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질문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윤서와 초요갱의 다툼이 커질 것 같아 둘 사이를 가로막고 말했다.
“양녕대군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고자 하는 의미로 술을 드렸으니 이해해 주시오. 초요갱도 앞으로는 오해를 살 행동은 삼가하고요.”
내 말에 둘은 더 이상 말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모르고 있는 하나가 있었으니, 조선 아이돌 거처에서는 여전히 계급 사회의 법칙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
그날 밤, 조선 아이돌 거처에선 윤서가 모두를 앉혀 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내가 대행수 원칙에 따라, 그가 있을 때나 외부인이 함께 있을 때는 너희가 내게 함부로 해도 이해를 했었고,
나도 의녀인 유라에게 존대까지 해 주었다.”
“그건 고맙게 생각한당께요.”
유라가 서슬 퍼런 윤서의 말에 공감해 주었다,
“그런데, 오늘 내 먼 친척 오라비가 오셨는데, 추파를 부리는 초요갱의 모습을 보니, 그 방자함이 도를 지나치는구나.”
초요갱은 지지 않고 윤서에게 말대꾸했다.
“기생이 하던 대로 양녕대군에게 술 한 잔 따르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러십니까?”
“아니, 이 년이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대꾸하느냐?”
대행수가 보는 앞에선 볼 수 없었던 고관대작 딸의 고함에 초선과 도영이 기가 죽어 고개까지 숙였다.
“남정네들은 기생인 저를 함부로 하는데, 저도 제가 호감 가는 남정네를 보고 좀 웃고, 술 한잔 같이 마시는데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요?”
“그래도 이년이 잘못했다고 사과를 안 해? 네가 진정 물고를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윤서의 독설에 초요갱은 산전수전 다 겪은 기생으로 윤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조선 아이돌을 하고 있는데, 평안 도사의 따님이라도 저를 어떻게 하진 못할 겁니다. 핍박하면 할수록 오기가 생기네요. 양녕대군을 제 편으로 만들어 보이지요.”
“······아, 아니 이년이······.”
둘의 싸움을 유라가 말렸다.
“아기씨 그만하랑께요. 초요갱 너도 입 닫고 가만히 있어.”
모두가 궁금했던 사항이었지만, 특히 윤서는 맹사성과 양녕대군이 매화를 잘 알고 있어서인지 그 관계를 궁금해했다.
“매화, 너는 어떤 연유로 맹사성 예문관대제학 어른과 양녕대군을 알고 있느냐?”
매화는 윤서의 질문에 난감했다.
특히, 맹사성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면 자신의 조부가 고려 시대의 충신임을 말해야 하는데, 그러면 전주 이씨 왕족인 윤서와 불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려 충신의 조부를 욕되게 거짓말을 하기도 싫었다.
“저희 조부와 맹사성 어른이 좀 친분이 있었습니다. 궁에서 관기로 있을 때 양녕대군은 알게 되었어요.”
윤서는 대행수가 말한 대로 매화와 양녕대군이 궁에서부터 아는 사이라는 말에 안도하며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초요갱으로 인해 휘몰아쳤던 분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초요갱은 윤서의 눈치를 살피며 매화에게 왔다.
“매화야, 너 양녕대군과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니지?”
만약 양녕대군의 총애를 받았다면 그의 애첩으로 들어갔거나 기방에 있지 않을 것을 아는 초요갱은, 조심스럽게 둘의 관계를 물어봤다.
“전혀 대군과 그런 관계는 아니에요.”
“정말이지?”
“네.”
다시 사실을 확인한 초요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양녕대군이 풍채도 좋으시고 풍류남으로 소문났는데, 그 분의 사랑을 한 번만이라도 받아봤으면 좋겠다,”
초요갱은 솔직한 속내를 매화에게 비추었다.
초요갱은 영특해서 맹사성과 매화와의 관계도 날카롭게 알아봤다.
