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거래사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주주베
작품등록일 :
2024.05.08 16:14
최근연재일 :
2024.09.14 12:49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2,310
추천수 :
70
글자수 :
316,512

작성
24.06.18 16:39
조회
34
추천
1
글자
12쪽

설하 1993 (5)

DUMMY

불과 5분 만에 도시락을 비우고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했는지 몹시 아쉬워하던 설하.

슬슬 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은 시간동안 오후 시험 준비를 강요하는 일순의 집요함을 물리치지 못하고 눈과 귀를 열고 있어야 했다.


[어떻게 내가 더 긴장해야 하냐?]

[당연하지. 문제는 네가 풀 거니까.]

[그렇지? 아니, 그런 거야?]


[대신, 혼갈이 하면 큰 보상이 될 걸?]

[···되도, 안 되도 고민일 것 같다.]

[결정은 네 몫이야. 풀이도 네 몫이고.]

[···?]

[심각하긴, 정답 불러줘서 고맙다는 말이다.]


설하의 마지막 말은 흘려들으며 남은 시험을 대비한 주의사항을 반복하는 일순.


더 이상 감독관의 지적을 받지 않을 것.

답안지에 수험번호 제대로 쓸 것.

밀려서 마킹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


일순은 이렇게 이상한 년을 만날지는 꿈에도 몰랐다.

설하가 말한 천수무녀의 혼갈이.

믿기지 많지만 믿고 싶었다.


이제, 일순에겐 그깟 의대 입학이 중요한 것 아니라 혼갈이를 통해 새로운 삶을 이어 갈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설하는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얌전하게 남은 시험을 무사히 마무리 했다.

수험번호를 두 번 세 번 확인했고, 일순이 또박또박 불러주는 답은 밀려 쓸 이유가 없었다.


[수고했다. 답안지 마킹하는 것도 상당한 집중이 필요한데. 잘했어.]

[맞아. 내가 수고했어. 넌 잘했고.]

[···그, 그래.]


[이제 끝! 이제 의대 합격만 남았네.]

크게 기지개를 펴고 개운한 듯 흡족하게 웃는 설하. 책상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어디가?]

[집에 가야지.]

[어~허! 이거 왜이래?]

[호호호. 장난친 거야. 역시 민감하네]

[한 번만 더 장난치면···.]

[알았어. 빨리 혼수상태 찾아봐.]


주위를 쓰윽 둘러보는 일순의 예리한 눈에 두 명의 수험생이 들어왔다.


대부분 퇴실했거나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둘은 책상에 엎드린 채 나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둘 다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너도 무녀 출신이냐?]

설하는 일순의 눈매가 범상치 않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헛소리 말고 잘 봐! 둘 다 비슷한 자세로 엎드려서 있지만 다른 소리를 내고 있잖아.]

허-억!

그러고 보니 진짜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


[코를 고는 애는 아까 매 교시마다 퍼질러 자던 애고, 그 옆에 애는 자세히 보면 울고 있는 거야.]

일순의 말대로 가느다랗게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자~! 둘 중에 나를 집어넣기 편한 사람이 누구야? 네가 정해.]


시험도 끝났고, 아무런 고민 없이 일순의 눈썰미에 감탄하고 있던 설하에게 공이 넘겨졌다.


[음, 약속은 했으니까 어떻게든 테스트는 해보겠지만 아무것도 장담 할 수 없어.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날 미워하지는 말아라.]

[알았으니까 골라봐.]


설하, 아니 천수무녀는 고민스러웠다.

천수무녀 혼자 들어가는 단독 혼갈이는 상대의 저항력만 강하지 않으면 혼의 상태와 상관없지만, 일순의 혼을 자신에게 태워서 함께 들어가는 혼갈이를 하려면 상대의 혼이 완전하게 기절한 상태가 제일 좋다.


세상모르게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혼과 시험을 망치고 좌절한 혼 중에서 어떤 것이 수월한지는 천수무녀도 모른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


[둘 다 해보면 되겠네. 금방 끝나니까.]

