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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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베
작품등록일 :
2024.05.08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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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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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 1993 (4)

DUMMY

‘어? 넌···? 혼이구나!’


무성의하게 고개만 끄덕거리는 일순.

그런 일순의 정체를 확신한 설하의 안색은 창백해 졌다.


‘망했다.’


설하의 몸부림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머리를 쥐어 잡고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감독관과 눈이 마주쳤다.


“거기! 아까 괴기하게 웃었던 학생. 시험 시작됐어요. 계속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하면 퇴실 조치합니다.”

감독관의 반복되는 지적에 학생들이 모두 설하를 째려봤다.


[뭐가 망해?]

으스스한 표정과 다르게 너무나 다정한 일순의 말투.


[···, 역시 혼이 맞네.]

[그래 맞아. 저승길 대기 중이야. 근데 뭐가 망한 거야?]

[의대 가는 계획이 말짱 꽝 됐다고.]

[네가 의대 가는 거랑 내가 죽은 거랑 무슨 상관이···?]

[······.]

일순은 뭔가 알 듯 말 듯, 머리를 갸우뚱 거렸다.


[헐~! 컨닝 하려고? 내가 옆자리인건 어떻게 알았대?]

얼탱이 없다는 듯이 설하를 쳐다보는 일순.


[아니. 그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옆자리가 된 거야.]

[뭔 개소리야! 내가 저기 맨 앞자리면 어떡할 건데?]

세상에나.

일순은 화내는 목소리도 너무 다정했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다 파토 났는데.]

계속되는 일순의 질문이 귀찮아진 설하.


[근데, 날보고 놀라지 않네. 많이 수상해.]

[신경 꺼라. 심란하다.]


[도와줄까? 서울대 의대? 그거면 되냐?]

일순은 범상치 않은 설하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고맙지만 넌 혼이라서 안 돼.]

[뭔 소리야?]


[···, 궁금하다니까 얘기 해 줄께.]

설하는 시험은 포기하고 일순이랑 시간이나 때우기로 작정했다.


잠시 후.


천수무녀의 혼갈이 능력을 들은 일순은 시험장이 떠나가라고 웃었다.

물론 설하를 제외한 아무도 웃음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큭큭큭. 난 믿는다. 이거 재밌겠네.]

[재밌으면 뭐하냐? 이제 말짱 꽝인데.]


[왜 꽝이야?]

일순은 아쉬우면서도 의아했다.


[혼에게는 혼갈이가 안돼. 바로 옆이라서 훔쳐본다고 해도 넌 시험지를 넘길 수 없고.]


[어이가 없네.]

일순은 설하의 말이 얼탱이가 없었다.


[너 정말 심각하구나. 왜 혼갈이가 필요해?]

[무슨?]

[내가 옆에 서서 답을 불러주면 되잖아. 넌 시험지만 넘기면서 마킹만 해.]

[헉! 어떻게 그런 신박한 생각을? 역시 유아독종.]

[······?]


“학생. 정말 퇴실하고 싶어요?”

설하 옆을 스윽 지나가던 감독관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시험지는 보지 않고 한참동안 사팔눈을 하고 있는 여학생이 정상으로 보일리가 없었다.


천수무녀에 대한 썰을 풀고 일순과 노닥거리는 동안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다.


[오케이! 일단 시작하자. 자세한 이야기는 점심때 하고.]


1교시 언어영역 시험시간은 고작 30분 남았다.

다급해진 설하는 문제지를 넘기며 일순을 보채기 시작했다.


[침착해라. 시간 충분해. 답안지 마킹은 잘하지? 자~. 1번은 3, 2번은 1, 3번도 1.]

일순은 마치 답을 외우고 있는 것처럼 술술 풀어냈다.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


[난이도가 좀 있었어. 그래도 만점일거다.]

역시나 소문대로 대단한 나일순.


[너무 잘 보면 의심 받지 않을까?]

[서울대 의대 갈려면 180점은 넘어야 돼.]

[서울대가 아니라 그냥 의대면 되는데?]