모든 기생이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특히 고려에서 조선 시대로 바뀐 지 30년도 안 되는 시기에는 부모나 조부모의 사연으로 인생이 바뀐 기생들이 많았다.
초요갱은 자신의 첫 남편이 관리였지만, 역모죄에 걸려 자신도 애첩의 편한 인생에서 어느 날 기생으로 전락했다고 매화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매화에게 물었다.
“내가 네 조부와 맹사성 어른이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알아봤다. 매화 너도 역모죄로 걸려 3족이 멸하는 벌은 받지 않았지만, 노비로 전락했었지?”
정확하게 초요갱은 매화를 꿰뚫어 봤다.
그만큼 산전수전 겪은 초요갱은 눈치가 대단했다.
“그래요. 우리 집안도 조선 시대 몰락한 집안이에요. 아버지도 노비로 어느 양반집에 있다가 또 어디론가 팔려 가 소식도 모르고요.”
초요갱은 매화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와 나는 공통점이 많구나. 몰락한 집안 내력으로 기생이 된 사연도 같고, 이 미모까지, 호호.”
초요갱과 매화는 비슷한 점도 있었지만 분명 달랐다.
초요갱이 그저 그런 집안의 딸로 양반의 애첩이 되어 살았다면, 매화는 고려의 충신 집안이었다.
대대로 고려의 충신으로 살아왔고, 집안에 나라에서 인정받은 효부와 열녀가 많았다.
같은 기생이지만 남정네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초요갱과, 신비로운 매력으로 고고함을 유지하고 있는 매화는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초요갱도 영특하면서도 남자를 끄는 마력이 있는 외모와 특별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초요갱이 매화에게서 멀어지자 초선과 도영이 바짝 매화 곁으로 왔다.
나이가 모두 몇 살 차이는 안 났지만 나이가 같은 초선과 매화는 친한 자매처럼 친해졌고, 도영도 막내로 누구보다 초선과 매화를 따랐다.
“매화야, 너 대단하지매. 맹사성 어른은 정말 신선 같은 사람이고, 양녕대군은 임금님 행님인데 그리 알고 있었다이.”
“언니, 참 대단해유.”
매화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까지 소식을 모르는 상황에서, 친자매 같은 이들이 다섯이나 생겨 너무나 행복했다.
그리고 마음에 서서히 대행수 유성의 존재가 커가며, 그를 매일 볼 수 있고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어가는 느낌이 너무 행복했다.
맹사성 어른이 떠나갈 때 언젠가 좀 더 조부의 사망에 얽힌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했지만, 이제 과거는 땅에 묻고 미래를 살고 싶었다.
*****
수탉의 울음으로 또 하루가 시작되었고 분란을 야기했던 첫 예비 공연의 뒤풀이는 잘 마무리된 듯했다.
조선 아이돌 숙소에 가서 다시 첫 예비 공연의 성공을 치하했고, 이제 곡을 다시 만들고 첫 번째 심사처럼 진행해서 공연할 곡의 수를 늘리자고 독려했다.
유라가 분위기를 잘 잡고 진행해 줘서 큰 문제 없이 잘 돌아갔다.
현대의 표현으로는 나름 시스템이 잘 구축되었다.
조선 시대에 살다 보니, 현대의 내가 알게 모르게 외래어를 많이 쓰고 살았음을 깨달았다.
무대를 스테이지로 하거나, 조화를 하모니로, 식당을 레스토랑으로, 일몰을 썬셋으로, 숙소를 모텔이나 호텔로······.
암튼, 입에 붙어버린 외래어 때문에 조선 시대 말실수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준수에게도 그랬지만 조선 아이돌에게도, 심지어 세종대왕과 대화할 때도 외래어가 튀어나와, 어리둥절해하는 상대방을 보면서 ‘아차!’ 하는 순간이 많았다.
‘마마, 창제하신 한글은 컴퓨터에도 깔려 있사옵니다.’
상상만 해도, 웃겼다.
