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선 1035 (3)

"중전마마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나한테는 어림도 없다."
결기 가득한 숙빈의 분노로 승부수를 던지는 천수무녀.
화빈은 온갖 수를 부려서 숙빈의 저주인형을 만들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손톱은 물론이고 머리카락도 확보하지 못한 까닭은, 오래전부터 저주인형의 존재를 알고 대비해 온 숙빈의 철두철미함 때문.
심지어 화빈이 궁 밖에 외출했을 때 사람을 들여서 저주인형을 전부 불태워 버릴 정도로 과감하게 견제했던 숙빈.
화빈은 숙빈의 소행이라고 확신했지만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 화재 건 이후로 화빈은 처소에 칩거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뭐라고? 네 말인 즉, 화빈이 내 저주인형을 만들었다는 것이냐?"
숙빈의 독기 서린 공격이 통했는지···,
화빈이 머뭇거리는 사이 또 다시 끼어든 중전.
'아~~~! 중전마마.'
가만히 두면 숙빈과 화빈이 알아서 진실을 드러내는 순간인데···,
결정적인 순간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는 중전이었다.
화빈은 중전을 쳐다보며 안타까워하는 숙빈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화빈 저년이 저주인형을 만드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근래 들어 마마님의 건강이 부쩍 쇠약해진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당장 화빈의 처소에 감찰상궁을 보내서 수색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숙빈은 목에 핏대를 올리며 단호하게 요청하는 숙빈.
'아차차! 화선은 지금 기절해 있는데? 어쩌지? 다시 화선에게 들어가야 하나?‘
숙빈에게 들어가 있는 천수무녀는 급하게 승부수를 던지느라 화선의 상태를 잊고 그냥 질러버렸다.
이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중전이 곧바로 감찰상궁을 부르면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숙빈! 잘 들어라.]
천수무녀는 재빨리 혼갈이에서 빠져나와 혼걸이 상태로 바꿨다.
어지러운 듯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는 숙빈.
[화빈은 너의 구린 치부를 알고 있다. 추악한 거래 말이다. 까발려지기 싫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장 화빈을 찍소리 못하게 밟아라. 아예 중전을 해치려는 미친 무당으로 몰아가든지.]
천수무녀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숙빈에게 강력한 경고를 남기고 재빨리 화선에게 혼갈이 했다.
"거기 감찰상궁 있느냐! 당장 화빈의 처소를 수색해라."
"예!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천수무녀의 신속한 혼갈이 후, 다시 정신을 차린 화선.
중전의 지시에 곧바로 대답은 했지만 잽싸게 나가지 않고 꼼지락거리면서 화빈의 반응을 기다렸다.
"자, 잠깐!“
다급하게 감찰상궁을 불러세우는 화빈.
'그렇지! 네 년이 나를 불러 세울 수밖에 없지.'
화선은 밖으로 나가는 시늉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예? 저보고 하는 말씀입니까?"
화빈이 기어이 폭탄을 터트릴 것 같은 느낌을 확신한 화선.
그녀의 입고리가 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화빈의 눈은 화선이 아니라 술이 덜 깬듯한 숙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숙빈? 이제 정신 좀 차려보지."
"······어?"
천수무녀가 빠져나가고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숙빈.
은근히 앙칼진 화빈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듯했다.
"숙빈! 네 오라비가 찾는 그 귀신이 여기에 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봐라."
?!······, 이럴 수가!
화선은 전혀 예상치 못한 화빈의 대응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숙빈의 오라비? 귀신?'
화빈이 내뱉은 말을 떠올리며 다급하게 추리하는 화선.
금세 최대관, 봉만을 떠올렸다.
최봉만이 숙빈최씨의 오라비라는 것을 이제야 파악한 것이다.
'뭐야? 그럼 화빈이 내 정체를 다 알고 있다는 건가? 언제부터?‘
감찰상궁 화선이 밖에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화빈의 시선은 중전을 떠나 화선을 향하고 있었다.
"감찰상궁은 내 처소에 갈 필요 없습니다. 인형은 저주인형이 아니라 심심풀이 삼아 손바느질로 만든 솜인형입니다."
"그걸 누가 믿겠느냐?"
중전은 그새를 못 참고 다시 끼어들었다.
아직도 정신이 몽롱한 숙빈은 눈만 껌뻑거리며 중전과 화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믿고 안 믿고는 마마님의 마음입니다. 후궁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제가 만든 솜인형을 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누가 저주인형을 남에게 선물한답니까?"
