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하 1993 (7)

혼수상태의 중환자가 있을 만한 종합병원을 모두 둘러 본 일순.
오성병원에서 찜한 두 명 보다 끌리는 사람은 없었다.
[설하야! 아니지. 천수무녀님 이라고 불러야 하나?]
[흡-! 갑자기 왜 그래? 그냥 설하라고 불러.]
설하는 난데없는 공손모드에 당황했지만 일순의 꿍꿍이가 껄끄럽기 보다는 오히려 기대가 되었다.
[혹시, 뇌가 많이 손상 되서 뇌사파정을 받은 환자도 혼갈이 할 수 있을까?]
[뇌사?]
[그래. 뇌 기능을 상실한 환자들.]
[아마 상관없을 거야. 물론 해 봐야 알겠지만.]
설하의 저런 말투는 자신있다는 의미.
일순은 이미 천수무녀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일순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근데, 저번에 퍼질러 자던 남학생을 성공했다고 해서 네가 말한 환자들이 모두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
[왜? 다들 사망판정만 없다뿐이지 거의 죽은 몸이잖아.]
갑자기 가능성을 쫙 잡아당겨 낮춰버리는 설하의 말에 화들짝 놀란 일순이 되물었다.
[수능 만점도 별수 없네.]
[만점? 197점이라면서.]
[그, 그래. 3점 빠진 만점! 암튼 간에 잘 들어봐. 네가 말 한대로 그 환자들은 뇌를 포함한 육체가 잠들어 있는 거야. 뇌의 손상 여부는 아무런 상관없어. 혼갈이는 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혼이 이동하는 거야.]
[그럼 다 된다는 거네?]
일순이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렇지! 혼 저항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 아니면 내가 널 엮어서 같이 혼갈이 했다가 나만 나오면 되는 거야. 알겠어?]
일순은 그제야 자신이 왜 혼수상태나 뇌사상태인 환자들을 떠올렸는지 생각했다.
일상적인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을 혼갈이 하는 것보다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를 혼갈이 하는 것이 비록 본인의 동의가 없더라도 죄책감이 덜할 것 같았다.
그들의 육체를 빌려서 남은 생을 의미 있게 산다면 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지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럼, 혼수상태 환자라도 막상 혼갈이 시도했는데 안 될 수도 있겠네?]
[그렇지. 그 환자가 뇌만 기능을 못할 뿐, 특별한 혼을 가진 분이라면.]
일순은 특별한 혼, 저항력이 강한 혼을 미리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불안했다.
오성병원의 두 사람을 찜한 이유는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특별해서였다.
권력자의 외동딸과 장래가 총망한 검사.
황당하게 이번 생은 끝났지만 우연히 만난 천수무녀가 준 기회.
게다가 두 번째 생을 선택할 수도 있다.
수능 시험 도와준 거 치고는 너무 후한 보상이었다.
그런데!
특별한 사람이 특별한 혼을 가질 확률이 높을까? 특별한 혼이 다른 혼에 대한 저항력이 높을까?
머리가 좋아서인지 나일순은 생각이 많아졌다.
[야! 뭘 걱정하는 알고 있다. 걱정마라.]
[내 생각도 읽고 있는 거냐?]
[애프터서비스는 확실하게 해줄게.]
[뭔 소리? 실패하면 저승으로 확실하게 보내준다는 거냐?]
[···설마? 근데 저승이 있긴 하냐?]
역시 일순은 앞서갔다.
일순은 안 그래도 푸르딩딩한 혼인데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린 걸 보니 혼갈이가 절실해 보였다.
[그게 아니고, 될 때까지 해준다고.]
[여러 번 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냐?]
[아니지. 실패하면 대상자를 바꿔야지.]
딱 두 명만 마음에 드는데 설하의 말대로라면 두 번 실패하면 기적 같은 기회도 끝이었다.
[그러지 말고 일단 병원에 가보자. 여기서 투닥 거리고 있을 바에 직접 가서 해보면 되지. 앞장서.]
***
오성병원 707호.
성우희 입원실.
일단, 설하는 휴게실에서 세상 편한 자세로 TV를 보게 놔두고 혼갈이를 해제했다.
곧이어 707호로 들어가는 일순과 천수무녀.
병실엔 한 노인이 환자 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책은 들고만 있을 뿐 노인은 내려쓴 돋보기 너머로 환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성진택.
전 국회의장. 현 국회의원이다.
여전히 정치 뉴스에 자주 나오는 인물이었다.