[1차 때 몇 점 나왔어?]

[75점.]

주저 없이 점수를 말하는 설하.

일순은 말문이 막혔다.


[부정행위만 걸리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괜히 미안해진 설하는 혹시나 일순이 말을 바꿀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될 거 없지. 근데 서울대는 안 되겠다.]

[왜?]

설하는 애초에 서울대 의대는 상상도 하지 않았지만 막상 일순이 포기하자고 말하자 아쉬워졌다.


[입학전형도 모르는구나. 황당한 년.]

[년···!]

[그래. 서울대는 내신과 본고사 비중이 훨씬 높아서 힘들··· 아니, 불가능해.]

[아냐. 내신은 꽤 좋아. 내가 혼갈이 한 후로 꽝이라서 그런 거지, 설하는 공부 좀 하는 애야. ]


맞다.

설하의 내신은 무려 3등급.

물론 일순에 비하면 우습지만.


[다행이네. 그럼 본고사도 따라가야 하는 건가?]

[아냐. 그냥 수능으로 아무데나 의대에 합격만 하면 돼. 그럼 약속은 지키는 거니까.]

[근데 입학하고도 걱정이다.]

[뭐가?]

[입학하면 그 담에는 어떻게 할 건데? 제대로 따라 갈 수 있을까?]

[그러긴 한데, 그건 설하가 알아서 하겠지.]

[참 내! 내가 왜 걱정을? 수능 앞두고 죽은 허망한 팔자에···.]

[······.]


일순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창밖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런 일순의 표정을 눈치 챈 설하는 머리를 옥죄는 긴장감을 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서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미친년이 헤비메탈에 심취한 것 마냥.


“거기 학생! 자리에 앉아요. 쉬는 시간까지 왜 그러고 있는 거예요?”

일순은 75점의 충격 때문에,

설하는 충격 받은 일순이 걱정 되서 종소리를 듣지 못했다.


[일순님~?]

설하는 거북한 목소리로 애교를 듬뿍 담아 일순을 불렀다.


[걱정 마. 답 불러 줄께.]

일순은 마음이 찹찹했다.

오늘의 수능을 위해 지난 수년간 목숨 걸고 공부했는데 고작 75점짜리를 서울대 의대에 넣기 위해 혼이 되서 문제를 풀고 있다니.

그냥 관둘까 했지만 여기 시험장에 들어 온 이유를 생각했다.


‘억울해서라도 문제는 풀고 가야겠다.’

이승에 머무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기다렸던 수능을 꼭 풀어야만 한이 풀릴 것 같았다.


2교시 수리탐구1 시험이 시작되었다.

수학이다.


멍하니 암호 같은 글자와 숫자가 뛰어 다니는 시험지를 쳐다보고 있는 설하.

두 달 가까이 시간이 있었지만 혼갈이 후보들 찾아다니느라 책을 펼쳐보지도 않았다.


하긴, 책을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400년간 강 속에 있던 천수무녀가 뭔들 알까?


귀를 쫑긋 세우고 일순의 은총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

누군가 설하 곁으로 쓰윽 다가왔다.

감독관이 설하를 전담하려는 듯이 지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수험표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신경 쓰이네. 이놈이 왜 이러지?]


설하는 무려 5번이나 지적 받은 사실은 기억에서 지워버린 듯, 해맑은 표정으로 감독관을 쳐다보았다.


“왜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속삭이는 설하.

당황한 감독관은 서둘러 교탁 쪽으로 이동했다.

분명 설하를 싸이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4, 3, 2, 1]

[뭐?]

[첫 페이지 4번까지 답이다. 다음 장으로 넘겨.]

[헉! 감독관 얼굴 잠깐 쳐다보는 사이에 네 문제나 풀었어? 암산으로?]


설하는 감탄하면서 마킹을 위해 싸인펜을 집어 들었다


[잠깐, 우선 시험지에 체크만 해. 배점이 두 배라서 검산해야 돼.]

[뭔 소리?]

[시키는 대로 해.]


일순이 20번까지 초벌구이를 끝낸 시간은 불과 20분.

