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아들

[완봉승을 달성하세요]
[8회말 진행 중···]
[남은 이닝 : 1이닝]
현재가 4개의 베이스를 밟고 위풍당당하게 벤치로 돌아왔다.
“현재야 공 잘 지켜봤다. 힘 좋네.”
선수 칭찬에 인색한 감독님마저 현재의 홈런에 아낌없이 박수를 쳐줬다.
“현재 나이스 홈런!”
“긴장 하나 안하고 목동을 넘겨버리네.”
동료들은 하이파이브와 함께 현재의 헬맷을 두드리며 기분 좋은 순간을 만끽했다.
그때 방망이를 내려놓은 현재가 내게 다가왔다.
“선배님 덕분입니다.”
“내가 뭘 했어. 기회 살린 건 넌데. 다음 이닝 같이 잘 막아보자.”
어제 난 현재에게 그저 힘내란 말을 했을 뿐이다.
세상엔 기회가 와도 받아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현재처럼 겸손한 선수는 이런 기회를 누릴 자격이 있다.
선취점을 낸 이후 후속 타자들이 상대 투수를 괴롭히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추가 득점은 없었지만 현재의 투런 홈런 덕분에 우리가 승기를 잡았다.
우승과 할당량 달성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3개.
감독님은 내가 9회를 다 책임져줬으면 하는 마음인 건지 나를 바꾸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부담가지지 말고 던지고 와라 이강아.”
“예, 코치님.”
“혹시라도 무리가 될 것 같으면 꼭 얘기하고. 상대 하위타선이니까 마음 편하게 먹자.”
“걱정 마십쇼. 제가 끝내겠습니다.”
9회초. 동료들과 나는 지금이 마지막 이닝이 되길 바라며 필드위로 달려 나갔다.
그와 맞물려 학부모 응원단이 우리를 위해 우렁찬 구호를 외쳤다.
“하나 둘 셋, 불광고 파이팅!!”
마운드에 오른 나는 심호흡하며 응원석에 걸린 플랜카드들을 쳐다봤다.
[최강 불광고 넌 할 수 있어!]
[전국 최강 불광고 우승 기원.]
[자랑스러운 아들들 끝까지 파이팅!]
그래. 할 수 있다.
우승을 위해서도, 내 팔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해내야만 한다.
계속해서 할당량을 달성해야 포인트로 내 몸을 지킬 수 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팔을 아끼는 것.
적은 공으로 상대를 잡아내는 게 중요하다.
다행이도 이런 내 마음을 포수인 현재가 잘 이해했다.
‘커브로 갈까요?’
8번 타자는 지난 타석부터 커브에 약했다.
그걸 간파한 현재가 내게 커브를 권한 것이다.
슈웅-
딱-
평범한 단타 코스.
유격수 시현이가 어렵지 않게 공을 잡아낸 뒤 가볍게 처리했다.
1아웃.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기 전, 관중석에서 목 놓아 내 이름을 외치는 부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의 간절한 외침은 하나의 구호가 되어 경기장을 가득 매웠다.
“최이강! 최이강!”
“멋지다 최이강! 잘한다 최이강!”
이에 질세라 신현고 쪽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대 벤치에서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고자 1학년 좌타자를 대타로 투입시켰다.
기가 눌릴 대로 눌린 선수보단 1학년에게 기회를 주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걸까.
아무런 정보가 없는 타자였지만, 문제없다.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슈웅-
“스트라이크!”
일단 공을 지켜보기로 한 건지, 한복판에 들어간 150km의 직구에 방망이를 대지 않았다.
‘체인지업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체인지업 그립을 잡은 뒤, 강하게 공을 던졌다.
딱-
먹힌 타구는 1루 파울라인 바깥쪽으로 높이 떴다.
2학년 후배인 상현이가 파울 지역에서 공을 잡으며 아웃카운트가 하나 더 추가됐다.
이제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하나.
기대감에 부푼 동료들은 곧장 뛰어나오기 위해 벤치에 걸터 앉아있었다.
그에 비해 상대팀 벤치엔 적막이 드리워있었다.
그 적막을 깨고 상대 1번 타자가 크게 심호흡한 뒤 타석에 들어섰다.
1번 타자는 배트를 흔들거리며 나를 노려봤고, 나 역시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동요하지 않은 채 내 스스로를 믿고 강하게 직구를 뿌렸다.
딱-
그때, 호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나는 그 공이 장타임을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1번 타자는 여유롭게 2루에 안착했다.
큰일이었다.
“집중하면 돼. 괜찮아!”
“어차피 한 명 남았으니까 주자 신경 쓰지 마! 타자에 집중해!”
벤치에선 동료들과 코치님이 건투를 빌어줬다.
뒷눈이라도 붙이고 올걸 그랬나.