[오! 정답이네.]

설하의 계획이 맘에 들었는지 간만에 일순이 웃었다.


[넌 아무생각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내가 태워서 같이 이동할 테니까.]

[오케이! 준비됐다.]


눈을 감고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일순을 확인한 천수무녀.

곧바로 설하의 몸에서 빠져나와 순식간에 한 명씩 혼갈이를 끝냈다.


‘단독 혼갈이는 예상대로 너무 쉽네. 이제 일순을 태워서 같이 들어가면 되겠네. 일단, 여학생부터 시작하는 게 낫겠지?’


천수무녀는 꼼짝 않고 서 있는 일순과 혼을 합치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일순의 혼은 무색의 천수무녀와 겹치면서 색이 사라졌다.


곧이어···,

합쳐진 두 혼이 여학생에게 혼갈이를 시도했지만 혼의 자리에 안착하지 못하고 계속 튕겨나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천수무녀가 안착을 위해

혼갈이를 반복할수록 여학생의 혼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여학생의 혼은 금방 온전한 상태로 회복 될 것이다.


‘이게 원래 안 되는 건가? 일순에게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 내가 판단해야 되는데 도무지 자신이 없네.’


천수무녀는 여학생의 흐느낌이 멈춘 것을 알아채고 일순과 함께 급하게 빠져나왔다.

이제 남은 기회는 반대편에서 아직도 자고 있는 남학생.


좌절하는 혼과 편안하게 쉬는 혼.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좌절하는 혼은 실패했다.


천수무녀는 일순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보여 줄 마음으로 한 번 더 시도해보기로 작정했다.


여전히 겹쳐진 상태의 혼을 이끌고 건너편의 남학생에게 혼갈이를 시도했다.

좀 전에 튕겨 나갔던 여운이 남아있기 때문에 아주 서서히, 가랑비에 옷 젖듯이 들어가서 혼의 자리를 널찍하게 확보했다.


다행이 녀석의 혼은 외부에서 혼이 두 개나 끼어들어 온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뭔가에 마취된 것처럼.


[성공인가?]


별다른 이상 없이 안착한 천수무녀는 재빨리 녀석의 혼을 차단하는 벽을 세웠다.

이제는 혼갈이 세팅이 거의 끝난 지점이었다.


남은 것은 육신과 연결하는 것.

천수무녀 대신에 일순의 혼과 이 녀석의 육신을 연결하면 난생 처음 해보는 제3자 혼갈이를 성공하는 것이다.


남학생의 육신에 여학생의 혼을 연결하는 것이 살짝 우려 되었지만, 현재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육신과 연결하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혼은 하나만 남아있어야 한다.

혼이 육신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깨어있는 혼과 자동으로 연결되는 것이라서 연결이 활성화되기 전에 천수무녀는 신속하게 빠져나왔다.


빠져 나온 천수무녀는 곧바로 설하에게 다시 혼갈이 했다.


계속해서 자고 있는 남학생.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남학생의 어깨를 살짝 건드려보는 설하.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런! 실패한 건가?

일순을 데리고 나와야 하나?

일순이 엄청 실망할 거 같은데···.


낙심한 설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번 더 남학생을 조심스럽게 깨웠다.

어떻게?

가지고 있던 필통으로 대가리를 후려쳐서.


아-야!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남학생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성공인가?’


“누, 누구세요?”

‘실패인가?’


눈을 껌뻑거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남학생의 표정.


실패가 확실했다.

차단벽이 깨진 건가?

남자에게도 많이 성공했었는데?

일순의 혼이 불량한 거 아냐?


실패라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서둘러서 일순의 혼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학교 동창인줄 알고···, 제가 큰 실수를 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끝입니까? 사람 때려놓고.”

“···, 그럼 어떻게 사죄하면 될까요?”

“흠···, 그냥 의대에 합격하세요!”

“!?”


