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 1994 (1)

#42
“이제 약속 지킬 거죠?”
“무슨 약속?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
‘기억나지 않는 건가? 뭐 갑자기 물어보면 그럴 수도 있지’
설하는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길함을 일부러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의대 합격만 하면 맘대로 하라고 했잖아요.”
“내가? 언제?”
싸하다.
커피잔을 쥐고 있는 엄마의 손가락이 하얗게 변했다.
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간 저 고집.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게 분명했다.
“어차피 재수 삼수 각오하고 있으니 합격만 하면 1년이 아니라 10년이라도 맘대로···.”
설하는 말을 맺지 못했다.
이미 모르쇠 작전으로 돌입한 엄마의 속마음을 간파했다.
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 듣는 척도 하지 않는 저 표정.
더 이상 말해도 소용없다.
“아하!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병신. 이런 돌대가리로 무슨 대학에 가겠다고.”
엄마의 눈치를 살피던 설하가 맞나?
팽팽했던 연을 날려버린 아이의 표정으로 바뀐 설하였다.
“···?”
엄마는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곁눈질로 설하의 표정을 훔쳐보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그깟 약속이 뭐 중요하다고···, 어차피 합격할 일도 없는데.”
수백 년간 농축된 떠보기 경험을 갈아 넣은 자포자기 연기.
이보다 더 진지할 수는 없겠다.
“무슨 말이야? 그 점수로 왜 합격 못해? 내신이 아무리 안 좋아도 갈 대학은 널렸어.”
당황한 속마음에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는 날카로운 말투.
그리고 이미 견제에 들어간 눈빛이 역력했다.
“원서를 내지도 않을 텐데 무슨 합격? 이제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거야. 빌어먹을 의대가 뭐라고.”
잠깐의 침묵.
의도된 긴장감.
팽팽한 눈치 보기.
“옥상, 절벽, 이번엔 어디냐?”
자살 협박으로 착각한 엄마가 냉정하게 받아쳤다.
대학 포기한다는 말로 유추한 게 고작 이건가?
자살?
뭔 개똥 같은 소리?
하긴, 이 아줌마는 딸이 어떤 상태인지는 꿈에도 알 수 없으니.
한성은의 말 한마디에 무기력함을 느낀 천수무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늘 이런 식으로 압박한 건가?
고민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밟아서 싹을 잘라버리는···.
이제 곧 설하를 깨워야 하는데 첩첩산중 같은 엄마의 압박을 감당할 수나 있으려나?
“왜? 그냥 자살하기엔 수능 점수가 아깝냐?”
정말 답도 없는 아줌마의 발악이었다.
이 정도면 과한 정도가 아니라 정신병이다.
짝! 짝! 짝!
“자주 느낀 건데 언제나 기대를 뛰어 넘네요. 대단합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박수치는 설하.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미친 거냐?”
딸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성을 지르는 한성은.
“다시는 자살 같은 멍청한 짓은 안 합니다. 그러니까 괜히 넘겨짚지 마세요.”
쾅!!!
설하는 문짝이 떨어지라고 야무지게 닫고 들어갔다.
설하의 눈빛을 본 한성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태껏 본 적 없는, 냉소와 분노가 가득 찬 그 눈빛은 자신의 딸이 아닌 것 같았다.
***
1993년 12월 20일.
“호호호! 저도 몰랐어요~.”
산타 선물이라도 미리 받은 듯 신이 난 한성은.
딸 자식의 수능 점수를 팔아서 인터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전국 차석을 차지했는데 자신만의 학습법이 있을까요?”
이건 설하에게 묻는 말이 아니다.
당사자인 설하는 없는, 설레발치는 한성은의 인터뷰다.
“그냥 별 말하지 않고 격려만 했어요. 타고 난 머리가 있어서 그런지 몇 달 만에 급상승 하더라구요. 호호호.”
늘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트로피보다 더 반짝이는 트로피를 쥐고 조만간 방송에도 나올 것이다.