더는 캐물을 수 없게 된 중전.
화빈을 밀어붙이기 위해 후궁들에게 일일이 물어보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화빈을 따르는 후궁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솜인형을 선물로 받았다고 할 것이 자명한 상황.
'뭐였지? 아까 누가 내게 추악한 거래를 어쩌고저쩌고했는데···,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제야 천수무녀의 경고를 기억해 낸 숙빈.
누가 말한 건지 알아내기 위해 눈알을 굴려보지만 알아 낼 방법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끼어드는 중전.
천수무녀가 혼갈이하고 지나간 숙빈최씨.
천수무녀를 눈치챈 듯한 화빈진씨.
천수무녀가 다시 혼갈이 한 화선.
이들 넷의 신경전과 눈치싸움은 시간이 갈수록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답답한 이는 오도 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감찰상궁 화선이었다.
그때.
"귀신이라니? 네가 뭘 안다고 헛소리냐. 여기 이 자리에 천수무녀가 있다는 거냐?"
오라비까지 들먹거리며 불리한 상황을 빠져나가려는 화빈의 속셈이라고 판단한 숙빈.
그녀는 기고만장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천수무녀? 그게 누구냐?"
중전이 또 끼어들어 물었다.
상황은 화빈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선은 그냥 지켜 볼 수 밖에 없는 상황.
저주인형을 솜인형으로 치부해 버리고 천수무녀까지 들먹거리는 상황에서 선뜻 끼어들 수 없었다.
중전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주절대는 화빈과 숙빈.
이 둘을 앞에 두고 실패 직전의 작전을 되살리는 방법은 한가지뿐 이었다.
그건 바로,
중전을 혼갈이 하는 것!
화선은 중전이 자신에게 또 다른 지시를 하기 전에 중전과 눈을 맞추고 주저없이 혼갈이를 마쳤다.
갑작스럽게 천수무녀가 화빈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태연한 척 대응한 숙빈.
하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모두 읽힐 정도로 어설펐다.
오라비에게 천수무녀에 대한 이야기 들은지라 잔뜩 겁 먹을 수 밖에.
숙빈을 제외한 다른 후궁들은 이해하지 못할 상황을 이미 포기한 듯 슬슬 눈치만 보며 속닥거렸다.
"다들 조용히 하거라."
갑자기 바뀐 중전의 목소리에 다들 입을 다물고 한곳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어? 목소리가 좀 이상한가?'
갑자기 자신에게 몰린 시선에 살짝 불안해진 천수무녀.
"이제부터 내가 묻기 전에는 입을 열지 마라. 따르지 않는다면 응당한 처분을 내리겠다."
달라진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과하게 지르고 본다.
갑자기 돌변한 중전의 태도에 다들 바짝 긴장했지만 화빈과 숙빈은 여전히 시건방진 얼굴로 중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둘 다 선뜻 입을 열지는 못했다.
여태껏 중전이 칼을 휘두르지 않았을 뿐 내명부 처분은 전적으로 중전의 권한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들이다.
"화빈은 네가 말한 숙빈의 추악한 거래에 대해 상세히 말해 보아라."
"예? 추악한 거래라뇨?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눈을 부라리는 중전을 앞에 두고도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화빈.
"기억이 안 나면 기억나게 해주랴?. 어사대부가 오면 도움이 되겠냐?"
"아! 그거 별거 아닙니다. 추악이라는 말이 거슬릴 수도 있겠습니다. 숙빈이 폭주하길래 흥분해서 나온 말일 뿐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숙빈이 후궁들에게 값비싼 장신구를 뿌린 것이 다른 목적이 있지 않을까 해서 나온 말입니다."
화빈은 잠깐 사이에 잔머리를 얼마나 돌렸는지 마치 중전의 물음을 미리 대비한 것처럼 술술 대답했다.
"그게 추악한 거래라는 것이냐?"
"표현이 어울리지 않았다면 저의 부족함을 탓해 주십시오."
화빈의 여우 같은 태세 전환에 중전, 아니 천수무녀는 할 말이 없었다.
"수빈! 네가 말한 저주인형. 그것 때문에 내가 쇠약해졌다고 했는데 근거가 있느냐?"
"예? 제가 언제 그런 말을?"
아차차~!
천수무녀는 또 실수하고 말았다.
