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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꽃
작품등록일 :
2024.05.08 16:05
최근연재일 :
2024.05.28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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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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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DUMMY

6화.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월천성 초입.

긴 행렬이 늘어섰다.

그중 행렬의 앞쪽엔 유난히 큰 덩치에 윤이 나는 검은 털, 긴 다리에 우락부락한 근육을 뽐내는 말이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근육에 외모 또한 아름다웠고, 움직일 때마다 햇빛을 받은 털이 반짝거렸다.

언뜻 보기에도 대단한 명마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말 위에 앉은 사람만큼 눈부시지는 않았다.


일자로 날렵하게 뻗은 눈썹, 일자로 쭉 뻗은 곧은 콧날은 날렵했고 턱선은 날카로웠다.

눈매는 끝이 약간 올라가 있고 검은 눈동자는 깊고 운치 있는 데다 속눈썹은 길고 입술도 붉었다.

그는 소매가 넓고 긴 은색 구름이 수 놓인 짙은 붉은 색 옷을 입고 허리엔 흑색 요대를 맸다.

어깨엔 붉은 자수가 있는 흑색 피풍의를 걸치고 손에는 말고삐를 느슨히 쥔 채 냉담한 얼굴로 그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엔 은관을 썼고, 허리춤에 달린 백옥엔 용이 조각되어 있었다.

예왕, 강희재였다.


그때, 행렬의 앞으로 누군가 달려들었다.

그 탓에 선두의 몇은 황급히 고삐를 당기곤 놀란 말을 진정시켰고, 행렬은 멈춰 섰다.

가장 선두에 있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앞을 바라봤다.

그곳엔 승복을 입은 노인 하나가 서있었다.


옷은 오랫동안 갈아입지 못한 듯 더럽고, 보통의 승려들과 달리 머리칼이 덥수룩했다.

떠돌아다니는 승려인지 걸인이 승복을 구해다 입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칫 사고가 날 뻔한 상황이나 노인은 되려 뻔뻔스레 요구했다.


“마을을 찾지 못해 며칠째 굶었는데 혹 음식을 좀 나눠줄 수 있겠소?”


그 말에 분노해 무어라 말하려던 하인은 뒤늦게 강희재의 눈치를 살피며 공순히 말했다.


“전하, 송구합니다. 지금 치우겠습니다.”


그때, 노인이 강희재를 향해 다가갔다.

그 광경에 너무 놀란 몇몇은 딸꾹질까지 했다.

뒤늦게 서둘러 말에서 내린 몇이 노인 앞을 막아서려 했지만 노인은 그들을 가볍게 피하곤 끝내 강희재 앞에 섰다.

그의 직속 호위들이 칼을 빼 들었고,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걸인들이 신분 높은 이를 붙잡고 매달리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들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알아서 눈치는 봐가며 행동했다.

이 자리엔 칼을 빼든 호위들이 여럿 있었고, 강희재 또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대담하게 군다는 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라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것이거나 제정신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소림은 아닌 것 같고 무당에서 온 건가?”


나른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강희재가 입을 뗐다.


“어느 곳도 아닙니다. 떠돌이입니다.”

“내게 볼일이 있나?”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오랜만에 사람을 봐서 배가 고파 도움을 청하려던 것뿐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그 말에 노인을 빤히 보던 강희재는 하인을 시켜 그에게 떡 몇 개와 동전 몇 닢을 쥐여줬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사람들은 얼떨떨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강희재는 여섯 황자 중에서도 가장 성정이 냉혹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일단 그의 처소에 들어간 궁인 중 절반은 죽어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결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며 행렬을 방해한 더러운 행색의 걸인 승려에게 자비를 베풀 만큼 마음씨가 좋지도 않았다.

이에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 노인이 천운을 타고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 노인의 만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떡 한 덩이를 꾸역꾸역 먹어 치운 노인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강희재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보아하니 공자께서는 단명할 운명을 타고났군요. 업도 많이 쌓았고, 누군가에게 깊은 원한을 산 모양입니다. 제가 보니 그 몸으로 여태 버틴 것만 해도 용합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텐데요.”


노인은 안타깝다는 듯 혀까지 차며 이어 말했다.


“장담하겠는데 십 년이 고작일 겁니다. 아무리 용써도 그 후에는 반드시 죽을 겁니다.”


노인의 말은 대단히 악랄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아무래도 단단히 실성한 모양새였다.