당황한 설하는 남학생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냐?”

“어? 성공한 거야?”

“우와~! 설마 했는데, 정말 신기하네."

남학생은 소심하게 환호성을 질렀다.


“덕분에 나도 모르는 능력을 알았다."

“이제 혼수상태 환자만 찾아보면 되겠네.”

“결심한 거야? 고민이 많아 보이더니.”

일순은 천수무녀를 만난 것 자체가 우연이 아닌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혼수상태 환자를 떠올린 것도 운명이 만들어 낸 것이므로 그냥 따르기로 한 것이고.


“근데, 저승길 대기 중이라고 했잖아. 혼갈이 해서 숨어도 다 들키는 거 아니냐?”

“이판사판이지 뭐!. 들키면 끌려가면 그만이고.”

오~!

“맘대로 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설하와 일순은 그렇게 훗날의 혼갈이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헤어졌다.



***


설하의 집.


“시험은?”

엄마의 첫마디는 역시나 시험이었다.

혼갈이 하고 몇 번 보지도 않았다.

대화는 아예 없었고.


무표정한 저 얼굴, 감정을 드러내야 마땅한 상황에서도 쉽게 웃거나 흥분하지 않는 설하의 엄마.

흥분하고, 말다툼하고, 화해하고···,

그렇게 지냈으면 극단적인 행동은 없었을까?


“시험? 보고 왔죠. 설마 땡땡이 쳤겠어요?”

눈시울이 붉어진 설하는 괜히 쿵쾅거리며 거실로 들어섰다.


앗~!

보였다. 아~주 살짝 당황한 눈빛.

고작 이런 말 한마디에 당황하다니, 의외였다.


“어려웠어?”

방금 전 당황하던 표정을 서둘러 숨기는 엄마.

평소답지 않은 설하의 대꾸에 말려들지 않았다.


“어렵긴요. 그냥 풀 만했어요. 틀리지 않는다면 만점일거요.”

“뭐? 만점? 그게 무슨 소리야?”

“예. 찍은 문제들이 틀리지 않는다면”

“몇 문제나 찍었는데?”

엄마의 감정 저지선은 이미 무너졌다.

의외로 엄마의 반응은 너무 평범했다.

이젠 돌격 앞으로만 남았다.


‘뭐지? 엄마가 이상한 게 아니라 설하가 문제아였나? 속았나?’

기절한 설하를 깨워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직관하게 하고 싶었다.


“다 찍은거냐?”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럼?”

“의대 갈 수 있을 만큼만 찍었어요.”

“!?”

희안했다.

분명 깜짝 놀라는 것을 봤는데 엄마의 표정은 어느새 무표정, 아니 싸늘한 표정으로 변해있었다.


“지금 장난하는 거냐?”

“장난인지 아닌지 저도 모르겠어요. 다음달 20일에 성적표 나오면 알겠죠. 피곤해서 방에 가서 쉴래요.”


“엉뚱한 생각 말고 재수 할 준비나 해.”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뒤통수에 꽤 날카롭게 박혔다.


아마도 이런 말투가 설하에게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날 선 칼이 상처를 내고 그랬나 보다.

결국 만신창이 된 설하가 그렇게 된 거고.


“의대에 합격하면 그 다음은 뭘 원하세요?”

설하는 자기 방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더니 엄마보다 몇 배는 더 날선 말투로 물었다.


“어? 너 그게 무슨 말투냐?”

“왜요? 엄마의 계획을 물어본 거예요. 의대에 가는 것, 아니 가라는 것도 엄마의 계획이잖아요. 계획을 알아야 준비하죠.”

“그게 아니고, 네 말투가 왜 그러냐고.”

“말투가 왜요?”


엄마가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혼갈이 전의 설하는 무수한 마음의 상처를 꾹꾹 담아 뒀겠지만 천수무녀가 들어선 설하는 엄마라는 사람에게 위축될 이유가 없었다.


