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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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베
작품등록일 :
2024.05.0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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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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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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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 1993 (3)

DUMMY

“자~! 이제 내 능력을 보여 줬으니 결정하겠냐? 거래 말이다.”


“혼이 왔다 갔다 하는 건 믿겠는데 그걸로 뭘 할 수 있어요? 의대가 뭔지도 모르면서.”

“······.”


설하 말이 맞다.

400년 동안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


설하가 말하는 의대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낯설고, 심지어 지금 간호사에게 혼갈이 하고 나서 처음 들여 마신 공기조차도 기억 속의 그것과 달랐다.


혹시 지금은 혼갈이가 대수롭지 않은 세상인가?

지난 세월 동안 또 다른 천수무녀가 무수하게 재림해서 설하가 이렇게 놀라지 않는 건가?


‘기껏 풀려나서 나왔는데 막막하네. 그냥 남은 37년은 조용히 보내야 하는 건가?’

간호사는 옷장에 붙은 작은 거울을 쳐다보았다.


‘오~! 아름답구나. 그동안 수 많은 여인들을 혼갈이 했지만 절대 빠지지 않는 얼굴이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외모에 감탄하는 간호사.

결국, 외모지상주의자 천수무녀의 본성이 소환되었다.

간호사는 거울에 바짝 다가가서 얼굴을 자세히 살피더니 한동안 흡족한 미소을 지었다.


“저기! 대답 안 하고 뭐 하는 거예요?”

실실 웃고 있는 간호사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짜증을 내는 소희.


“네가 결단을 미루는 사이에 난 결단을 내렸다.”

“뭘요?”

여전히 거울만 쳐다보는 간호사의 뒤통수에 대고 따져 묻는 설하.


“이 아낙네에게 혼갈이 하기로 했다.”

“아낙···네?”

“그래. 이 아낙네가 너무 맘에 든다.“


“아낙네가 아니라 간호사예요. 400년 전이라면 의녀랑 비슷한 직업이겠네요”

설하는 자신도 모르게 400년을 넘어왔다는 천수무녀를 믿고 있었다.


“의녀라고? 오호! 딱 좋네. 예전에 의녀에게 몇 번 혼갈이 한 적이 있었지.]

“아~! 그러세요. 그럼 잘해보세요.”

천수무녀가 괜히 떠보는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설하.


“그래. 너도 이젠 맘 다잡고 열심히 살아라.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


“푸하하!”

간호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수무녀의 말투에 설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저기요. 밖에 나가서 지금처럼 말하면 바로 들켜요. 죄 없는 간호사만 오해받습니다.”

“그렇게 이상하냐?”


“당연하죠. 내가 어지간하면······.”

말을 맺지 못하고 간호사를 멀뚱히 쳐다보는 설하.

천수무녀는 그런 설하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지간하면, 뭐?”


설하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요. 일단 속는 셈 치고 거래할게요. 어차피 퇴원하면 다시 죽을 거라서.”


“오호! 현명한 판단이다. 후회 없을 것이다.”

“단, 의대에 합격 못하면 그땐 내 주변에서 사라지는 겁니다.”


그렇게 설하와 천수무녀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400년 세월을 극복하기 위해 혼걸이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혼걸이를 오래 유지하면 행동이나 생각에 혼선이 생기는 부작용이 있어서 가급적이면 천수무녀는 끼어들지 않기로.


설하가 내민 조건은,

당연히 의대 입학이!


엄마의 집요한 욕심을 꺾지 못할 바엔 보란 듯이 그 빌어먹을 의대에 합격하는 것이 통쾌할 것 같았다.

입학한다고 해도 자신의 능력과 무관하지만.


천수무녀의 조건은?

없었다.

원하는 의대에 합격하고 삶을 포기할 생각이 사라진다면 본인도 사라지겠다고.


동강에 빠져서 봉인된 400년 동안 무수한 생각을 했다.

당연히 가장 많이 떠오른 사람은 월선과 화선.

절대로 잊지 못할 두 사람에 대한 자책감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400년이 거의 채워질 무렵,

3번째 봉인이 풀린다면 남은 37년 동안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구해서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기로 다짐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설하였다.




***


한 달 뒤.

설하의 집.


“뭐라고요?”

[내가 네 엄마를 혼갈이 하는 게 더 간단하다고.]


“그럼 혼갈이 하는 동안만 유효한 거잖아요.”

설하는 천수무녀의 뜬금없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렇지. 대신 내가 쭈욱 10년 정도 혼갈이 해서 살면 그 땐 포기하겠지.]

“싫어요.”

이번엔 천수무녀가 놀랐다.

설하의 망설임 없는 단호한 대답을 듣고.


[뭐야? 네 엄마 혼이 10년간 기절하는 것이 싫은 거냐?]

“······.”

[오호. 요것 봐라. 너도 의대에 욕심이 있었구만.]

설하는 대답 없이 풀이 죽은 표정으로 TV만 보고 있었다.


[어? 그냥 한번 말해 본거야. 그런 표정하면 좀 거시기 하잖아.]

괜히 가해자가 된 것 같아서 찝찝한 천수무녀.


