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아닌 하나가 된 느낌

키스가 아닌 말 그대로 입만 맞추는 뽀뽀에 불과한 입맞춤이었지만, 느낌은 강렬했다.
가장 가깝게 그녀의 체취를 맡으며, 매화 향기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녀의 향기가 입술에서 그리고 맞닿은 그녀의 얼굴에서 가득 흘러나왔다.
순간이 영원이길 바라는 시간이었다.
세상이 이대로 딱 멈추었으면 하는 극한 행복과 희열이 그녀의 앵두 같은 입술에서 느껴졌다.
봄바람의 따스하고 풍요로운 온기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내 입술로 전해졌고, 백만 볼트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강렬한 파장이 온몸에 느껴졌다.
입술을 떼기 싫었다.
아니, 더 욕심이 났다,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안은 채, 가볍게 그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느끼며, 따뜻한 그녀의 입술 사이로 진격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한 느낌이었고, 가벼운 탄성이 서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노을이 호수를 비추면서 둘의 첫 키스를 축하해 주었다.
불과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히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현대에서 그녀를 꿈에서 만났고, 그냥 그녀의 가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흥분하며 몽정했던 내가, 실제로 그녀에게 입맞춤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6백 년을 거슬러 내가 왔음을 고백할까 하다가 참았다.
이 행복한 순간을 무너트리는 그 어떤 말도 행동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매화의 손을 잡고 저잣거리로 나갔다.
이제 정말 현대 연인들의 D1이 시작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입맞춤 한 번이었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을 서로 나눈 느낌이었다.
둘이 아닌 하나가 된 느낌.
시간이 흐르고, 서로 다른 공간에 있더라도 영원히 기억될 느낌.
조선 아이돌 모두에게 즐거운 하루의 휴가가 끝났다.
윤서는 누군가 만나고 온 듯했고, 초요갱도 양녕대군을 다시 봤는지 다른 사람을 만났는지, 하루 종일 그녀만의 시간을 보내고 왔다.
초선과 도영은 저잣거리에 나가 맛있는 것을 사 먹고 왔다고 했고, 유라는 ‘일영회장’과의 이별로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몇 달간의 이별이 되겠지만, 유라는 진심으로 슬퍼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랑이 찾아오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그 사랑이 둘만의 공간에 자리 잡는데도 부족한 시간이 아니었다.
사랑이란 시간과는 관계없는 세상의 가치였다.
*****
다시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지난번 조선 아이돌 선발 때 개성과 평양을 다녀오긴 했지만, 미지의 땅을 더 가야 했고, 평안 도사가 버티고 있는 평양성 공연도 해야 해 마음이 무거웠다.
윤서의 마음을 알면서도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평안 도사의 청을 내가 거절해 그의 불만이 극에 달해 상소문까지 조정에 냈었다.
부녀의 원한을 모두 받는 상황에서 평양의 공연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세종대왕의 굳은 지지를 믿었고, 이제 나도 백성의 힘을 믿어 보기로 했다.
다행히 조선 아이돌의 인기가 폭발적이어서, 맛보기 공연과 본 공연 모두 모여드는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개성으로의 금의환향을 앞둔 초선은 왠지 슬퍼 보였다.
광대꾼이었던 부친과 무당이었던 모친 모두 사망한 터라 가족이 없었고, 의지할 곳이라고 부친이 몸담았던 사당패뿐이었다.
초선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녀를 위로했다.
“초선 낭자, 이 자랑스러운 모습을 부모님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구려.”
“대행수님, 내레 개성에 오니 죽은 오마이랑 아바이 생각이 더 나서 힘들구만요.”
부모가 그녀의 성공, 면천도 볼 수 없어 너무 슬프다고 했다.
그녀에게 다시 세종대왕의 면천 약속을 확인해 주며, 조선 아이돌 선발이 매년 열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
“대행수님, 고게 참말이래요?”
“초선 낭자, 세종대왕이 직접 내게 하신 말씀이니, 반드시 실행될 것이오.”
초선은 내 말을 듣고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남도를 도는 동안 내레 생각을 많이 했시오. 조선 아이돌 끝나며는 뭐 하고 살까 하고.”
“생각해 둔 게 있소?”
“황해도에는 못살고 꽃제비 같은 어린 아가 많은디, 갸들 춤 좀 가르쳐 줄라고요.”
“춤을?”
“또 조선 아이돌 뽑아서리 돈도 벌게 해주고, 면천도 시켜주믄 그거시 아들 꿈 아니겠음둥?”
초선은 자신의 힘든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엄마가 다 돌아가신 후, 일가친척 한 명 없어,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싸움 같았다고 했다.
개성에는 부자들도 많지만, 자신과 같은 거렁뱅이, 꽃제비들이 많아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상금으로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돕고, 춤도 가르쳐 주고 싶다고 했다.
나이는 이제 스무 살이 되었지만, 속은 알차게 여문 벼 같은 처자였다.
그녀의 꿈을 지지하며, 조선 아이돌이 끝난 이후에도 내가 그녀의 꿈을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현대의 성일과는 달리 조선 시대의 유성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조선 시대의 상황이 너무나 좋았다.
삶의 밑바닥에서 JM 하 사장의 냉소 어린 ‘야~, 진로저!’ 소리를 들으며 매일 택시 기사보다도 더 많은 운행 거리를 운전해야 했던 생활과 비교하면, 너무나 삶의 만족도가 달랐다.
돈도 넘쳐나니 너무나 좋은 곳에 쓸 수 있고, 무엇보다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럼에도, 가난한 양반에겐 머리를 숙이고, 어린놈들에게도 존대해야 하는 계급 사회가 싫었다.
