
“운형! 거기 서시오!”
단순히 걷는데도 땅을 접어 걷는지 청운을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묵기가 소리를 지르자 청운이 잠깐 뒤돌아봤다.
미소 짓는 청운은 어서 따라오라는 듯 바람에 살랑거리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고 다시 앞서갔다.
“거기 서란 말이오!”
최선을 다해 경공을 사용하고 나서야 묵기는 청운의 옆에 설 수 있었다.
“공자.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주시기를 바랍니다. 백합이 깨겠습니다.”
“지금 내가 조용히 하게 생겼소? 운형. 여기가 정말 백백교가 맞는 거요?”
“그렇습니다. 여기는 백백교입니다.”
“내가 백백교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건 큰형의 입에서요.”
“그렇겠지요.”
“그렇겠다?”
묵기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그렇겠지라는 소리는 형을 안단 말인가.
“혹시 우리 형을 아시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짐작만 할 뿐.”
“짐작?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 백합의 일도 그렇소.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요?”
“이 아이가 살막의 후인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라면 아닙니다. 그건 공자가 말씀하신 후에 알았지요. 다만.”
청운이 곤히 잠든 백합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마야가 소개했다면 진작에 알았겠지만.”
“마야가 누구요? 백합도 그렇고 그대도 그렇고 자주 이야기하던 이름인데.”
“살막은 전해 들으셨으면서 그건 못 들으셨습니까? 마야는 십이존자로 우리 백백교의 사람이었습니다. 천제를 호위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었지요.”
들을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묵기는 머릿속이 꼬여버린 실타래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혼란스럽습니까? 도망간 뱃사공과 같은 얼굴을 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오기 싫다며 강으로 뛰어든 뱃사공 이야기를 청운이 꺼냈다.
실로 그랬다.
팔천계단을 오르며 물레방아에서 떨어지던 인간의 비를 보고 마음을 다스릴 자가 몇이나 될까.
눈앞에 있는 청운의 평온한 모습이 묵기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떨어지던 사람들은 대체 뭐요? 회전이니 뭐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사실대로 말하시오.”
사실 따지자면 외부인인 묵기에게 설명할 이유는 딱히 없다.
하지만 청운은 묵기의 의문을 최대한 해결해 주려 배려했다.
“그저 자연을 흉내 내는 것이지요.”
“자연을 흉내 내?”
“이곳 백백교는 화산이 분화한 곳에 세워진 곳입니다. 사시사철 생기는 안개는 다른 곳과의 단절을 낳고 그 단절은 모자람을 낳지요. 그런데도 인간은 번식의 동물이라 인구는 늘어갑니다.”
“그래서? 자살로 인구를 줄인단 말이오?”
기가 찬 말이었다.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떨어진 자들은 모두 나이가 많아 기력이 다한 자들. 남아 있는 교도들을 위해 웃으며 갔으니 영원히 기억되겠지요.”
“운형.”
묵기는 청운을 바라보며 할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쳤소?”
묵기의 거친 말에도 청운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쇠붙이 하나 없이 나무와 흙으로만 만들어진 커다란 건축물에 도착했을 때 몇 명의 사람들이 청운을 마중 나왔다.
“천자님. 돌아오셨습니까?”
묵기가 보건대 청운의 앞에 나열한 사람들 모두 보통 인간이 아니었다.
덩치로 보나 풍기는 기도로 보나 다들 묵기보다 훨씬 고수인 자들이었다.
“이 아이. 마야의 후인이에요.”
“압니다. 천제님의 일로 한동안 상심하고 계시어 마야가 천자님께는 보이지 않았던 아이입니다.”
눈썹이 송충이를 뭉쳐 놓은 것 같은 자가 청운의 품에서 백합을 받으며 대답했다.
“그랬군요. 하지만 연이 닿아 우리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내가 듣기로 지화자의 해독이 필요하다던데.”
“살막의 전해지는 특수한 약인데 그것을 지우면 마야의 후인은 더 이상 살막소속이 아니게 될 겁니다.”
송충이 눈썹남의 대답을 들은 청운이 묵기를 봤다.
“공자. 그렇다고 하네요. 선택은 공자에게 맡기겠습니다.”
청운의 말에 묵기는 이제 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협행의 목적을 이루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해독해 주시오. 그리고 그 아이와 고향으로 돌아가겠소.”
“돌아가? 천자님의 손님인 것 같은데 너 혼자 돌아가는 것은 뭐라 못 하겠으나 이 아이는 원래부터 우리 백백교의 사람이다.”
묵기의 대답에 송충이눈썹이 화를 냈다.
“토룡공. 우리 백백교는 마교가 아닙니다. 오고 가는데 강제는 없습니다. 그것이 천제님의 가르침임을 잊은 것입니까?”
