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에게 뻥을 치다니

대장정을 떠나기 전에 다시 세종대왕께 면담 요청을 하고 궁궐에 들어가, 나는 다시 북쪽으로 곧 출발할 것을 보고했다.
임금님은 나와 매화를 염려했지만, 평안도와 함경도의 겨울이 일찍 오기 때문에 두 달의 시간 동안 모든 일정을 마치고 싶었다.
세종대왕께서는 온 백성들이 쓸 수 있는 한글에 대해 고민을 심각하게 하신 듯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임금님은 백성에게 올바르고, 쉬운 말을 가르치고, 그래서 백성을 잘 다스리고 싶은 마음이셨다.
자음과 모음에 대해 다 써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 임금님께서 고민을 시작하여 20년이 훌쩍 넘어선 1446년이 되어야 훈민정음 창제가 되는 데, 무엇이라도 하나 도움을 주고 싶었다.
세종대왕께서 집현전에서 젊은 학자들이 학문에 열중하며, 한글 창제에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젯밤 성삼문을 본 이야기를 했다.
얼마나 학문에 열중하는지 잠도 부족해서 졸고 있기에, 어의를 벗어서 덮어주고 나왔다고 했다.
캬~, 성삼문 이름이 임금님의 입에서 나오기에,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그가 바로 세종대왕 때 집현전에서 맹활약했던 뛰어난 학자였고, 훈민정음 창제에도 큰 역할을 했었다.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사육신 중 한 명이었다.
수양대군, 세조는 세종대왕과 소헌황후의 둘째 아들이었고, 세종의 첫째 아들 문종의 동생이었다.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과 문종의 아들, 단종 사이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비극이 눈에 보이는 듯해 가슴이 아팠다.
세종대왕은 넌지시 말했다.
“대행수, 나중에 집현전에 들어와 짐을 도울 생각은 없느냐?”
“······제, 제가요?”
“짐은 나에게 힘을 실어줄 젊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저는 한자도 모르는 무식한 양민에 불과합니다. 어찌, 저 같은 놈이 학덕 높은 집현전 학자를 한다는 말이옵니까? 천부당만부당 하옵니다.”
“장영실은 노비인데도 선왕이 선발해 지금도 조정에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세종대왕은 자신도 신분과 관계없이 인재를 뽑고 싶고, 내가 전한 서찰이나 한양 상단 거처에서 보여준 변화, 대화 때 느낀 획기적인 생각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임금님이 자신의 철학에 딱 맞는 인재라고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왜냐하면, 내 서찰이나 획기적인 생각은 모두 역사책 속 세종대왕의 업적에 기반을 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내게 집현전 학자를 해 달라니······.
“대행수, 지금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네가 한양 상단 일을 해야 하고, 조선 아이돌 공연을 마쳐야 하니, 겨울에 다시 이야기를 나눠 보자꾸나.”
“네, 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미래에 죽임을 당할 불쌍한 성삼문을 위해서, 또 훈민정음 창제에 너무나 오랜 세월 고생하실 임금님을 위하여, 뭐라도 도움을 조금이나마 주고 싶다.
“마마, 제가 한자를 깨우치지 못해 왜 그렇게 어려운 천자문을 공부해야 글자를 쓸 수 있는지 원망을 많이 했사옵니다.”
“나도 백성이 한자를 깨우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아우~, 답답했다.
세종대왕께서 자음 17자와 모음 11자로 28자만으로도 모든 표현이 가능하게 만드시고, 글자 모양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하고 다 써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내 정체가 의심받을 것이었다.
‘넌, 도대체 누구냐?’
의심을 받지 않고, 힌트를 줄 묘안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마마, 아뢰옵기에 황송하오나 미천한 저희는 외울 글자가 30자만 넘어도 힘들 것입니다.”
“30자?”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들이 어떻게 많은 글자를 다 기억하겠사옵니까?”
“그건 그렇겠구나.”