“이 노인이 실성을 했나?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감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앞에 있던 하인이 노인을 밀치며 소리쳤다.

강희재는 됐다는 듯 손을 들어 저지하곤 말했다.


“지금 보니 박수였던 모양이구나. 무당 흉내를 내고 싶거든 사람을 잘 골랐어야지. 그냥 보내주려 했더니 스스로 명을 자초하는구나.”


노인의 불길한 말에 그의 인내심도 짧아진 모양이었다.

강희재가 살기를 드러내니 주변의 공기마저 차가워지는 듯했다.

하인들은 다리가 후들거렸고 호위들 또한 몸이 굳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죽은 뒤에 나를 원망하지나 말거라.”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그런 독한 것에 걸린 지 모르겠으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좀 전에 공자께서 베풀었던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알려드리지요. 서쪽 방향에 공자의 기연이 있습니다. 그 인연을 놓치지 마십시오.”

“내가 그 말을 믿어야 하느냐?”

“믿든 믿지 않든 공자의 선택입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조언입니다. 더 이상 업을 쌓지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붙잡아올까요?”


곁의 호위가 물었다.


“됐다. 놔두어라. 꼴을 보니 어차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아 보이던데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 없지.”


그 말을 하고서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노인은 어느새 사라진 후였다.

걸음이 그리 빨라 보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라졌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광인 하나 때문에 시간을 너무 잡아먹었군. 다시 출발하지.”


하루를 더 걸어서 행렬이 마을에 도착하고 어느 객잔에 들어섰을 때, 그 노인을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밤이 깊었다.

계월향은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탁상 위에는 며칠 전, 가져온 무공서가 펼쳐져 있었다.


계월향은 눈을 감고 수련에 집중했다.

무공은 크게 외공과 내공으로 나뉜다.

그동안 자신이 배운 것은 외공이지만 무공서에 쓰인 것은 내공이었다.

무공서에는 무공은 내공과 외공이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위력이 발휘된다고 쓰여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이 무공서에 적힌 대로 수련해 보니 그동안 익혔던 내공이 얼마나 보잘 것 없던 수준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 여태 자신이 수련했던 것은 반쪽짜리에 지나지 않았던 거다.

다행히 외공이며, 내공이며, 이 책에는 그러한 것들이 아주 소상히 적혀져 있었다.


단전에 기를 모으는 것이 바로 축기다.

단전에 모은 기를 운행하는 것을 운기라 하며, 운기에 이르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다만, 그 기운이 너무나 미약했던 나머지, 느끼는 것조차 쉽지 않아 수련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한참 집중하던 계월향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봤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침상 밑에 마련된 비밀 공간에 무공서를 밀어놓곤 향란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고서 오래되지 않아 향란이 세숫물을 가지고 들어왔다.


“아가씨, 또 밤새 안 주무셨어요?”


그녀가 먼저 일어나있는 계월향을 보곤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 잤어. 좀 일찍 깨서 그래.”


계월향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분명 눈치로 봐서는 또 밤을 지새운 것 같은데 이상하게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게 며칠 전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요즘 그녀는 밥을 먹을 때도, 씻을 때도, 걷다가도 종종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긴 얼굴로 넋을 놓을 때가 많았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가문을 홀로 책임지게 됐으니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려 했지만, 안색이나 표정을 보면 나빠 보이지만은 않으니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괜히 상처를 헤집는 꼴이 될까 차마 묻지는 못했다.


계월향은 수련하느라 흘린 땀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아침을 먹었다.

머릿속에는 계속 무공서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무공서를 가져온 지 고작 한 달이 지났다.

그런데 하루가 지날 때마다 무공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몇 장 읽었을 뿐인데 이러한 성과라니,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생의 진익현 또한 이 무공서를 발견하고 익혔을 것이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도깨비 같았다.

칼을 한 번 휘두를 때 무인 다섯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썰렸다.

이는 외공만으로는 불가한 일이었다.


이 책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무공서를 갖고 있거나 집필한 걸로 봐서는 대단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는 이미 과거에 이러한 경지에 올랐을 테니 지금의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와 맞서려면 최소한 그와 비슷한 경지에는 올라야 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뜰을 거닐던 계월향의 시야에 신 한 쌍이 들어왔다.

바닥을 보고 걷던 그녀는 그제야 바로 앞에 사람이 있음을 깨닫곤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진익현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봄날의 햇살처럼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가씨, 저와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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