최고 명문대 수석을 차지한 남편.
수능 전국 차석을 차지한 딸.
수석을 차지한 아빠와 차석을 차지한 딸.
자연스러운가?
아버지 덕분인지, 의사인 엄마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뜻밖의 결과를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었다.
천재 집안에서 늘 상 있는 유전의 법칙이니까.
***
설하의 집.
싸돌아다니는 엄마 덕분에 혼자 남은 설하.
오늘이 그 날이다.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기로 한 날.
혼갈이도 순조로웠지만 설하의 혼을 깨우는 것도 간단했다.
넉 달 만에 깨어난 설하.
그리고 살짝 혼걸이만 하고 있는 천수무녀.
설하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면 혼을 걸쳐야 했다.
[괜찮냐? 좀 어지러울텐데.]
“으~~~어~~~!!”
괴성과 함께 팔이 빠질 듯이 크게 기지개를 피는 설하.
무척 개운한 표정이었다.
[넉 달 동안 기절한 것 치곤 상태가 꽤 좋아 보이네.]
다행이다 싶은 천수무녀.
혼이 탁한 사람 중엔 깨어난 후에 상태가 엉망인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설하는 혼이 맑은 건가?
“너무 좋은데요? 그냥 휴일에 늦잠 자고 일어난 느낌? 암튼 이런 상쾌한 기분은 오랫 만이네요.”
[혼갈이에 안성맞춤 혼인가 보다. 기분이 좋다니 바로 이야기해 줄게.]
“고작 4개월 동안 무슨 일이 생기긴 한 거예요? 참! 2차 수능은 어떻게 됐어요? 살짝 기대되는데요?”
[그게 제일 궁금해? 당연히 그러겠네. 맘껏 기대해.]
차근차근, 재미나게 지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일순을 만난 것부터 시험 과정,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 그리고 엄마와의 신경전까지···.
설하는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에 매우 놀란 눈치였다.
동강에서 우연히 만난 허풍쟁이 혼인 줄 알았는데···.
“197점? 진짜요? 어쩌려고요?”
[실상은 만점이지. 세 문제는 일부러 틀렸다.]
“헐~! 설마 했는데, 진짜 초능력자인가 보네요.”
한참 만에 판타지 소설 같은 현실을 받아들인 설하.
갑자기 씁쓸한 표정으로 변했다.
“엄마는 지금 살맛 났겠네. 딸이 전국 차석을 했으니.”
[그래. 벌써 며칠째 얼굴 보기 힘들었다.]
“근데 유아독종, 일순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어? 유아독종? 네가 그걸 어떻게?]
설하도 일순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학교는 다르지만 인근에서 일순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학생은 거의 없었으니까.
앞으로 별 상관없을 것 같아서 일순의 혼갈이는 말하지 않았다.
꼬리를 물면서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최대만, 격강우도 나올테니.
[나도 몰라. 어디론가 갔겠지. 암튼 네가 운이 좋은 거야. 정말 고마운 은인이었다.]
어차피 설하는 알 방법이 없으니 대충 둘러댔다.
“이상하네. 독종 일순이가 아무 대가도 없이?”
아차차!
예상보다 일순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왜? 일순이는 그냥 수능 문제 풀어보고 싶다고···.]
당황한 천수무녀.
“그럴 리가 없어요.”
단호하게 말하는 설하.
설하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일순의 특이한 인간관계는 학원가에서 유명했다.
일순이 색다른 문제 풀이를 알려주거나 자신의 필기를 보여주는 이유는 최고로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도와주고 끝났으면 그냥 유아독존이겠지만 일순은 도움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요구했다.
대가의 방법은 칭찬이나 간식, 때론 금전까지···.
그래서 유아독종이 된 것이다.
“모르긴 해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예요. 저승에서도 꺼리는 독종일 테니까.”
천수무녀는 더 이상 설명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떡할 거냐?]
