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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꽃
작품등록일 :
2024.05.0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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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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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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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DUMMY

1화.





“모든 것은 천하대의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아가씨라면 제 선택을 이해해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불타는 대저택, 고아한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그의 앞에는 한 여인이 산발을 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가솔들과 무인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옥도를 연상케 하는 풍경 속, 살아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여자는 핏발 선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노려봤다.

그녀의 반쪽 얼굴은 아름답고 나머지 반쪽은 화상 때문에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흉측한 얼굴에 살기 띤 시선이 더해지니 오금이 저릴 정도로 끔찍했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남자의 시선은 덤덤했다.


계월향은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 속에 원망과 증오가 가득했다.

구하러 온 이들은 모두 죽었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사방을 둘러싼 불길 속에서 빠져나갈 능력도 없었다.

만에 하나 그의 변심으로 혹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운 좋게 살아난다고 해도 장애를 떠안고 평생 후유증과 고통을 견디며 살아야 할 것이다.


가족들은 전부 죽고, 가족이라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했다.

그녀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존심을 굽히고 원수의 발치에 엎드려 살려달라 애원할 필요도 없었다.


계월향의 시선 속 체념이 스쳤다.

더 이상 삶에 미련은 없다.

다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헛소리 말아라. 왜 배신한 거지?”

“아가씨는 부 안에서 풍족하게 자라셨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이 작은 마을을 벗어나면 바깥엔 더 큰 세상이 있습니다. 계씨 가문이 뿌리 깊은 무림세가라 이 마을 안에서 명망 높다고 해도 바깥사람들은 계씨 가문은 물론, 이 작은 성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말하며 남자의 시선이 번득거렸다.

무언가를 추억하는 듯한 그의 얼굴은 기분 좋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이지만 일렁이는 불빛에 비친 그의 모습은 탐욕스럽게만 보였다.


“세상은 힘 있는 사람들의 뜻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힘이 있어야 지킬 수도 있는 겁니다. 계씨 가문 사람들은 그 간단한 이치를 깨닫지 못했으니 그리 나약한 거지요.”


남자는 다시 계월향을 바라봤다.

자신이 밟아 죽인 개미를 내려다보듯 혐오와 연민이 담긴 시선으로.


“그 진귀한 비급을 숨겨놓고 더 나아갈 수 있으면서 사사로운 정의에 매달려 포기하니, 같은 무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급? 고작 그것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그러고도 네가 정파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정사를 떠나서 무인이라면 누구나 강해지기를 열망하는 법입니다. 대부분은 한계를 깨닫고 포기한 것을 합리화하지만요. 아가씨처럼요.”


계월향은 입술을 깨물었다.

힘만을 추구해 갖가지 악행을 일삼는 사파와는 달리 정파는 글자처럼 정도를 지키며 의과 협을 중시한다.

그러니 정파 소속의 무인이 저러한 말들을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탐욕에 눈이 멀어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을 듯했다.

그의 추악한 속내를 진즉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다.


“아가씨께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가시는 게 안타까워 한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주인어른께서 모은 비급은 보통 물건이 아닙니다. 어느 높으신 분의 지시로 만들어진 건데 완성하기도 전에 사라졌다가 간신히 행방을 찾은 거지요. 그 비급에 적힌 무공들을 익히면 신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터무니없는!”


답행을 나온 어느 소저가 물 위를 걷는 사람을 봤다더라, 옛날 어느 도인이 부채로 허공을 휘저으니 땅이 갈라졌다더라, 삿갓을 쓴 어느 무인이 검을 휘두르니 봉우리 하나가 사라졌다더라, 어느 고사가 극한의 경지에 오르곤 신이 되어 승천했다더라 하는 얘기까지.

중원에 많은 고수가 있다고 하지만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아무리 대단한 무공을 익힌다고 한들 한낱 인간의 몸으로 그런 것들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광기 어린 눈빛으로 묻지도 않은 것들을 자랑하듯 늘어놓는 그의 얼굴을 보니 진심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기둥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불길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남자는 소매로 코와 입을 막곤 그녀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 속 살의에 계월향은 몸을 움찔했다.


다음 순간, 그가 소매에 숨겨뒀던 비수를 꺼내며 말했다.


“사실, 저도 원해서 이리하는 건 아닙니다. 주인어른께서 높으신 분의 물건을 훔쳤고 그 대가를 오늘에서야 치르는 것뿐입니다. 부모의 죄를 자식이 대신 갚는 거니 너무 억울해하지 마십시오.”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 앞에 섰다.

계월향은 체념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순간, 차가운 금속의 느낌과 함께 허리가 뜨끈해지며 강렬한 통증이 몰려왔다.

한순간 격통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계월향은 눈을 부릅뜨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도 없이 경직된 몸을 보니 마혈을 누른 듯했다.


좀 전 찔린 허리에서는 불에 덴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몸은 죽어가고 있고 살아날 가망도 없었다.