혼이 기절한 상태였던 숙빈이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계속해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화빈의 따가운 시선을 눈치챈 천수무녀.
일부러 화빈의 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갑작스러운 중전의 눈맞춤에 당황한 화빈은 고개를 돌렸다.
잔뜩 힘이 들어간 눈을 풀고 다시 숙빈을 쳐다보는 중전.
"네가 이제 발뺌을 하는구나. 그럼 너는 화빈이 말하는 추악한 거래에 대해 할 말이 없느냐?"
"아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위압적인 태도로 돌변한 중전의 질문에도 숙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딱 잡아떼고 있었다.
화빈이 추악한 거래라고 지칭한 것은 다름 아닌 후궁과 고위 관료, 혹은 그 자제들을 밤마다 엮어주는 것을 말한다.
극비에 이루어지는 만남이지만 화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숙빈은 그 대가로 후궁들에게 매우 귀한 장신구를 건네고 있었다.
천수무녀는 추악한 거래를 대충은 넘겨짚어서 확신하고 있었지만 화빈의 입을 통해 후궁과 상궁들에게 알리는 것은 실패했다.
저주인형 또한 엉뚱하게도 솜인형이 되어버리는 해프닝으로 끝나버렸다.
중전까지 혼갈이 했지만 득보다 실이 훨씬 많은 작전이었다.
화빈과 숙빈의 견제는 더욱 심해질 것이고 더군다나 화빈이 천수무녀를 언급했다는 것은 심각한 타격이었다.
그나마 한가지 얻은 수확은, 숙빈최씨가 전직 최대관, 봉만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간에 봉만이 어떻게 궁 안 구석구석 손길을 뻗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숙빈도 연못 사건에 일조한 공범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에 빠져든 천수무녀.
'기다려라. 이제부터는 감찰상궁 화선의 전성시대가 벌어질 것이다.'
***
그날 저녁 중전의 처소.
"죄송합니다. 제가 더 치밀하게 준비를 해야 했는데 너무 경솔했습니다."
"아니다. 그 정도면 그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
만족인지 포기인지 모를 애매한 중전의 대답.
화선이 다른 방도를 제안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건 그렇고 화빈의 저주인형이 정말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냐?"
중전은 후궁에 대한 견제보다는 자신의 몸이 날로 쇠약해지고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저주인형이 확실합니다. 화빈의 처소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인에게 확인한 것입니다. 다만, 너무나 많은 저주인형이 진열되어 있어서 마마님의 저주인형이 어떤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화빈이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알았다. 수고했다."
"마마님이 원하시면 화빈의 처소에 있는 저주인형을 모조리 태워버리겠습니다. 아마도 숙빈의 소행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대신에······."
"예?"
머뭇거리는 중전의 눈빛에 섬뜩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말이다. 화빈을 제거할 방법이 있느냐? 말만 하면 팔다리도 자를 수 있다고 했으니 목을 자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냐?"
"예? 죽이라는 말씀입니까?"
화선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꾹 참으며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되물었다.
"그래. 내 그년을 폐위하고 싶지만, 전하의 신망이 두터워서 쉽게 처분하지는 못하고 있다. 숙빈도 마찬가지지만 그 년은 다루기 쉬워서 괜찮다."
"아~! 예. 그런데 궁에서 목을 치면 큰 소란이 벌어질 텐데요."
"생각보다 단순하구나. 당연히 궁 밖으로 유인해서 우연한 사고로 위장해야지 않겠냐."
그간에 중전이 머릿속으로 다양한 상상을 한 티가 드러났다.
중전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무속신앙에 심취한 화빈이 무슨 수작을 벌였는지 모르겠지만 왕은 이틀이 멀다고 화빈의 처소에 들러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숙빈의 처소는 매일 밤 후궁들만 복작거릴 뿐 왕의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다.
중전의 눈엣가시 같은 여자는 숙빈이 아니라 화빈이었다.
이제 중전도 본색을 드러내고 가시를 만드는 년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전은 뭘 믿고 당황스러운 일을 지시하는 거지?
화선은 아무래도 중전이 자신에 대해 뭔가를 눈치챈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제 후궁을 불러 놓은 자리에서 마마님이 마지막 즈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모른다."
"예? 기억나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냐. 네가 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느냐."
"!?"
순간 뒤통수를 크게 한대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은 화선.
"네가 화빈이 말한 천수무녀가 아니더냐."
또다시 중전의 눈빛에 섬뜩한 기운이 스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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