막상 9회말에 주자가 2루에 나가있으니 불안감이 급습했다.
신현고의 테이블 세터인 만큼 1번 타자는 주력을 겸비한 타자였다.
이렇게 된 이상 2루 주자의 도루는 사실상 기정사실이다.
주자가 3루로만 가도 단타 하나로 홈 승부를 시도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어차피 맞으면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동료들 말대로 타자에 집중하는 편이 좋았다.
나는 찬용이의 리드에 따르기로 했다.
‘하이패스트볼로 부탁드립니다.’
난 강력한 속구를 존 상단을 조준해서 던졌다.
“스윙! 스트라이크!”
높은 공임에도 배트를 휘두른 2번 타자가 아쉬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상대 주자가 3루로 도루를 시도했고, 워낙 발이 빠른 탓에 현재는 공을 던지지 못했다.
2사 3루.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실점은 안 된다.
‘커브로 가볼까요.’
상대가 우타자인 만큼 잘 긁히기만 한다면 커브는 효과적으로 타자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딱-
“파울!”
아슬아슬했다. 타자는 마치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커브를 커트해냈다.
저금 더 안쪽에 제구 됐다면 충분히 담장을 넘길만한 타구가 만들어졌을 터.
그때, 벤치에서 사인이 떨어졌다.
‘존 바깥쪽으로 힘 빼고 직구 두 번.’
구속의 빠르기만 보여주면서 타자의 타이밍을 헷갈리게 만들라는 걸까.
나는 연달아 적당한 속도의 공을 존 바깥으로 보냈다.
145km. 148km.
그리고 이제 그보다 구속이 살짝 느린 체인지업이다.
야구가 데이터 싸움인 이유는 선수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슈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난 전 타석과 비슷한 방식으로 타자를 맞춰 잡아냈다.
[할당량을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을 획득합니다 : 랜덤뽑기권]
봉황대기 우승의 순간.
벤치에서 생수병을 들고 기대하고 있던 동료들이 전부 뛰어나와 내게 물을 뿌려댔다.
“우승이다!”
우리는 마운드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그 순간을 즐겼다.
“이강아 존나 고생했다 진짜.”
“선배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동기, 후배 할 것 없이 모두 내게 고생했다는 인사의 말을 건넸다.
하긴 8경기 일정에서 4경기를 뛰었으니 어느 정도 고생한 건 사실이었다.
던진 이닝 수가 꽤나 많았기에 물론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팔은 괜찮아?”
“예, 코치님. 괜찮습니다.”
“간만에 완투했네. 이강이 너 아니었으면 아마 진즉에 점수 다줬을 거야.”
완투와 완봉승.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던져본 게 20년만이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팔로 별 탈 없이 9이닝을 이끌어 온 내 스스로가 신기했다.
물론 팔이 터지기 전까지 어떤 수를 써야 이것도 계속할 수 있겠지만.
물론 지금은 부상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과거와 마찬가지로 별 다른 부상 징조가 없었다.
“얘들아 일단 상대팀이랑 인사하자. 다 모여.”
코치님의 말을 들은 주장이 우리 팀을 한데로 모았다.
신현고는 자기들 벤치 앞에서 아쉬운 기분을 삭히고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신현고와 우리 팀은 서로의 행운을 빌어주며 인사했다.
찬용이를 부상시킨 2루수만 빼고.
녀석은 우리 쪽으로 아예 오지도 않았다.
“저 새끼 바로 꽁무니 빼네.”
“쫄보가 따로 없네. 아깐 심판 믿고 계속 까불거리더니.”
“자기도 찔리는 거겠지 뭐.”
하긴. 왔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벼르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찬용이의 성격이 좋은 만큼 나를 포함한 동료들은 찬용이의 부상에 무척이나 슬퍼했다.
그러니 사과조차 없는 상대 2루수에게 다들 화가 나는 거겠지.
상호간의 인사를 마치자 마이크를 쥔 봉황대기 관계자가 다음 행사를 안내했다.
개인 타이틀 수상자 발표.
“이번 봉황대기 MVP는··· 불광고 최이강! 축하드립니다.”
3승 0패 1세이브 19⅔이닝 3피안타 3볼넷 29삼진.
나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봉황대기 MVP를 거머쥐었다.
“최이강 선수 여기 보세요.”
기자들은 상패를 받은 나를 담기 위해 웃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내 주위를 둘러싼 카메라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이어서 우린 봉황대기 우승 깃발 수여식과 세레머니를 했다.
대회 관계자로부터 초록색 봉황대기 깃발을 건네받은 주장은 깃발을 이리저리 흔들며 우승을 자축했다.
불광고로서도 10년만의 봉황대기 우승이었다.
우리끼리의 행사가 끝나자 관중석에서 응원하던 학부모들이 내려와 자식들에게 득달같이 달려왔다.
“이강아, 여기야 여기!”
