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의 유배지

공주 숙소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긴 생각에 빠졌다.
현대로 돌아가는 길도 쉽지 않겠지만, 여러 가지 상황들이 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조선 시대의 삶은 내가 현대에서 누리지 못한 많은 것을 주었다.
꿈꾸던 조선 아이돌을 기획하고, 공연하며 대성공을 이끌고 있다. 현대의 ‘진로저’는 상상도 못 할 행보였다.
그리고 현대에서 JM 하 사장의 구박만 받던 내가, 세종대왕과 양녕대군, 맹사성, 박연, 장영실과 같은 역사의 거목들과 돈독하게 지내고 있다.
애정 전선도 비교 불가다. 현대에서 호감을 느끼던 연습생이 있었지만, 매화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한양 상단 대행수라는 신분도 현대의 재벌 2세 부럽지 않았고, 돈도 부족함을 단 한 순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이 상황에서 항상 내 마음에 그리움이 대상이 있었으니, 아이러니하게 엄마의 잔소리와 등짝 스매싱이었다.
현대에서는 그렇게 싫고, 도망 다녔던 엄마의 말과 행동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순간이 전국 공연을 다니면서도 문득문득 뇌리를 스쳤다.
때로는 현대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그냥 매화와 함께 조선 시대의 삶을 만족해하며 살고 싶은 유혹이 항상 있었지만, 그때마다 나를 괴롭힌 건 엄마라는 존재였다.
하지만 현대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더라도 매화와 조선 아이돌 때문에 결심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불명의 밤을 지새웠다.
*****
공주에서의 공연은 아름다운 남강이 보이는 공산성에서 벌어졌다.
현대에서도 백제문화축제가 공산성 근처의 산성공원이나 남강 건너편의 금강신관공원에서 매년 벌어졌었다,
백제에 만들어진 웅진성이 고려 시대로 넘어오며 공산성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조선시대, 현대로 쭉 명맥이 이어졌다.
공산성 안 큰 광장에 무대가 설치되고, 충청도의 딸 도영이 무대에 오르자, 그녀의 이름을 연호하는 ‘아딸따’와 공주 백성들의 함성이 공산성을 뒤덮었다.
가장 막내로, 가장 많은 곡을 만든 천재 소녀 도영은 고향 근처에 오니, 그녀도 표정이 더 밝아졌다.
충청도 양반 고장에 와서 초요갱도 패션의 수위를 조금은 얌전하게 가져갔고, 도영은 자신의 동네를 생각하며 만든 곡을 고향 백성들에게 선보였다.
그중에서 충청도 사투리를 언급하며 만든 곡은 충청도 사람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하며, 얼굴에 미소를 자아냈다.
“그랬슈~ 어쨌슈~ 하는 말은 내 고향 충청도 말이지유.
그랬어~ 어땠어~ 보다 정감 있지 않아유?
맞아~ 맞아~ 따뜻해 마음이.
아부지 조심해유~ 어무니 비 와유~
말은 느려도 행동이 느리지는 않아유. 그치유?
그랴~ 그랴~ 말만 그러지유······.”
재미있는 가사가 진행되고, 흥겨운 후렴구가 반복되자, 공주 사람들은 행동 속도가 느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중독성 있는 춤동작을 같이 따라 해 주었다.
신나는 곡들이 계속 발표되고, 도영의 신명 나는 장구, 북소리와 더불어 조선 아이돌의 악기가 어우러져 모두가 행복해했다.
공주 공연에 이어 청주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이제 충청도의 마지막 공연지인 도영의 고향, 충주로 향했다.
충주에 있는 한양 상단 연락처에 거처를 정하고 저녁을 먹으려는데 어린 남자아이가 찾아왔다.
도영은 반갑게 남자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도섭아!”
“도영 누나~”
남자아이는 한걸음에 달려와 도영의 품에 안겼다.
도영의 친동생이었다.
남매는 오랜만의 상봉이 너무나 반가운지 눈물이 그칠지 몰랐다.
처음 봤을 때는 열여섯이었던 도영이 이제 한 살 나이를 먹고 열일곱이 되었지만, 조선 아이돌 막내였다.
하지만, 막내답지 않게 분위기 메이커였고, 싱어송라이터로서 천재적인 자질을 보이며, 조선 시대 드럼의 명연주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상봉한 동생과의 시간을 위해, 상단 거처의 작은 사랑방 하나에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도영이 얼굴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나를 찾아왔다.
“대행수님, 아무래도 내가 동생과 집에 좀 다녀와야겠어유.”
“내일 공연인데, 공연 후 가지?”
“아니에유. 제가 제 부친땜에 천불이 나서 보고 와야겠구만유. 다녀와서 말씀드릴 게유.”
눈물 젖은 그녀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흘러내렸다.
무엇인가 동생이 전한 이야기에 도영을 자극한 일이 있음을 느끼며, 그녀에게 고향 집에서 자더라도 아침 일찍 공연에 늦지 않게 돌아오라고 당부했다.
숙소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그녀 고향 집이 있으나,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걱정되었다.
수탉이 첫울음을 울기도 전에 도영은 돌아왔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도영은 눈물을 다시 주르륵 흘리더니, 부친의 도박 사실을 말해 주었다.
농사밖에 모르던 아버지가 변했다는 것이었다.
도영의 사정을 감안해서 내가 농한기인 겨울을 나라고, 돈을 보내준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도영의 부친은 그 돈으로 술을 마셨고, 술 마시고 저잣거리의 도박꾼에서 속아, 그 돈을 다 날렸다는 것이었다.
현대에서도 많은 연예인이 가족 문제로 시련을 겪은 일들을 많이 봐왔다.