그러자 청운이 그를 토룡공이라 부르며 나무라기 시작했다.
청운보다 세배는 큰 자가 학사의 꾸지람에 어쩔 줄 몰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인은 그저 마야의 마지막 제자를 이리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십이존자라하여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다른 존자님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들은 반성해야 합니다. 천자님을 떠나서 잘된 자가 어디 있습니까? 보고 받은 바로는 금양자도 죽었고 마야, 독심호까지 다 죽었다고 합니다.”
토룡공 말고 다른 이가 청운에게 말했다.
죽은 이들의 이름이 나오자 청운이 씁쓸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한 명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곡왕도 죽었습니다.”
“고독이?”
“그를 죽일 자는 강호에 많지 않은데.”
청운이 가져온 소식에 백백교의 인물들이 다들 놀랐다.
“아무래도 그분께서 깨어나신 것 같습니다. 저희가 바라지 않던 최악의 형태로.”
또 다른 소식이 나오자 이번엔 다들 망연자실 해했다.
“천제님께서요?”
“이런. 파계승이 훼방만 놓지 않았더라도!”
“자,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 급한 것은 우리 교를 방문한 손님의 원을 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지화자에게 가세요.”
청운의 명에 그들은 허리를 깊게 숙여 예를 표하고 떠나갔다.
“저들은 누구요?”
말하려는데 저들 중 하나의 기에 눌려 입도 뻥끗 못 하던 묵기는 겨우 숨을 내쉬며 물었다.
“십이존자입니다. 아, 넷이 죽고 하나는 실종상태니 칠존자라고 불러야 할까요? 지화자가 들어와서 팔존자라고 해야겠네요. 혹시 공자님께서 들어오실 요량이 있으시면 구존자가 되겠지만.”
“지금 농담할 분위기요?”
손뼉을 치며 웃는 청운에게 묵기가 화를 내자 청운이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속내를 숨겼다고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표정에 묵기는 다시 숨이 막혔다.
의심과 노한 마음을 다시금 고개를 든 연심이 잡아먹으려 했다.
“웃음으로 넘어가려고 하지 마시오.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많으나 대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군.”
뭘 물어야 답답한 마음이 깨끗해질지 묵기는 파악할 수 없었다.
“일단 들어가시지요. 차라도 한잔하며 천천히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청운이 먼저 나무문을 열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천마의 명을 받아 백백교의 동태를 살피러 출발했던 마뇌는 가는 길에 그를 따라잡은 부하들의 전갈로 급히 마교로 돌아왔다.
천마가 교체되었다는 경악할 소식이었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전 내공을 사용해 달려 교로 돌아왔을 때 그는 정말로 천마의 자리에 앉은 연을 목도했다.
“그래서 누구라고?”
검은색 흰자위에 붉은 동공을 가진 새로운 여자 천마는 금색 왕좌에 앉아 마뇌에게 물었다.
“신. 천리뇌마라 합니다.”
백연은 예전에 촉산의 분지에서 마뇌를 본 적이었었다.
보기만 한 게 아니라 그의 큰 오빠인 백청기가 누군지 설명까지 해주었다.
천리뇌마는 마교의 머리로 모든 작전, 구상이 저 큰 머리에서 나온다고 말이다.
“천리뇌마? 큰 머리가 아니고?”
“편한 대로 불러주십시오. 전 천마님께서는 저를 마뇌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뇌마인지 마뇌인지는 큰머리인지 내게 무슨 볼일이지?”
마뇌는 눈을 살짝 위로 떠 백연의 동태를 살폈다.
무심하게 손톱을 만지작거리는 새로운 천마는 자신에게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전 천마는 자신의 지모를 높이 사 이인자답게 대접해 주었는데 새로운 천마는 지루한 듯 자신을 내려다봤다.
이래서는 안 된다.
그녀에게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했다.
그래야 전처럼 떵떵거리며 교에서 살 수 있을 것이다.
“제가 듣기로 천마님께서 중원으로 출정 명령을 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백연은 가만히 뇌마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중원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이대로 그냥 군을 일으켜 들어갔다간 그들이 펼친 천라지망과 술수에 많은 마교의 인사들이 희생될 터.”
“흑기린.”
“네.”
“가서 앵두를 좀 가져와. 목이 마르네.”
사람이 기껏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하는데 백연은 딴청을 피웠다.
하품하는 건 덤이다.
“술도 가져오라 할까요? 과일에는 과실주가 잘 어울리는 법이죠. 향이 복합적으로 납니다.”
앵두 하나가 연의 새빨간 혀에 들어가는 걸 보며 화산검 명진이 권했다.
“그래? 그것도 가져와.”
흑기린이 시비를 쏘아보며 손을 휘적거리자 대기하던 시종들이 종종걸음으로 대전에서 달려 나갔다.