휴~, 겨우 글자 수는 힌트를 주었다.
”중국에는 상형문자가 있다고 합니다. 모양과 문자가 비슷해 외우기가 쉽다고 들었사옵니다.“
”대행수, 너는 무식한 상인이 아니다. 상형문자도 들어봤다니“
”중국에서 물건을 팔러 나온 상인한테 들었사옵니다.“
속으로 죽을죄를 지었다고 임금님께 빌었다.
아니, 세종대왕에게 뻥을 치다니.
중국에서 나온 상인을 만난 적도 없는 나는 대담하게 임금님께 거짓으로 상형문자를 언급했다.
한글의 자음이 혀 모양을 본떠서 만들고, 주요 모음 3자도 하늘과 땅, 인간의 상형문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한글날 TV 프로그램에서 배웠던 지식이었다.
내 말에 세종대왕은 깊은 생각에 잠기셨다.
매일 학문에 열중하시고, 한글 창제에도 온 생각을 몰두하시는 임금님께서 내 힌트에 고민이 많아지셨다.
글자 수 30자 이하, 상형문자의 두 힌트로 나는 임금님의 한글 창제에 어마어마한 기여를 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깊은 고민 후 다시 고개를 들어서 내게 말했다.
”대행수, 너는 아무래도 짐을 옆에서 도와주어야겠다.“
”······네, 네?“
애고, 이놈의 입이 문제였다.
성삼문의 이름을 듣고, 더 안타까운 마음에 한글 창제의 훈수를 두어 준 것이 세종대왕의 내게 대한 마음에 확신을 심어줘 버린 것 같았다.
세종대왕께선 내게 조선 아이돌의 북쪽 공연과 마지막 한양 공연을 마친 후 궁궐로 입궁하라는 어명을 내리셨다.
하아~, 졸지에 집현전 학자가 되게 생겼다.
현대에서도 그렇지만, 조선 시대에서도 어딘가 돌아다녀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ENFP의 자유분방한 활동가 형인데, 학자로 집현전에 묶이는 것은 절대로 피하고 싶었다.
일단 궁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세종대왕에게 더 말해줄 것은 내 머릿속에 널려 있었지만, 그만 입을 다물기로 했다.
조선 아이돌 공연을 마치는 대로 입궁하겠다고 약속하며, 세종대왕에게 큰절을 하고 나왔다.
조선 아이돌 숙소로 가서, 세종대왕을 뵙고 왔다고 이야기해 주며, 이틀 후에 평양성으로 대장정을 떠나가겠다고 말했다.
윤서는 평양에서 집으로 돌아간 후 그 어떤 연락도 없었다.
도영과 초선, 초요갱 모두 윤서가 기름과 물 같은 존재였다며, 차라리 5명으로 공연을 한 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매화는 윤서 집안과의 악연과 죽을 고비를 넘겨서인지, 윤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제 6명이 아닌 5명으로 조선 아이돌의 재탄생이었다.
조선 아이돌을 처음 선발할 때 생각했었던 숫자였고, 왠지 앞줄 2명과 뒷줄 3명이 더 짜임새 있게 보이는 구조였다.
평양으로 가서 윤서의 연락을 기다려 보겠지만, 평안 도사가 파직을 당하고 집에서 자가 유배를 하는 상황에서 딸인 그녀가 우리와 동행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양녕대군에게도 다시 북쪽으로 공연을 떠난다고 보고했고, 맹사성 어른과 박연 선생, 장영실에게도 공연을 모두 마친 후 다시 인사드리겠다고 했다.
이제 북쪽으로 향할 준비는 모두 마쳤다.
*****
수탉의 힘찬 울음과 함께 평양성으로 향할 아침이 밝았다.
유성의 부친과 모친은 내 손을 붙잡고, 제발 건강 좀 보살피라고 했다.