조선 시대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갑작스러운 부(富)는 사람의 본성을 변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
도영의 부친은 평생은 농사를 짓고 정직하게 살았지만, 도영이 보내준 돈은 아버지에게 술 마실 여유를 주었고, 술은 그를 도박으로 이끌었다.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사람을 현대에서 많이 보아왔다.
도박장에 주기적으로 간 회사 사람들도 있었고, 로또를 지나치게 구입해 저축하고는 담쌓고 사는 친구들도 있었다.
‘인생 한 방’을 외치는 사람들이 도박이 주는 강펀치를 맞아 항상 KO 되었다.
내가 도영의 부모에게 보내준 돈은 조선 아이돌의 공연이 끝나면 지급할 돈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다.
도영의 성공이 가져온 부가 도영의 가족에겐 재난이 되었고, 과거형이 아니라 진행형이 될 수도 있었다.
도영에게 큰 근심이 생겼음을 공감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도영은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단단했다.
“대행수님, 이제 돈 관리는 제가 하기로 했구만유. 성공해서 상금을 받으면, 충주 저잣거리에 상점을 사려구유.
그리고 아버지가 농사지을 땅도 사구유.”
그녀는 임금님이 신분 상승을 시켜준대도, 계속 일을 하며 사는 삶을 살기로 부모님과 약속했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삶이 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교훈을 주었고, 갑작스러운 부와 행운은 삶을 피폐해지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참 야무진 처자였다.
도영은 내게 굳은 결의를 보여주는 듯, 두 손을 불끈 쥐며, 방으로 들어갔다.
충주 탄금호에서의 조선 아이돌 공연은 감회가 새로웠다.
전라도 나주 목민관에서의 공연 때도 느꼈지만, 조선 아이돌 선발전을 열었던 장소에서 재공연은 느낌이 달랐다.
모여드는 사람의 수도, 환호하는 느낌도, 공연 무대를 메꾸는 조선 아이돌의 모습도, 모든 것이 새로웠다.
탄금호에서 도영과 매화는 다시 빛이 났다.
‘아딸따’ 행렬이 갈수록 늘어나고 이제, 마치 여행을 하듯 따라다니며 계속 조선 아이돌의 노래와 춤을 보다 보니, 같이 떼창을 하고 군무를 추는 수준도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조선 아이돌’의 주제곡이 불리자 ‘아딸따’와 충주 백성의 떼창과 군무는 극에 다다랐다.
대성공으로 무대를 마무리하며, 내가 다시 세종대왕의 은덕과 지원을 이야기하자, 광장을 가득 채운 충주 백성들은 ‘임금님 만세’와 ‘조선 아이돌’ 만세를 외쳤다.
공연마다 관찰사나 예문관 관리들이 나와 보고 있으니, 조선 아이돌의 성공과 백성의 세종대왕 지지 분위기는 보고가 될 것이 분명했다.
세종대왕과의 약속을 지키며, 벚꽃 피는 순서대로 북상하고 있었다.
충청도 공연을 마치고 한양 상단 연락소 거처에서 쉬고 있는데, 도영의 부모가 찾아왔다.
도영의 아버지는 밤새 도영에게 혼이 많이 났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내게 찾아와 인사했다.
“대행수님, 우리 딸을 많이 아껴주고 계신단 말씀 들었어유.”
“아닙니다. 도영이 워낙 잘하고 있어요.”
도영의 부친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딸이 피땀 흘려 번 돈을 다시는 그렇게 헛되게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도박은 병이라고 했지만, 딸의 지혜로 그 병이 완치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이제, 충청도를 지나 경기도로 들어갔다.
공연 순서는 경기도 이천, 수원, 인천으로 잡았고,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를 거친 후 한양에서 피날레 공연을 하기로 했다.
한 도에서 본 공연은 세 곳만 했지만, 사이사이 맛보기 공연도 있었고, 이동 시간도 만만치 않게 걸려, 계획했던 여름 전까지 공연을 마치는 것이 빠듯하게 보였다.
경기도 이천은 쌀농사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지만, 양녕대군이 유배된 곳이었다.
양녕대군은 내가 조선 시대에 회귀해 이 조선 아이돌을 만드는데 가장 큰 인연을 만들어 준 사람이었고,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순 없었다.
경기도 이천이 다가오자, 초요갱의 눈빛도 빛나기 시작했다.
이천 현감이 마련해준 숙소에 짐을 풀고 식사 준비를 하려는데, 서찰을 든 노비 한 명이 초요갱을 찾았다.
서찰을 본 초요갱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유배하는 상황이라 이천에서는 행동에 제약이 좀 있으니, 저녁에 좀 조용히 초요갱을 보고 싶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공연 도중에는 가급적 개인 활동을 금했지만, 양녕대군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초요갱을 혼자 보내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양녕대군과 같은 전주 이씨 왕족인 윤서, 양녕대군과 인연이 있는 매화를 초요갱과 함께 양녕대군 거처로 보냈다.
당연히, 나도 함께 갔다.
남들이 보면 사랑의 방해꾼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나름대로 조선 아이돌을 보호할 책무도 있었고, 어느 한 사람에게 특혜를 줄 순 없었다.
초요갱은 엄청 불만이었지만, 윤서는 굉장히 재미있는 자리가 될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이번 기회에 어떻게든 양녕대군이 매화에 대한 마음을 거두게 하고 싶었다.
이미, 한양에서 마지막 연습 공연을 마친 날, 양녕대군이 기방으로 초요갱을 데려갔었고, 그날 매화와의 관계는 끝이란 것이 공표되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그의 입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천에 있는 양녕대군의 유배지는 의외로 한옥이었다
현대 사극에서 본 유배 장소는 쓰러지는 초가집인 데 반해, 양녕대군의 유배지는 크기는 작지만, 단출한 한옥이었다.
거기에 일을 봐주는 노비도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양녕대군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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