감히, 조선 시대에 온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창제해 주신 세종대왕께 ‘컴퓨터’라는 이상한 외래어를 쓰면,
뭐라 하실까?
잘 만들어 주신 한글에 ‘ㅋㅋ’라고 문자를 올리면?
홀로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내 상상이 신호가 되었는지 오후 해가 질 무렵에 궁궐에서 사람이 왔다.
다음 날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는 전갈이었다.
임금님께서 한양 상단 거처에 오셔서 점심 식사를 같이하기도 했고, 궁궐에 처음 갔을 때는 다과가 곁들여졌지만 궁궐로의 식사 초대는 처음이었다.
조선 아이돌 거처로 가서 다음 날 궁궐에 입궁해서 임금님을 뵙는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아마도 맹사성 어른이 입궁해서 조선 아이돌의 예비 공연 소식을 전해준 것 같았다.
궁에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궁에서 공연을 요청할 수도 있고, 내게서 백성의 삶을 좋게 할 방도에 관해 이야길 듣고 싶어 할 수도 있었다.
모두 임금님을 뵈러 간다는 소식에 상당히 고무된 표정이었다.
이미 맹사성과 양녕대군, 장영실, 박연을 만난 그들로서는 이제 임금님만 뵈면 소원 성취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양에서 이미 임금님을 뵌 매화에게 임금님의 외모와 성격, 말투를 물어보며, 격한 관심을 보였다.
조선 시대의 가장 인기있는 아이돌은 임금님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세종에 대한 백성의 관심은 엄청났다.
“만에 하나, 조선 아이돌이 대성공했을 때, 임금님이 소원을 하나 말해 보라면 무엇을 말할 것이오?”
충분히 가능한 미래 상황이었고, 나도 조선 아이돌을 하면서 고생한 사람들에게 보상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인생을 바꿀 상금을 내걸었던 것이었다.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윤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말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양반이 되고 싶어요.”
양민인 나도, 살다 보니 아니꼽고 더러운 꼴을 많이 봤다.
한양 상단 대행수가 돈이 넘쳐나는데, 현대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불이익을 당했고 수모를 당했다.
나이 어린 양반 놈들한테 반말 듣기가 일수였고, 말도 어패가 없으면 타지 못했고 가마는 상상도 못 했다.
결혼도 양반이랑 할 수도 없는데 세금과 병역 의무는 다 짊어졌다.
중인도 직업 선택의 자유가 제한되었고, 양민과 천민 계급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태어나면서 노비는 죽을 때까지 노비였고, 양반의 재산에 불과했다.
태어나면서 소와 돼지를 잡는 백정은 죽을 때까지 백정 노릇을 하며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계급 사회가 사라진 현대가 그런 면에서는 천국이었다.
충분히 양반인 윤서를 제외한 모두의 희망이 계급 신분 상승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선 아이돌이 대성공을 이룰 경우, 임금님에게 간청해서 신분 상승의 꿈을 꼭 이루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날 저녁 시간에 맞추어 궁으로 들어갔다.
임금님에게 큰절을 드리자 바로 저녁 수라상이 들어왔다.
사극에서는 많이 봤지만, 역시 진수성찬, 특히 고기가 엄청나게 올라와 있는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 임금님! 육식을 줄이셔야 해요.
말하고 싶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만 원짜리 지폐에 있는 세종대왕 용안이 상당히 다이어트한 모습으로 그려진 듯했다.
임금님은 편하게 식사하면서 대화를 하자며, 닭 다리 하나를 떼서 내게 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닭 다리를 들더니 거침없이 한입 베어 무셨다.
닭 다리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려도 개의치 않으시며 내게 물어봤다.
닭 다리 무게만큼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 질문이었다.
“대행수, 너는 내가 왜 조선 아이돌을 지원해 주고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 봤느냐?”
그 질문은 답하기가 쉬웠다.
“마마, 온 백성을 어여삐 여기셔서 그들은 즐겁게 해 주라는 뜻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훅 들어왔다. 그래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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