올해 여름,
이혼 소송 중이던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혼수상태가 되었다.
나이 들어 얻는 귀한 딸의 날벼락 같은 사고였다.
10년 전 부인을 먼저 보내고 딸과도 인연을 끊다 시피하고 살았다.
이제 남은 것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40대 딸.
그리고 그토록 집착했던 국회의원이라는 자리.
"의원님. 상임위 회의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어. 그래.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
성의원과 보좌관이 나간 후.
[흠. 국회의원 따님을 혼갈이 하겠다는 거냐?]
[안되냐? 나보고 선택하라고 했잖아.]
[맞아. 나중에 맘에 안 들면 원상복귀도 가능해. 물론 저 여자에게 혼갈이가 된다면.]
천수무녀는 누워있는 우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40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얼굴에 누가 봐도 곱게 자란 티가 넘쳐나는 외모였다.
교통사고라더니 외상이 심하지 않은 것도 의외였다.
19살이라고 말하기에는 겉늙은 얼굴에, 누가 봐도 없어 보이는 티가 풀풀 풍기는 일순이 탐낼 만한 대상자였다. 인정!
[야! 다 보인다. 내 욕하고 있지?]
[헐! 귀신이네.]
[······.]
[일순? 우리 그냥 한방에 결정하자. 괜히 이 환자 저 환자 간보지 말고. 여기 이 여자 성공하면 다음 후보자는 포기? 어때?]
[글쎄?]
[허어~. 왜? 포기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 남아있나?]
[아니, 그게 아니고···.]
일순은 성우희에게 마음이 많이 기울었지만 바로 옆 병실의 2번 후보자, 격강우에 대한 호기심도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성우희는 그냥 대단한 부모를 둔 예비 이혼녀 일뿐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여자일 수도 있었다.
물론 외모는 보통이 아니지만.
그에 반해 격강우는 사법고시 수석합격, 연수원 수석졸업이라는 타이틀도 있지만 그보다 끌리는 점은 남자라는 것이다.
짧지만 19년은 여자로 살아봤으니 두 번째 생은 남자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누군데? 아~, 궁금해서 안 되겠다.]
천수무녀는 7층 병실을 전부 뒤져볼 것처럼 병실을 뛰쳐나가는 시늉을 했다.
[잠깐만! 딱 한 번만 더 보고 결정할게.]
[그래라. 까다로운 손님이네.]
*
708호.
격강우 입원실.
이 병실의 분위기는 무엇?
검은 정장을 입은 여섯 명의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의자가 아니라 휠체어네.
눈치를 보아하니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는 환자의 부모나 친척 같은데 서 있는 건장한 남자들은 도대체 뭐지?
[야! 여긴 조폭 두목? 너 이런 취향이냐?]
[헛소리 그만해. 검사야.]
[너도 나랑 같은 과구나. 옆방 아줌마도 보통이 아니던데 이 남자는 완전 연예인이네.]
마지막 판단을 위해 극도로 신중해진 일순의 표정을 읽은 천수무녀.
잠시 입을 다물고 병실을 둘러보았다.
‘격강우···. 격?’
침대 머리에 걸린 환자 이름을 본 천수무녀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 번 이름을 확인했다.
‘이런~! 격구치 놈의 후손인가?’
천수무녀는 살짝 긴장되면서도 묘한 기대감이 부풀어 오르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에이! 설마? 그때 뿔뿔이 흩어지고 900년 넘게 본 적이 없는데···. 가만, 마지막 봉인 40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순간!
작은 소리가 천수무녀의 귀에 거슬렸다.
천수무녀는 한 단어 때문에 검은 정장들의 대화에 모든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북비술경으로 강우를 깨우겠다고요?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의사들도 포기했어요."
건장한 청년이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다그치듯이 말하고 있었다.
‘북비술경?’
격구치가 말했던 그 술법서?
젠장! 이놈들 격구치 후손이 맞네.
그렇다면 일순이 저놈을 선택하게 놔둘 수는 없지.
천수무녀는 검은 정장 무리를 헤집고 들어가 격강우의 눈에 빨려 들어갈 듯이 쳐다보고 있는 일순에게 소리쳤다.
[어이구. 일순무녀님! 내가 필요 없겠네. 혼자서도 잘 빨려 들어가겠네.]
[야! 누가 뭘 어쨌다고 그래. 맘대로 하라고 해놓고 왜 그래? 혼갈이 유세 떠는 거냐?]
천수무녀의 빈정거리는 외침 때문이지, 강우에게 반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인지 일순은 도리어 신경질을 냈다.