'냉소적으로 상처 주는 말이라면 당신보다 백배는 더 잘할 수 있지.'

천수무녀는 설하 엄마의 어설프게 뒤틀린 말투가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비록 최근 4백 년 동안 봉인되어 사람을 만나지 못했지만, 앞선 5백여 년간 다양한 인간군상을 시대를 초월해서 만났기 때문에 천수무녀의 돌려 까기 말투는 이미 인간계가 아니었으니.


“다 네 미래를 위한 계획이다.”

뭔가 만만치 않음을 감지한 엄마는 꼬투리 잡는 것은 포기했다.


“그렇군요. 내 미래를 위해 죽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이군요.”

“오늘 왜 이래? 나중에 의사가 되고 나면 엄마에 대한 원망은 모두 사라질 거다.”


두 번씩이나 죽고 싶을 만큼 원망이 쌓였는데 의사가 되면 그 지독한 원망이 사라진다니.

이 세계를 접한 지 고작 석 달도 되지 않았지만 천수무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다.


“대답 안 하시네요? 의대 이후의 계획.”

“···.”

“혹시 계획이 없는 건가요?”

“그건 의대에 합격하면···.”

“떨어지면요?”

“말했잖아. 재수하라고.”

“그럼 합격하면 재수 안 해도 되니까 1년간 쉬어도 되겠네요?”

“정말 합격할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래. 합격만 한다면 1년이 아니라 10년이라도 쉬어라.”


10년까지 언급할 만 했다.

올해 시험결과는 처참할 것이 뻔 하다는 생각에 이미 유명강사들이 포진한 재수학원에 은밀하게 손을 써둔 상태였다.


“분명히 말했어요. 10년을 쉬어도 된다고. 두 말하기 없어요.”

설하는 엄마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에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멍하니 천정을 쳐다보는 설하.


‘···, 94년부터 10년이면 2003년. 그럼 몇 년 남는 거지?’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혼거래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56 소희 1994 (15) 24.09.14 20 0 13쪽
55 소희 1994 (14) 24.07.19 21 0 12쪽
54 소희 1994 (13) 24.07.18 19 0 13쪽
53 소희 1994 (12) 24.07.17 21 0 12쪽
52 소희 1994 (11) 24.07.09 23 0 12쪽
51 소희 1994 (10) 24.07.08 25 0 12쪽
50 소희 1994 (9) 24.07.07 35 0 13쪽
49 소희 1994 (8) 24.07.02 27 0 13쪽
48 소희 1994 (7) 24.07.01 28 0 12쪽
47 소희 1994 (6) 24.06.30 31 0 13쪽
46 소희 1994 (5) 24.06.30 27 0 12쪽
45 소희 1994 (4) 24.06.29 29 0 13쪽
44 소희 1994 (3) 24.06.28 30 0 13쪽
43 소희 1994 (2) 24.06.26 39 0 12쪽
42 소희 1994 (1) 24.06.25 33 0 12쪽
41 설하 1993 (9) 24.06.24 31 0 12쪽
40 설하 1993 (8) 24.06.21 35 1 13쪽
39 설하 1993 (7) 24.06.20 34 1 12쪽
38 설하 1993 (6) 24.06.19 33 1 12쪽
» 설하 1993 (5) 24.06.18 35 1 12쪽
36 설하 1993 (4) 24.06.17 36 1 13쪽
35 설하 1993 (3) 24.06.16 44 1 13쪽
34 설하 1993 (2) 24.06.13 38 1 13쪽
33 설하 1993 (1) 24.06.12 36 1 13쪽
32 격가 1075 (3) 24.06.11 40 1 13쪽
31 격가 1075 (2) 24.06.10 40 1 12쪽
30 격가 1075 (1) 24.06.08 40 2 12쪽
29 화선 1035 (6) 24.06.07 43 1 12쪽
28 화선 1035 (5) 24.06.06 42 1 12쪽
27 화선 1035 (4) 24.06.05 42 0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