이 계급 사회가 현대에서도 계속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돈이 현대에서는 계급인가?
다이아몬드수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표현이 자조적으로 쓰이는 현대를 생각하며, 나는 몸서리가 쳐졌다.
이런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대로 회귀한다면, 다시 ‘진로저’로 돌아갈 텐데, 그때의 나에겐 어떤 행복의 가치가 있나, 회의도 들었다.
개성 공연은 조선 아이돌 선발전과 같은 장소인 박연폭포 근처의 범사정(泛斯亭) 앞 광장으로 했다.
같은 장소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조선 아이돌에게 큰 의미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뽑힌 사람도 마찬가지 영광이었다.
수많은 경쟁자와 힘든 선발전을 치를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위상으로 조선 아이돌 완전체로 무대에 섰다.
공연을 위해 범사정으로 가면서 문득 박연폭포 이름이 궁금해졌다.
“도방, 이 박연폭포가 궁궐의 박연 선생과 무슨 관련이 있소?”“대행수님, 그건 전혀 아니지배.”
도방이 설명한 박연(朴淵瀑布)폭포의 설은 좀 애처로웠다.
아주 옛날에 박진사(朴進士)라는 사람이 이 폭포에 놀러왔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폭포 밑 못 속에 사는 용녀(龍女)에게 홀려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이 폭포에서 아들이 떨어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비탄에 빠져 자신도 폭포 밑 담에 떨어져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그래서 폭포 밑의 담을 고모담이라 하고, 박씨의 성을 따서 박연폭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었다.
슬픈 전설을 듣고 다시 박연폭포와 고모담을 바라보니, 모자의 애처로웠던 상황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범사정 앞에는 벌써 인천에서 이동한 ‘아딸따’와 개성 구경꾼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한양에서 온 ‘아딸따’ 무리와 인천에서 육로를 걸어온 ‘아딸따’ 무리들이 마치 이산가족 상봉한 것처럼 서로 얼싸안으며 반가워했다.
조선 아이돌을 사랑하는 무리로 만나, 공통 분모를 지닌 그들의 끈끈함은 혈육보다 더 강해 보였다.
하아~, 그들 앞에서 ‘일영회장’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점박이의 모습이 조금은 거슬렸지만, 조선 아이돌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모두 인정해 줘야 했다.
현대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트로트 가수, 프로 스포츠 경기를 보러 장거리 원정을 마다치 않는 골수팬들이 있지만, 조선 시대는 더 기가 막혔다.
그 장거리를 걸어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을 이렇게 따라다니는 그들의 열정은 엄지척을 백 개는 날려줘도 부족할 판이었다.
구름처럼 모여든 구경꾼들 앞에서 다시 한번 세종대왕의 백성에 대한 사랑과 조선 아이돌 지원을 칭송해 드렸다.
그리고 조선 아이돌을 한 명, 한 명 무대에 올려 소개를 해줬다.
초선이 등장하자, 그녀의 변신에 깜짝 놀란 사당패 친구들이 감격의 북을 두드리며 그녀의 금의환향을 축하해 줬다.
“초선이 몰라보고 이뻐졌지배. 느그 아부지랑 오마이가 하늘에서 보고 얼매나 좋아할지, 눈에 그려지고마이.”
사당패를 이끄는 사람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는 듯했다.
도영의 상쾌한 조선 시대 드럼은 어딜 가나 구경꾼들의 관심을 끌었다.
보기는 본 것 같은 악기인데, 세워 놓는 모습도 새롭게 장착된 놋쇠 악기와 발까지 쓰며, 온몸으로 연주하는 그녀의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조선 시대 드럼 실력은 일취월장해, 혼자 악기 4개 정도를 동시 연주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거기에 유라의 현란한 울림통을 장착한 비파와 초선의 춤 솜씨가 어우러지며 기가 막힌 조화를 이뤘다.
앞줄에 선 3명의 선녀에 구경꾼들은 박연폭포에 사는 용녀(龍女)가 환생한 것 아니냐고 놀라워했다.
용녀들이 천상의 노래를 부르며, 귀엽고 섹시한 춤을 추자, 개성 남정네들의 환호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공연을 다니며, 모두 좋은 관객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현대든 조선 시대에든 진상들은 꼭 있었고, 개성 공연에서도 저잣거리에는 놀 법한 건달들과 한량들이 조선 아이돌을 희롱하는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그럴 적마다, 점박이가 이끄는 ‘아딸따’ 들이 그들을 말로 제압하며, 분위기를 바꿔 주었다.
때로는 말로 면박을 주기도 했고, 겁 없이 달려드는 건달들은 ‘아딸따’ 수호대들이 온몸으로 방어하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나름 ‘아딸따’ 들도 역할 분담을 하는 듯했다.
홍보도 하고, 경호도 하며, 이동 시 숙식을 책임지는 조직도 정하는 듯, ‘일영회장’이 만든 규칙을 점박이가 이어받아 잘 진행하고 있었다.
개성에 황진이가 나중에 태어나도 이렇게 인기를 끌 순 없을 정도로 박연폭포가 보이는 범사정에서의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공연이 끝나도 ‘재창(앙코르)’을 외치며, 자리를 떠나갈지 모르는 구경꾼들을 위해 초선을 마지막 무대에 올렸다.
초선은 조선 아이돌이 끝나면 꼭 다시 개성으로 돌아와 춤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하며, 그녀만의 춤을 신명 나게 추기 시작했다.
그녀를 데리고 보살펴 주었던 사당패들도 무대 앞으로 모두 나와 신명나게 춤을 추며, 흥겹게 그녀의 피날레 무대를 축하해 줬다.
그녀는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며 꿈의 무대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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