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하 1993 (8)

오성병원 707호.
성우희 입원실.
고작 병실 하나 건너오는 동안 일순은 천수무녀의 경험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성 정체성 혼란도, 동성애자가 된 적도 없었기에 일순의 집요한 질문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성질대로 라면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약속은 약속이기 때문에, 수능시험의 은인이기에 꾹 참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근 천년 만에 만난 격구치의 후손들이 몹시 거슬렸는데 일순의 집착은 불난 곳에 기름 붓는 격이었다.
이대로 혼갈이를 해도 나중에 삐걱거리는 일이 생길 것이 뻔했다.
눈치 빠른 일순이라면 성우희를 혼갈이 해서 나중에 격강우를 만날 것만 같았다.
그때 가서 일이 꼬일 바엔 차라리 지금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천수무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일순! 사실은 네게 숨긴 것이 있어. 고민 많이 했는데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옆 방 남자?]
[맞아. 격강우.]
[말 안 해도 돼.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대충 눈치 챘어.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할거야.]
갑자기 이건 무슨 변덕인가?
좀 전까지 708호 격강우를 혼갈이 할 거라고 떼를 쓰던 일선이 의외로 쉽게 수락했다.
그것도 자세한 사정은 듣지도 않고.
[혹시? 다음 생에선 멋진 사랑을 꿈꾸고 있었던 건가? 흠···, 성 정체성의 혼란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금기였나?]
[애초에 성우희도 맘에 들었어. 혹시나 실패하더라도 708호는 패스 할 거야. 네가 싫다는 데 굳이 하고 싶지는 않다. 너무 감동하지는 마라.]
이것은 변덕인가?
양보를 가장한 포기인가?
짧은 뒷머리를 한껏 쳐 올리면서 거만하게 웃는 저 표정은 뭐지?
[···, 할 말이 없어지네.]
일순이 격강우를 완전히 포기하겠다니 다행이긴 한데,
일순이 베푸는 것 같은 이 찜찜함은 뭔가.
[이제 혼갈이 하자.]
일순은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지 천수무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편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날 데리고 가서 저 여자에게 넣어 달라고 재촉하는 무언의 자세.
[알았다. 일단, 나 혼자 혼갈이 해보고.]
천수무녀는 거리낌 없이 곧바로 성우희를 혼갈이 하러 들어갔다.
짐작한 대로 우희는 혼은 기절이 아니라 거의 파멸된 상태였다.
굳이 방어막을 치지 않더라도 문제 될 게 없었지만 혹시나 또 다른 기적으로 깨어날 것을 염려해서 가장 기본적인 방어막을 세웠다.
잠시 후.
우희 몸에서 빠져나온 천수무녀는 쉬지도 않고 곧바로 일순을 엮어서 혼갈이를 시도했다.
지난 달, 시험장에서 잠만 퍼질러 자던 남학생보다 열 배는 수월한 혼갈이 였다.
900년 넘는 세월동안 단독으로 수많은 사람을 혼갈이 했지만 이토록 수월하게 끝낸 적은 없었다.
심지어 내림굿을 받는 무녀를 혼갈이를 해도 이보다는 어려웠다.
일순을 혼의 자리에 안착시키고 빠져나온 천수무녀는 잠시 한숨 돌리고 침대 옆에서 우희를 내려다보았다.
일순이 원하는 혼갈이를 해줘서 홀가분했지만 왠지 안쓰럽기도 했다.
19살에 천재 소녀가 허망하게 죽더니 40대로 빙의하는 것을 축하해야 할지···.
[나일순? 아니지. 이제부터 성우희지. 우! 희!]
천수무녀는 우희에게 살짝 혼갈이 해서 이름을 불렀지만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우희는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편안한 표정으로 여전히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이상하네. 분명 완벽하게 혼갈이가 된 걸 확인하고 나왔는데?’
완벽한 혼갈이를 확신하는 천수무녀는 걱정보다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저렇게 안 들리는 척 하면 답도 없는데···. 다시 들어가서 깨워 줘야 하나? 저 뇬 지금 놀리려고 일부러? 아니면?’
드르륵.
누군가 707호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희의 아버지, 성의원과 보좌관 황철민이었다.
“의원님. 안색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오늘은 댁에서 쉬시죠. 여긴 제가 있겠습니다.”