“이대로는 답이 없으니 저 마뇌에게 시간을 좀 주시면 중원을 빠르게 통일할 계책을 짜오겠습니다.”
백연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말거나 마뇌는 말을 이어 나갔다.
한 번만 새 천마가 자신에게 관심을 둔다면 설득할 자신이 마뇌에겐 있었다.
“그렇게 약한가?”
고개를 조아린 마뇌를 보며 술과 과일을 즐기던 백연이 흑기린에게 물었다.
백연이 뭐가 약하냐고 묻는지 몰라 흑기린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마교 말이야. 계획이고 뭐고 세워야 중원무림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약한가?”
천마가 된 연의 말에 흑기린의 몸에서 조용히 기가 피어올랐다.
아지랑이처럼 하늘거리는 그것은 대전을 지키는 마교의 고수들 몸에서도 나온다.
끓어오르는 호승심이 그들의 마음을 자극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흑기린이 대전을 지키는 고수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만세만세 만만세! 천마님! 전 소교주의 말을 흘려들으시옵소서! 범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중원무림이 아무리 약해도 얕잡아 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봐. 큰머리.”
백연이 조용히 마뇌를 불렀다.
“네. 천마님. 하명하시옵소서.”
“난 중원인인데 말이야.”
백연의 출신지는 석백성.
나고 자란 곳은 중원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중원인인 정통 중원인이다.
“마교하면 생각나는 건 약육강식밖에 없거든?”
백연의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리면 울릴수록 마교의 고수들에게서 기의 파동이 솟아나 부딪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곧 폭풍으로 화해 몰아치고.
쿵쿵! 발을 울리는 소리가 모두에게 심장소리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범은 범이랑 목숨을 걸고 붙어야지! 왜 토끼 따위를 신경쓰고 자빠졌어? 너 마교도 맞아?”
백연은 붉은 과실주를 입에 털어 넣고 소리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마뇌는 느꼈다.
대전 안에 울리는 마교도들의 발 울림도 그렇고 서늘하게 느껴지는 새 천마의 살기등등한 눈빛도 그렇다.
마뇌는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은 채 식은땀을 흘렸다.
“내 말이 틀려? 흑기린? 날 때부터 마교도인 당신이 말해봐.”
“실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 또한 마교도.
흑기린이 부복하며 크게 대답했다.
발소리가 더욱 커진다.
동시에 의자 밖으로 걸쳐 나가 있는 연의 손에서 기묘한 기운이 올라와 문이 하나 솟구쳤다.
귀곡성과 함께 피를 흘리는 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 마뇌! 새로운 천마님의 말씀을 잘 들었나이다! 제 지모가 필요하지 않으시다면 으아아아악!”
마뇌는 도망가려고 뒤로 기다가 온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에 비명을 질렀다.
대전의 지붕을 뚫고 일어선 거대한 거인이 마뇌를 짓누르고 있다.
백연은 자신이 불러낸 태산과도 같은 크기의 거인을 올려다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곧 마뇌의 커다란 머리와 단련되지 못한 육체가 포도알이 터지는 것처럼 펑 터졌다.
“내 마교에 잔말은 필요 없다! 오로지 힘! 힘으로 모든 것을 누른다! 출정하라! 준비되지 않아도 좋다! 모자란 것은 힘으로 빼앗으면서 전진하라! 가자! 중원으로! 가자! 백검문으로!”
대전의 지붕을 박살 내 하늘을 지붕으로 만든 거인이 손을 뻗어 백연을 위에 태웠다.
거인을 탄 백연의 뒤로 교의 고수들이 따랐다.
“빌어먹을 노인네. 입발린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소저를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흑기린이 납작하게 눌려 피떡이 된 마뇌에게 침을 뱉으며 욕을 했다.
명진은 건물과 길을 다 부수며 가버리는 백연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저리 나온 이상 더 이상 시간 끌기는 글렀다.
“그런 것치고는 당장 검을 뽑아서 휘두르려던 모습이던데.”
“화산검! 자네라면 화산이 약해빠졌다 하는데 가만있겠나?”
흑기린의 말에 명진의 입이 다물어졌다.
사실 흑기린과 명진은 백검문만 부수고 문주인 백청기만 제압하면 되니 소규모 병력으로 이동하자고 백연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뇌 이자가 백연을 어쭙잖게 자극해 일이 다 어그러졌다.
이제 전 마교가 백연을 따라 출진한다.
“이렇게 된 거 최악을 가정하고 전서구나 중원으로 날립시다. 소식이 전해지는 사이 우리는 다시 백소저를 설득해 보고.”
대전쟁의 시작을 느낀 명진이 심각해진 얼굴로 흑기린에게 말했다.
흑기린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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