[어이구. 방귀 뀐 놈이 성질은.]
[안 뀌었거든.]
[됐다. 실없는 말 그만하고. 내가 미처 말 못한 게 있다.]
일순이 격강우를 선택하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지만 짧은 시간에 일순을 설득할 뾰족한 묘수를 찾을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선택권을 준 적이 없다고 우기고 무조건 707호 성우희에게 혼갈이 하라고 하면 순순히 받아들일 일순이 아니었다.
[뭔데 그러냐?]
[그게 말이다. 혼갈이가 안되면 대상을 바꾸는 건 괜찮은데..., 여러 명을 혼갈이 해보고 선택하는 것은 문제가 좀 있어.]
[무슨 문제?]
이미 의심하는 눈초리로 천수무녀를 째려보는 일순.
무슨 수를 써서라도 707호로 끌고 가야 하는 천수무녀는 일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더 힘차게 째려보았다.
회피하면 더 의심 받는 법.
[혼갈이를 성공하고 다시 빠져나오면 보통사람에겐 괜찮아. 근데 이 환자들에겐 부작용이 생길 수 있어. 이해 되냐?]
[그러겠네. 의식이 없다가 잠깐이라도 의식이 돌아오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좋아할 테니. 생각해 보니 못 할 짓이네.]
역시 수능 만점 일순.
두리뭉실하게 부작용만 던졌는데 찰떡같이 알아서 정답을 만들어 내는 일순을 보고 또다시 감탄하는 천수무녀.
[그렇지? 그러니까 한 명만 선택해서 빨리 혼갈이 하자.]
[한 명이라···, 그렇다면 격강우! 저 남자로 할래. 이참에 남자로 한번 살아봐야지.]
아뿔싸!
일순의 마음속엔 이미 격강우가 들어가 있었다.
급해졌다.
서둘러서 비장의 카드를 급조해야 한다.
일단 일순의 최종결정을 못하게 하고, 일격에 무너트릴 근거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근데 저 남자 깨어나도 검사를 할 수 있을까?]
[괜찮아. 검사라서 선택한 거 아냐. 내가 더 멋진 남자로 만들 수 있어.]
예상대로 일순은 순전히 얼굴만 보고 선택한 것이다.
천무수녀의 다음 작전은 명료해졌다.
이에는 이! 얼굴엔 얼굴!
[707호 성우희. 그 여자 정말 엘레강스하게 생겼던데. 내가 혼갈이 하고 싶을 정도던데.]
[···? 707호로 유도하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실패다.
눈치 빠른 일순에게 너무 어설픈 미끼였다. 천수무녀는 어설픈 것보다는 황당한 게 낫겠다 싶어서 무작정 던져보기로 했다.
[아니, 난 그냥 여자로 혼갈이 하는 게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런 거지. 남자도 가능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해 지거든.]
[그래? 근데 저번에 잠돌이 남학생을 혼갈이 했을 때는 불편한 거 없던데?]
역시 일순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두 혼은 머리 위에서 칼춤을 추는 듯 수 싸움이 치열했다.
[고작 10분 정도? 너 저 남자로 수십 년을 살아야 할 텐데 세월이 지날수록 불편함이 점점 심해질걸? 내가 기나긴 세월 동안 남자를 한두 명 혼갈이 했겠냐?]
[얼마나 불편한데?]
[점점 정체성이 퇴색되지.]
오호!
천수무녀는 무심코 꺼낸 대답이 너무 만족스러웠다.
정체성!
이젠 승부는 끝났다.
[어떻게 되는데?]
[일 년 정도 지나면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게 될 거야.]
[그리고?]
[좀 더 지나면 남자를 좋아하게 되지.]
[그럼 동성애자가 되는 건가?]
[정답! 혼과 육이 따로 놀게 될 거야. 그거 엄청 고통스럽거든. 원래 그런 성향을 좋아하면 모를까, 살아 있어도 사는 게 아냐.]
천수무녀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일순을 힐끗 쳐다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
[잘 생각해 봐. 난 상관없어. 대신, 나중에 날 원망하지는 마라.]
[어쩔 수 없네. 그냥 707호로 가자.]
[잘 생각했어.]
아슬아슬했다.
일순은 끝까지 미련이 남았는지 방문객을 비집고 들어가서 격강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고 나왔다.
그런 일순을 보고 천수무녀는 다짐했다.
동성애자가 된다고?
황당하지만 이제 끝까지 비밀이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