철민은 보좌관이라기보다는 경호원에 가까웠다.
벌써 20년 넘게 성의원을 곁을 붙어 다니고 있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매번 네가 고생이다.”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성의원은 철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우희가 널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황비서관은 감정변화 없이 습관처럼 움직였다.
겉과 속이 다른 성의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성우희는 유력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려는 아버지를 위해 정략적으로 결혼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 경호원으로 채용된 철민을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남자로 생각했다.
매일 마주치면서 어느새 익숙해졌고, 또 어느새 짝사랑으로 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성의원에게 들키게 되면, 그 아슬아슬한 감정마저도 사라질 것이 뻔했다.
안 그래도 왕래가 별로 없는 부녀지간인데 감정의 골까지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황철민은 아무런 말없이 우희가 덮고 있는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철민의 손길이 우희의 긴머리를 살짝 스치는 순간,
파르르 떨리는 우희의 눈꺼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수능 만점이 신기하네.’
천수무녀는 그런 우희를 보고 씩 웃으며 병실을 나갔다.
'어? 베개가 왜 틀어졌지'
우희의 머리를 살짝 들어 베개를 바르게 놓는 황철민.
그 순간.
우희가 또 한 번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이 정도 신호를 줬으면 눈치 챘겠지? 이쯤에서 깜짝 놀라면 서서히 눈을 뜨면 되려나? 아니지. 드라마에서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던데, 그게 더 드라마틱 하려나?’
일순은 천수무녀의 부름도 모른 척 하고 기적의 순간을 어떻게 연기할까 고민 중이었다.
“어? 의원님! 우희씨가 움직였어요.”
예상대로 철민은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깜짝 놀란 성의원은 벌떡 일어나 한걸음에 우희에게 다가왔다.
우희의 손가락 앞까지 머리를 들이밀고 눈 빠지게 쳐다보는 철민과 성의원.
눈알이 빠지려고 할 즈음.
까-닥!
손가락이 시원하게 움직였다.
‘아~. 힘 조절이 안 되네. 너무 크게 움직였어.’
일순은 드라마보다 더 감질나게 움직이고 싶었다.
우~아!
성의원은 눈앞에서 펼쳐진 기적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일순이 혼갈이 한 성우희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자칫 잘못되면 딸이 깨어나고 애비가 혼수상태가 될 것 같은 순간, 철민이 민첩하게 성의원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으~~~. 괜찮아. 빨리 의사를 불러.”
의사를 부를 필요도 없었다.
환자 감시장치를 모니터링 하던 간호사가 이미 병실에 들어 와서 우희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담당의사를 부르기 위해 뛰어가고 있었다.
*
성우희가 깨어나기 3분 전.
7층 병실 복도.
탁! 탁! 탁!
간호사가 헐레벌떡 복도를 뛰어가고 있었다.
“선생님! 환자가 깨어났어요. 혼수상태 환자요.”
간호사는 7층 병실 복도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뜸을 들이더니 이제야 일어 났나보네.’
7층 휴게소에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혼들과 담소를 나누던 천수무녀는 호사의 외침을 듣고서야 일순에게 보답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뭐? 진짜야? 성의원님 병실에 계시나?”
“707호가 아니고 708호예요. 검사님이 깨어났어요.”
‘뭐? 뭔 소리야? 708호?’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천수무녀.
갑자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간호사가 정신을 못 차렸나?
아니면 병실을 착각한 건가?
아니다. 분명 검사라고 했다.
그리고 불과 몇 초 후.
“선생님! 성우희씨가 깨어났어요.”
이제 막 707호 문을 열어 제치고 뛰어나오는 간호사가 소리쳤다.
삽시간에 7층 의료진은 혼돈에 빠졌다.
두 명의 혼수상태 환자가 깨어났으니 난리가 나도 큰 난리가 났다.
‘말도 안 돼’
혼수상태가 장난도 아니고. 좀 전까지 분명히 멀쩡한, 아니 혼수상태인거 확인했는데···?
천수무녀는 의료진이 몰려오기 전에 후다닥 708호 병실로 들어갔다.
간호사의 말대로 격강우는 깨어났다.
의식만 간신히 회복한 상태가 아니라 침대에 멀쩡하게 앉아 있는 격강우.