“농사일도 바쁠 텐데 뭐 하러 오셨어요.”
“이장님한테 부탁 좀 드렸지. 우리 아들 고등학교 마지막 대횐데 우리가 빠지면 쓰나.”
야구라는 스포츠 특성상 대회는 주로 농번기와 겹쳤다.
그 때문에 전업농부인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경기장에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과거엔 그런 부모님한테 왜 왔냐고 오히려 다그쳤었지.
“자랑스럽다 우리 아들. 아까 다른 학부모들도 이강이 칭찬을 어찌나 하던지.”
“그러니까요. 나까지 기분이 좋더라니까.”
“기분 좋으시다니까 저도 좋네요.”
생각해보니 그땐 사진을 찍자는 부모님에게 항상 투덜거렸던 것 같다.
버르장머리 없던 내 모습에 낯이 부끄러워졌다.
그래. 지금이라도 바로 잡으면 되는 거지.
나는 부모님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그땐 찍지 못했던 가족사진이랄까.
얼마 걸리지도 않는 걸 어렸을 땐 왜 그렇게 부끄러워했는지 모르겠다.
부모님과 함께 이리저리 돌며 동료들 가족과 인사를 나누던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안녕하세요. 우영애 기자라고 해요.”
우영애 기자.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엄청난 정보력과 취재력으로 수준이 다른 야구 기사를 썼으니까.
그런데 그런 야구계의 탑 기자가 대뜸 나를 찾아왔다.
날 인터뷰하려는 건가?
“원래 오늘 유찬용 선수와 함께 이강 선수 인터뷰를 부탁하려고 했는데, 찬용 선수가 하필 부상을 당했더군요. 유감입니다. 혹시 다음 주 중에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네, 그럼요. 장소는 혹시 어디서 진행하시나요?”
“불광고 실내 연습장에서 하시죠. 저번에 보니까 거기가 좀 조용하더라고요.”
“아 네. 저희가 따로 준비해가야 할 건 있을까요?”
“뭐··· 신인의 패기 정도? 농담이고 그냥 편하게 와서 얘기한다 생각하세요. 그럼, 그때 봐요.”
우영애 기자는 본인의 목적인 섭외를 달성한 뒤 미련도 없이 자리를 떴다.
냉정하네.
그녀의 인터뷰 신청은 한국 야구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는 증거기도 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순간 야구 업계 전체로부터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확률이 높았다.
어떤 질문을 하려나···
“이야 우리 아들, 우영애 기자랑 얘기도 하고. 멋진데?”
아빠도 우영애 기자를 알 정도라니.
“그러게요. 이런 인터뷰 요청은 처음이라 당황스럽긴 하네요.”
감독님은 학부모들과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더니, 마이크를 잡고 우리에게 한 마디 했다.
“여러분들 이번 대회 치르느라 너무 고생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번 주말은 본가에 가서 휴식을 잘 치르길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3학년들은 2주간 훈련 없습니다. 그럼 다들 무사히 귀가하시길 바랍니다.”
“와아아아!”
동기들이 모두 크게 소리쳤다.
어째 다들 우승했을 때보다 크게 소리 지르네.
감독님의 파격 휴가와 함께, 우리는 각자 흩어져 본가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난 뒷좌석에 앉아 야구 가방을 마구 뒤적거렸다.
찾았다. 슬라임 크림.
“엄마 아빠 이거 크림 하나씩 가져요. 내가 경품으로 받은 거야.”
“어머 이게 뭐야? 웬 크림?”
“난 필요도 없어요. 아직 피부 탱글해서.”
“그래 고맙다. 슬라임··· 크림? 이게 뭐야? 신조어··· 뭐 그런 건가?”
“아 그··· 그냥 끈적하다는 뜻의 영어에요.”
“오~ 우리 아들 영어 공부도 해? 미국 가고 싶어서 지금부터 공부하는 거야?”
“예? 아니에요. 이건 그냥 기본 영어··· 뭐 그런 거예요.”
영어는 무슨. 내 인생은 제 2외국어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강아. 어디 갈지는 고민을 좀 해봤어?”
“아직이요. 다음 주에 등교해서 생각할까 싶기도 해요.”
이젠 정말 행선지를 결정해야할 시기다.
언제까지고 선택을 미룰 수도 없는 상황.
과거엔 미국에 가는 건 염두 해두지도 않았다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세배에 달하는 계약금과 좋은 조건의 제안까지. 하지만 제안 자체는 한국 야구도 좋았다.
난 계속해서 내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디서 구르고 싶니.
모든 것에 적응해야하는 아무도 모르는 외딴 섬?
모든 걸 알지만 똑같이 실패할지도 모르는 도심 속?
둘 다 장단점이 있으니 결국 중요한 건 내 마음가짐이다.
결정의 시간이 점차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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