온몸이 불에 타며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누구보다 온화하다 믿었던 그였지만, 아무 원한도 없는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속죄는 계씨 가문에서 얻은 비급으로 더 높은 무공을 쌓아 앞으로 많은 이들을 지키면서 하겠습니다. 가시는 길 평안하시길.”


무공을 익힌 사람답게 걸음은 가볍고 빨랐다.

그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계월향 홀로 남겨졌다.

그와 동시에 천둥 같은 굉음이 들리고 곁의 기둥이 서서히 기울어졌다.


연기를 너무 마신 탓에 흐려지기 시야와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주변의 불길은 이제 모든 걸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개자식.’


계월향은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눈앞에 자신을 덮쳐오는 커다란 기둥이 보였다.

모든 게 느리게 느껴지고 생전의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기쁘고, 화나고, 사랑했고, 슬펐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가득 고인 눈물이 떨어졌다.

쓰러진 기둥이 자신을 덮치기 직전, 두려움과 억울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부모, 동생, 여종, 호위 모두가 억울하게 죽었다.

숨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계월향은 눈을 질끈 감으며 독하게 맹세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가족들의 무덤에 술 대신 저들의 피를 뿌려 한을 달래겠다고.


* * *


“헉!”


창을 통해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뜬 소녀는 가슴을 손으로 누른 채 숨을 헐떡였다.

머리는 식은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 있고,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듯 손이 차가웠다.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사나운 기세로 모든 걸 집어삼키려 했던 불길은 사라지도 끔찍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태의가 와도 불가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죽어서 명계에 온 걸까?

죽기 직전의 순간을 떠올리며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떨었다.


아침 식사를 가져온 여종은 창백한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보고는 놀라서 다가왔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셨어요? 웬 식은땀이 이렇게......”


계월향이 눈앞의 여종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서 목이 잘리는 걸 똑똑히 봤으니 살아있을 리 없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아주 멀쩡한 모습이었다.

머리와 몸이 제대로 붙어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얼굴은 상처 하나 없이 멀끔했다.

그리고 어쩐지 기억 속 모습보다 대여섯 살 정도는 어려 보였다.

역시 자신은 죽어서 저승에 온 모양이었다.


“미안해.”


순간 눈물이 차올라 계월향은 향란을 끌어안았다.

향란은 끝까지 자신을 지키려다 진익현의 칼에 죽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충성스럽게 곁을 지켰던 그녀를 다시 보니 반갑고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자칫 음식이 담긴 쟁반을 떨어뜨릴 뻔한 향란은 조심스레 쟁반을 침상에 올려놨다.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무슨 꿈이라도 꾸셨어요?”


그 말에 계월향의 시선이 흔들렸다.


“꿈이라고?”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들었다.

주변의 낯익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벽 한 귀퉁이에 붙어있는 호랑이 족자, 격자무늬 탁상 위에 놓인 화병에는 옥색 호접란 한 쌍이 피어있었고 그 옆에는 네 모서리를 도금한 면경이 있었다.

어릴 적 자신의 규방이었다.


순간 천둥에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뜨였다.

향란을 끌어안은 채 계월향은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검술 수련을 하느라 손가락과 손바닥 일부에 굳은살이 박였지만, 아직은 희고 매끄러운 살결에 고운 손이 보였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코끝에 감도는 은은한 훈향, 햇살의 따스함까지.

모든 게 지나치리만치 생생했다.


"아가씨께서 어제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 전복죽을 가져왔어요. 입맛이 없으신 것은 알지만 한 술이라도 드세요. 어제도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부엌에서 수정과를 발견했는데 잊고 놓고 왔네요. 식사하시는 동안 얼른 가서 가져올게요.“


향란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며냈다.

그러나 얼굴에서 슬픈 기색을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했다.

그녀는 잠시 침상 위에 올려뒀던 쟁반을 상 위에 올려두곤 서둘러 방을 나가며 눈물을 훔쳤다.


한편 홀로 남겨진 계월향은 멍하니 앉아 허공을 바라봤다.

그 모든 게 다 꿈이었다고?

그럴 리 없었다.

눈앞에서 자신을 지키려 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갔다.

불구덩이 속에서 살이 타던 고통에 아직도 심장이 이렇게 뛰는데 꿈일 리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찔러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

손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고통이 생생했다.


계월향은 눈을 크게 뜨고는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에 청수한 소녀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화상으로 흉하게 일그러져 있어야 할 얼굴은 깨끗했다.

달빛처럼 하얀 피부는 윤이 났고, 동그란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 커다란 눈은 끝이 살짝 올라가 있어 도도해 보였다.

버선 모양의 코는 작고 오뚝했고 야무지게 다물린 붉은 입술은 생기 있고 부드러워 보였다.


향란과 마찬가지로 앳된 얼굴의 소녀는 먹처럼 까만 비단 같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소박한 흰옷을 입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상복이었다.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거울 속 모습이 대단히 익숙했다.

마치 부모님 장례를 치르던 그날과 같았다.


작가의말

무협은 처음인데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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