긴 단식으로 몸이 다시 허약해진 유성을 바라보며, 유성의 모친은 온갖 보약과 좋은 음식으로 건강을 보살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등짝 스매싱을 하던 엄마가 생각나는 것을 보면, 참 현대의 내 부모와 고운 정 미운 정이 진하게 들었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술에 취한 내게 엄마가 들고 나온 뚫어뻥까지 그립기까지 했다.
조선 시대에서 부러운 것이 없는 내게 참 묘한 느낌이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유성 모친의 지극정성 모성애에 감동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항상 현대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더 진해져만 갔다.
마치 고향 떠난 실향민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처럼.
평양성으로 향하는 길은 단순한 여정이 아닌 보은의 길이었다.
그동안, 평양성에서부터 한양으로 향하는 길에서 수많은 백성이 보여주었던 안타까움과 동정의 손길이 기억났다.
이제, 정상을 되찾은 매화와 공연을 그리워했던 조선 아이돌은 신명 나게 중간중간 맛보기 공연을 하며, 평양성으로 올라갔다.
‘아딸따’의 ‘일영회장’은 얼마 남지 않은 과거 시험으로 함께 할 수 없었지만, 다시 전국 조직에 조선 아이돌의 북진을 알리며, 점박이에게 권한을 일임했다.
점박이와 전국에서 몰려온 ‘아딸따’ 백성들이 우리 행렬 뒤에서 분위기를 잡아 주었다.
거의 한 여름 동안의 긴 공백이었지만, ‘아딸따’의 의리는 대단했다.
다시 2백 명 가까운 ‘아딸따’가 조선 아이돌을 따라 행렬을 같이 했고, 북진할수록 새롭게 가입한 ‘아딸따’ 수가 늘어났다.
평양성을 입성할 때는 그 숫자가 3백여 명에 달했다.
평양성은 모두에게 특별했다.
처음으로 대동강 본 공연이 무산된 곳이기도 했고, 매화와 나의 목숨이 사라질 뻔한 곳이기도 했다.
안 좋은 기억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매화의 석방을 위해 천여 명의 백성이 모여 시위하며 함성을 질러 주었던 곳이 평양성이었다.
마치, 개선장군이 평양성을 입성하는 것처럼 조선 아이돌의 행렬은 대단했다.
매화와 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수많은 백성과, 조선 아이돌의 맛보기 공연에 열광했던 구경꾼들이 모두 우리 행렬 주위에 몰려와 환영해 주었다.
우리는 모두에게 내일 대동강 강가에서 본 공연을 할 것이니 모두 오셔서 우리의 공연을 봐 달라고 부탁했다.
한양 상단 도방과도 재회했다.
내일 공연을 위해,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쳤다고 했다.
새로 부임한 평안 도사는 조선 아이돌 행사 준비를 위해 완벽한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도방이 준비해 준 저녁 식사를 맛있게 하고, 쉬려니 윤서 생각이 났다.
그래도 거의 10개월을 같이 생활했었던 윤서였다.
나에 대한 호감을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그로 인해 그녀가 매화에게 더 적의를 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의 원한은 한여름에도 서리를 내리게 한다고 했는데, 과연 내가 그녀의 호감을 받아들였다면 매화에 대한 복수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평안 도사가 매화를 죽이려 했던 배경에 집안의 악연만이 원인이 아니란 생각이 계속 들었었다.
윤서를 만나 그녀의 마음을 들어볼 수도 없었지만, 나는 윤서의 집이 있는 평양성에서 잠을 자려니 이런저런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매화의 고통이 나로 인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더 매화에게 미안해졌다.
드디어, 평양성 공연의 날이 밝았다.
대동강 공연장으로 향하는 나와 조선 아이돌은 모두 행복했다.
공연을 석 달 가까운 세월을 하지 못했다.
모두가 그리워하는 공연장을 가득 메운 백성의 함성이 크게 울렸다.
조선 아이돌과 매화의 이름을 환호하는 평양성 백성들의 응원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무대에 올랐다.
드디어, 평양성의 본 공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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