아직 말은 없지만 눈동자를 굴리고 팔과 다리도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격강우의 움직임 보다 천수무녀의 눈길을 잡고 있는 것은 침대 위의 서책이었다.
‘북비술경?’
간호사가 뛰어나가고,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노인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밀면서 황급하게 병실을 나가고 있었다.
격강우가 깨어났는데도 그들은 기뻐하는 기색 없이 마치 장례식장에 와서 문상을 마치고 나가는 사람들처럼 굳은 표정은 뭐지?
‘이상한데?’
천수무녀는 깨어난 격강우보다 병실을 나가는 노인이 더 신경 쓰였다.
1년 넘게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사람을 병문안 온 사람들이 기적 같은 일을 목격했는데 저렇게 그냥 병실을 나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고 수상한 사람들이 분명했다.
7층 복도를 따라서 휠체어에 바짝 붙어서 따라가는 천수무녀.
‘어라? 죽었잖아?’
휠체어를 타고 있는 노인은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지만 천수무녀는 쉽게 눈치 챘다.
격강우가 깨어나는 시간에 노인은 죽었다?
두 사람의 생사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저들을 계속 따라 가봐야 하나?’
그럴 필요 없었다.
708호에 가서 격강우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면 금세 알 수 있을 테니.
천수무녀는 승강기를 기다리는 휠체어 노인과 일행을 뒤로 한 채 급하게 708호로 이동했다.
깨어난 지 10분도 안 된 격강우는 1년 넘게 혼수상태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굳이 기본적인 생명 반응을 검사할 필요도 없는 상태라서 담당의사도 당황스러운지 한동안 격강우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의식이 돌아온 게 확실했고 남은 것은 대화가 가능한지 확인하는 것.
담당의사는 아직도 현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격강우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깨어나신 것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분이 누구세요?”
참다못한 간호사가 작고 차분한 목소리로 격강우의 부모에게 물었다.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같이 봤습니다. 좀 전에 문중 어르신이 친지들과 오셔서 기도 하셨는데, 갑자기 머리를 뒤척이더니 금세 일어났습니다.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격강우 부친의 목소리는 말과는 달리 방금 전에 일어 난 기적의 여운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분들은 어디?”
“좀 전에 가셨습니다. 어르신이 많이 피곤해 하셔서 친지 분들이 모시고 갔습니다. 우리 강우가 문중 장손이라서 어르신이 걱정이 크셨는데 조상님들 덕분인 것 같습니다.”
‘조.상.님?’
천수무녀는 격강우의 부모와 노인이 북비술경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실랑이 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불과 한 시간 전에는 북비술경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갑자기 조상님 은덕이라면서 돌변했다.
‘분명 북비술경을 가지고 무슨 술법을 쓴 것 같은데? 이제라도 그 노인을 따라가서 알아봐야 하나? 분명 죽은 사람이었는데···.’
천수무녀는 격강우를 깨운 술법으로 짐작 가는 것이 있었지만 스스로 부정하고 있었다.
만약 짐작하는 것이 맞는다면 천수무녀가 가장 우려했던 상상이 현실이 되기 때문에.
[설마···? 그건 아니겠지?]
그 때.
“여긴 중환자실입니다. 이렇게 막 들어오시면 안 돼요.”
“거 좀 취재 좀 합시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그렇게 사진 찍으면 안 됩니다. 당장 나가주세요.”
병실 밖 복도가 갑자기 술렁거리고 있었다.
기자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새 진을 치고 있었다.
7층 통로뿐만 아니라 병원 정문에는 방송국 중계차가 들어왔고 심지어 경찰까지 출동한 상태였다.
707호와 708호,
두 환자가 동시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취재하러 몰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다들 707호에 취재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다.
하긴, 장래가 총망한 검사라고 하지만 전직 국회의장의 딸이 더 화젯거리가 되겠지.
그래도 예상보다 훨씬 심했다.
한쪽에서는 취재 경쟁이 한창인 와중에 휴게실의 TV에서는 벌써 오성병원의 기적이 방송되고 있었다.
“기자는 지금 오성병원에 나와 있습니다. 반년 넘게 이곳 병원에 혼수상태로 입원해 있던 월선그룹 최대만 회장의 부인 성우희씨가 조금 전 깨어났습니다.”
‘엥?’
“월섬그룹 최대만 회장과 이혼 소송 중이던 성우희씨는 지난 6월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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