몇 문제는 다시 확인, 검산을 마무리 하고 나서도 무려 20분이 남았다.

일찌감치 답안지 작성을 끝낸 설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티 나지 않게 주위를 둘러봤다.


헉!

뭐야?

저것들도 전부 나처럼 혼과 같이 시험 보는 건가?

시험장에는 이미 문제를 다 풀고 자는 학생들이 5명이 넘었다.


[일순! 저, 저것들은 도대체 누가 답을 불러 준거야? 안 보이는데? 벌써 나갔나?]

[······.]

[이 나라엔 시험 고수들이 많구나.]

[헛소리 집어치워. 쟤들은 시험 포기하고 자는 것들이야.]


설하는 일순의 말을 듣고 감독관의 눈을 피해서 자고 있는 애들을 다시 살펴봤다.

쟤들은 시험을 포기 했는데 왜 시험장에 왔을까?

풀이는 포기했지만 시험은 회피하지 않는 학생들의 용기!

설하는 찐한 감동을 받았다


[그래! 포기할지언정 피하지 말자.]

[뭔 개똥같은 소리냐?]

감동 파괴자가 끼어들었다.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아까 이야기 했던 혼갈이에 대해 말해 봐. 어떻게 한다는 거냐?]

[궁금해? 궁금하면···.]

[말 안하면 3교시는 없다.]

[그러니까, 그게 말로는 설명이 힘들어. 네가 육신이 있다면 직접 느낄 수 있을 텐데.]


설하는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수학을 포기하고 퍼질러 자는 학생보다, 의대를 갈려고 혼에게 부탁하는 설하보다 제일 힘든 사람은 일순이었다.


[미안할거 없어. 어차피 다 한번은 죽는 건데 뭐.]

[······.]

[너도 천년을 산다고 하지만 이제 삼십 몇 년 남았다면서.]

[······.]


일순은 괜찮다면서 은근 슬쩍 설하의 곪은 곳을 후벼 팠다.

수능 때문에 한동안 까먹고 있었던 암울한 숫자가 다시 떠올랐다.


[근데 혼갈이가 왜 궁금한데?]

[글세 왜 궁금할까···?]


일순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설하가 말한 천수무녀와 같은 황당한 이야기를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죽어서 혼만 남은 지금, 혼갈이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조건 믿고 싶었다.


혼갈이?

스무살도 넘기지 못하고 접은 삶을 회생 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 다른 사람의 혼을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넣을 수도 있어?]

[다른 사람?]

[나!]

[너를 다른 사람에게 혼갈이 하라고?]

[의식불명인 환자들 있잖아.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들.]


일순은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망설였지만 그녀의 표정은 설하의 답변을 재촉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글쎄? 아직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러고 보니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해봤네.]


그 순간,

일순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 놈이 맞부딪치는 것 같았다.


‘어차피 깨어날 가망이 없는 사람 몸을 빌리는 건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까만 놈과

‘의식이 없다고 해도 허락 없이 육신을 탐해서는 절대 안돼.’라고 말하는 허연 놈.


악마와 천사의 속삭임이 시작되었는데 누가 악마이고 누가 천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이거 원······.


‘가족들이 생명 연장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면 혼갈이는 새 생명을 불어 넣는 거야!’

‘무슨 소리! 장기 기증하면 여러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건데? 그게 더 의미 있는 거지.’

‘본인의 육체라도 살아남는 것이 나은 거 아냐? 물론 혼은 바뀌지만.’


[뭔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냐? 네가 원한다면 점심시간에 해보자.]

[어? 어떻게? 혼수상태 환자를 알아봐야 하는데?]

[테스트만 해 보자고. 여기에도 혼수상태들 많잖아. 저기 봐봐.]


설하가 슬그머니 바라보는 혼수상태는 다름 아닌 5명의 수포자들.

60분간의 수리탐구시간을 꼼짝도 않고 자고 있는 저들이 혼수상태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딩동댕~!


2교시가 끝났다.

점심시간은 무려 50분.