“상관없어요. 엄마가 10년간 기절하거나 내가 죽으면 되니까.”

“······.”

“내 팔자에 무슨 의대는······.”

“아, 알았다. 내 말은 취소다.”

결국 나름 신박한 제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오늘이 바로 그 날.

천수무녀가 설하를 혼갈이 하기로 한 날.


한 달 동안 오로지 설화와 함께 TV를 보면서 세상 물정을 거의 파악했다.

신기한 상자로 배우는 이 세계의 지랄 같은 문화들.

너무 생소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

그 와중에 사극은 왜 재밌는데?


비록 444년간 봉인되었지만 500년 넘게 속세에서 눈치 백단으로 살아온 짬밥 덕분에 이 세계의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파악하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았다는······.


낭만도 멋도 없는 각박한 세상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설하의 짜증 나는 속성 교육도 꾹 참고 받아들였다.


[준비됐지?]

“잠깐만요. 이번 달 20일이 무슨 날인지 알죠?”

[그래. 알고 있어. 걱정 말고 푹 자라. 20일이면 충분해.]


“400년을 훌쩍 넘어와서 무슨 수로 수능을 본다는 건지······.”

[11월에 또 있다면서. 2차 시험.]

“헐. 애초에 2차 시험을 노렸네.”


그렇게 걱정 가득한 설하의 혼은 기절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시 깨워주기로 약속을 받고.




***


1994년 9월 24일.

1차 수능시험 점수 발표일.


“의대 갈려면 몇 점이 나와야 하냐?”

“의대?”

“그건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친구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 같이 설하를 에워쌌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또라이 같은 행동으로 예측 불허의 상황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제일 낮은 의대라도 150점은 넘을 껄.”

“흠···.”

“우와~! 150점 넘은 거야?”

설하가 이미 의대에 합격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주는 친구들.

진정한 친구들이었다.


그 순간,

설하의 성적표를 들여다본 친구가 한 소리 했다.

“어이. 천설아씨! 정신 차리세요.”


그렇다.

천수무녀가 혼갈이하고 나서 설하의 성적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젠 의대가 아니라 대학을 가기도 힘들어졌다.


‘이거 큰일이네. 큰소리는 쳐놨는데 이렇게 어려운 건 줄 몰랐네. 감독관이 답안지라도 들고 있으면 살짝 보고 올텐데······. 방법이 없을까?’


이제 2차 수능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150점을 넘길 만한 사람을 혼갈이 해도 설하의 대리시험을 치르는 건 불가능.


“우리 반 1등 영순이가 같은 고사실에 배정받으면 딱 좋으련만. 후다닥 몇 번만 혼갈이 하면 150점은 쉽게 넘을 텐데.”

영순이를 혼갈이 하는 상상을 해보지만 결국 한숨만 길게 내쉬었다.


“앗! 그래. 바로 그거다.”


반짝이는 아이디어 떠오른 듯 응큼한 미소를 짓는 설하.




***


다음 날.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는 중학교 동창들의 연락처를 긴급하게 수배하는 설하.

무조건 한 학교에, 한 명 이상 연락해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하루에 한 명씩 심층 미팅.

빵집에서, 분식집에서, 롯데리아에서···.

뻣뻣하게 구는 친구는 피자헛까지 모시고 갔다.


설하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각 학교에서 상위권, 그러니까 150점은 훌쩍 넘길만한 학생들의 이름과 얼굴, 기왕이면 사진을 달라는 것.


의아한 눈빛으로 야려 보는 동창들은 다 한 명도 없었다.

설하가 의대 때문에 두 번씩이나 거시기 했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


그렇게 열흘 만에 같은 고사실에 배정될 가능성이 있는 94학번 예비 의대생 99명을 확보했다.


“이제부턴 이름과 외모 특징만 매치해서 외우면 끝. 좀 많긴 하지만 이게 가장 확실하지.”


연습장에 빼곡하게 적은 혼갈이 후보들을 외우기 위해 설하는 잠도 줄여가며 몰입했다.


방과 후엔 자율학습 따위는 집어치우고,

각 학원과 독서실을 돌면서 얼굴을 확인하는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달쯤 지나자 설하의 머릿속엔 모든 우등생의 이름과 얼굴이 선명하게 박혔다.


“설마 이 중에서 한 명도 안 들어오겠어? 큭!큭! 이제 다 끝났어.”

신이 난 설하.

춤까지 추며 자축했다.

400년 전 그때 금월이가 추전 그 춤을···.



***


11월 16일.

94학년도 2차 수능시험 일.


고사실에 제일 먼저 입실한 설하는 자리에 앉아서 교실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고사실 책상은 총 36개.

설하를 제외하면 이제 입실하는 35명 중에 딱 한 명만 같은 고사실로 들어오면 된다.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입실하는 학생들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는 설하.


입실 마감 10분 전.

한 자리만 빼고 설하를 포함, 35명이 입실을 마쳤다.


“엥? 이게 뭐야? 낯익은 얼굴이 한 명도 없잖아.”


이런 우라질.

다급해진 설하는 고사실 앞으로 나가서 학생들의 수험표를 한 명씩 훔쳐보았다.