설하는 수포자 5명 중 미리 찜해 놓은 학생을 쳐다보았다.


헉!

뭐, 뭐야?


창가 쪽에서 침까지 흘리며 꿀잠을 자던 튼실한 학생은 생기 넘치는 얼굴로 도시락을 펼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설하의 눈에는 분명히 최우수 등급의 혼수상태였는데.


말도 안 돼.

저렇게 돌변해도 되는 건가?

설하는 나머지 4명의 혼수상태를 찾아봤지만 두 명은 벌써 시험장을 나가버렸고 나머지 두 명도 최우수 등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들은 수능 시험장에 밥 먹으러 온 건가?


[일순! 안되겠다. 혼수상태들의 상태가 별로다.]

[헐! 네가 혼수상태 같다.]

[······?]

[기다려. 이따가 시험 다 끝나면 혼수상태와 비슷한 얘들이 쏟아 질거야. 그때 가서··· ?]

일순의 예지력은 허공에 날리는 독백에 그쳤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전투적으로 도시락을 먹는 설하.

그녀의 요란한 숟가락질 소리는 모든 학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점심시간 까지 꼭 그래야 하냐며 원망하는 표정들.

감독관이 들어 올 일도 없고 누구하나 미친년을 견제하는 돌직구를 날리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야! 적당히 좀 해. 눈에 띄면 좋을 거 없잖아.]

[왜? 내 미모가 너무 눈에 띄나?]

갑자기 눈을 희번덕거리는 설하의 돌발행동에 소름이 끼친 일순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날렸다.


[너, 정말 아무데라도 의대에 가고 싶으면 오후시험 때는 닥치고 마킹만 해라. 감독관에게 찍혀서 퇴실조치 되면 죽도 밥도 안 돼.]

[퇴실? 괜히 겁주는 게 아니고?]

[주의만 다섯 번 줬는데 이제 또 뭘 주겠냐?]


일순이 연거푸 입 닥치라고 다그치자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굳은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는 설하.


[왜? 한 소리했다고 밥까지 그만 먹을 필요는 없는데?]

[다 먹었어.]

[···? 정말 예측불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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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소희 1994 (15) 24.09.14 19 0 13쪽
55 소희 1994 (14) 24.07.19 20 0 12쪽
54 소희 1994 (13) 24.07.18 17 0 13쪽
53 소희 1994 (12) 24.07.17 20 0 12쪽
52 소희 1994 (11) 24.07.09 22 0 12쪽
51 소희 1994 (10) 24.07.08 24 0 12쪽
50 소희 1994 (9) 24.07.07 34 0 13쪽
49 소희 1994 (8) 24.07.02 25 0 13쪽
48 소희 1994 (7) 24.07.01 26 0 12쪽
47 소희 1994 (6) 24.06.30 29 0 13쪽
46 소희 1994 (5) 24.06.30 26 0 12쪽
45 소희 1994 (4) 24.06.29 27 0 13쪽
44 소희 1994 (3) 24.06.28 28 0 13쪽
43 소희 1994 (2) 24.06.26 38 0 12쪽
42 소희 1994 (1) 24.06.25 32 0 12쪽
41 설하 1993 (9) 24.06.24 30 0 12쪽
40 설하 1993 (8) 24.06.21 34 1 13쪽
39 설하 1993 (7) 24.06.20 32 1 12쪽
38 설하 1993 (6) 24.06.19 32 1 12쪽
37 설하 1993 (5) 24.06.18 33 1 12쪽
» 설하 1993 (4) 24.06.17 35 1 13쪽
35 설하 1993 (3) 24.06.16 42 1 13쪽
34 설하 1993 (2) 24.06.13 37 1 13쪽
33 설하 1993 (1) 24.06.12 35 1 13쪽
32 격가 1075 (3) 24.06.11 39 1 13쪽
31 격가 1075 (2) 24.06.10 39 1 12쪽
30 격가 1075 (1) 24.06.08 39 2 12쪽
29 화선 1035 (6) 24.06.07 42 1 12쪽
28 화선 1035 (5) 24.06.06 4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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