그냥 쓰윽 지나가는 척하면서.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동명이인도 없었다.

그러나 아직 좌절하긴 이르다.

고사실엔 아직 한 자리가 남았다.

바로 옆자리 학생이 아직 오지 않았다.


설하는 쫄리는 심정으로 시계와 고사실 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제 입실 마감 5분 전.

입술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4분 전.

3분 전.

30초 전.

3초 전.

딩동 댕동~~


곧이어 감독관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모든 것이 끝났다.

좌절하는 심정으로 책상에 엎드려 버린 설하.


“거기. 엎드린 학생. 일어나세요.”


감독관의 지적을 받은 설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서 옆자리를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헉! 뭐야?’


설하는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

‘언제 들어 온거야. 분명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없었는데?’


옆자리 학생의 얼굴을 곁눈질로 쳐다보는 설하.

급하게 들어와서 아직 정신이 없나?

수험표를 책상에 내놓지 않았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일화여고 나일순.’


이 동네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은 모를 수 없는 유아독종 나일순이었다.

이름있는 학원강사들도 혀를 내두른다는 독종 일순.


설하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이게 웬 떡이냐 싶은 마음.

설하가 외웠던 리스트의 첫 번째 혼갈이 후보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흐흐흐. 이제 끝났어. 일순이라면 서울대 의대? 아니지, 전국 수석 할지도···.’


목표 달성을 확신하는 설레는 마음이 설하의 얼굴에 적나라하게 나타났다.


“크흐흐.”

자신도 모르게 괴기한 웃음소리를 흘려버린 설하.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거기! 아까 엎드렸던 학생. 이상한 소리 내지 마세요.”

감독관과 눈이 마주친 설하는 고개 숙이고 조용히 찌그러졌다.


‘근데 좀 이상하네. 쟤는 왜 수험표를 내놓지 않는 거지?’


수험표나 펜을 준비하지 않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일순.

설하는 괜히 걱정되었다.

저러다가 감독관의 주목을 받게 되면 혼갈이도 조심스러워지고, 바로 옆에 있는 설하도 눈에 띄게 된다.


‘지금 살짝 혼걸이를 해서 테스트 해 볼까? 멘탈이 장난이 아니라던데 혹시 혼갈이 저항이 있을려나?’


“아까 이상한 소리 낸 학생! 옆에 쳐다보지 마세요.”

이런! 잘못하면 설하가 찍히겠다.


‘어쩔 수 없다. 연습 없이 바로 실전이다.’



9시 정각.


1교시 언어영역 문제지가 뒤로 넘겨지고 있었다.


세 번이나 감독관에게 지적당한 설하는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옆을 쳐다보았다.


툭!

설하와 일순의 책상에 앞에서 전달된 시험지가 올려졌다.


설하는 한 부만 빼고 뒤로 넘기면서 사팔눈으로 일순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일순은 시험지를 쳐다보기만 할 뿐 뒤로 넘기지 않았다.

뒷자리에 있는 학생이 자연스럽게 일순의 책상까지 손을 뻗더니 시험지를 가져갔다.


‘뭐, 뭐야? 쟤 왜 저래?’

몹시 당황한 설하.

감독관의 주의를 잊은 채 일순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순간!

설하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일순.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설하를 쳐다보며 으스스한 미소를 지었다.


‘어? 넌? 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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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소희 1994 (15) 24.09.14 19 0 13쪽
55 소희 1994 (14) 24.07.19 20 0 12쪽
54 소희 1994 (13) 24.07.18 17 0 13쪽
53 소희 1994 (12) 24.07.17 20 0 12쪽
52 소희 1994 (11) 24.07.09 22 0 12쪽
51 소희 1994 (10) 24.07.08 24 0 12쪽
50 소희 1994 (9) 24.07.07 34 0 13쪽
49 소희 1994 (8) 24.07.02 25 0 13쪽
48 소희 1994 (7) 24.07.01 26 0 12쪽
47 소희 1994 (6) 24.06.30 29 0 13쪽
46 소희 1994 (5) 24.06.30 26 0 12쪽
45 소희 1994 (4) 24.06.29 28 0 13쪽
44 소희 1994 (3) 24.06.28 28 0 13쪽
43 소희 1994 (2) 24.06.26 38 0 12쪽
42 소희 1994 (1) 24.06.25 32 0 12쪽
41 설하 1993 (9) 24.06.24 30 0 12쪽
40 설하 1993 (8) 24.06.21 34 1 13쪽
39 설하 1993 (7) 24.06.20 32 1 12쪽
38 설하 1993 (6) 24.06.19 32 1 12쪽
37 설하 1993 (5) 24.06.18 33 1 12쪽
36 설하 1993 (4) 24.06.17 35 1 13쪽
» 설하 1993 (3) 24.06.16 43 1 13쪽
34 설하 1993 (2) 24.06.13 37 1 13쪽
33 설하 1993 (1) 24.06.12 35 1 13쪽
32 격가 1075 (3) 24.06.11 39 1 13쪽
31 격가 1075 (2) 24.06.10 39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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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화선 1035 (6) 24.06.07 42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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