“의대에 가야죠. 내신이 많이 깍아 먹겠지만 그 점수면 충분해요. 가능하면 집에서 멀리,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죠.”
설하는 기쁘거나 설레는 느낌이 없었다.
‘고마운 건지 귀찮아진 건지 모르겠지만 흘러가는 대로 가보지 뭐.’
400년 만에 혼갈이 해서 그런지 유난히 정이 든 설하였다.
많이 아쉽지만 이 정도에서 떠나는 것이 딱 좋을 듯 싶었다.
동시에 찾아 온 악연의 그림자도 괜히 불길하기도 하고.
“고마웠어요. 신기한 경험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1993년 12월 20일.
그렇게 설하와 헤어졌다.
일순과 헤어진 그날.
천수무녀는 곧바로 오성병원으로 향했다.
기적의 병원이라고 해외에도 화제가 되었지만 불과 며칠 사이에 한적해진 병원 분위기.
언제 그랬냐 싶게 예전보다 더 조용해졌다.
얼렁뚱땅 세계적인 명의로 등극한 의사도 생겨났지만,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린 인턴도 화제가 되었다.
일순이 혼갈이 한 성우희는 크리스마스에 퇴원했다.
파티는 집에서 하고 싶은 건가?
병원을 떠나며 찡긋 웃어보는 우희는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남편과의 소송은 별 대수롭지 않은 듯한 천진난만한 표정.
그건 일순의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며칠간 병원 이곳저곳을 후비고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고 708호 격강우에 대한 정보도 충분히 확보했다.
***
1994년 1월 1일.
7층 간호사 휴게실.
“어휴~. 징글징글하다.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네.”
708호 격강우의 병실에서 나온 간호사가 투덜거리며 휴게실로 들어왔다.
“또야?”
격강우에 대한 간호사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의 1년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젊은 검사.
처음엔 축복해주고 싶었지만 이젠 그런 마음도 싹 달아났다.
그는 간호사들이 들어 오면 눈을 피하고 묻는 말엔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이상한 질문만 반복했다.
-어느 대학을 나왔냐?
-몇 학번이냐?
-병원장의 이름을 말해 보아라.
대답하기 어렵거나 난처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난데없이 물어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번엔 뭘 물어보든? 바스트 사이즈?"
며칠 전 잠깐 혼갈이 했던 간호사였다.
개성 있는 얼굴에 매력적인 눈빛.
약간 사이코틱한 말투.
혼갈이 했던 시간은 고작 잠깐이었지만, 잊지 못하고 찾아왔다.
“바, 바스트? 호호호! 언니도 참!”
“소희 쟤는 얼굴은 멀쩡한데 주둥이가 사차원이야.”
“그래도 인턴들이 좋아서 난리잖아. 역시 이쁘고 봐야···.”
“그럼 뭐해? 또라이 인턴과 헤어졌잖아.”
“야! 넌 어떻게 면전에 대고 그러냐. 질투하냐?”
뭐지?
잠시 정신을 못 차리는 천수무녀.
이건 오래전에 칠선궁녀의 수다를 떠오르게 한다.
아니지.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설하의 친구들이 속사포처럼 쏟아 낸 수다와 똑같네.
“소희? 어째 소향이 떠오른다 했다. 참 예쁘네.”
예쁘면 뭐다?
그렇지. 혼갈이 해야지.
설하가 사라지고 안보여서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도 수월하게 혼갈이를 했던 소희.
역시 이번에도 착착 감기듯이 완벽하게 혼갈이 했다.
“너냐? 조금 전에 누구랑 헤어지고 어쩌고 말 한 용감한 년이.”
소희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수다 삼매경에 빠진 키 큰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야! 연소희. 미쳤어? 어린 게 어디 감히. 어쩔 건데? 병원에서 연애하려면 좀 조용히 좀 해라. 동네방네 소문내지 말고. 그래서 시집이나 가겠냐?”
고참인 듯한 간호사는 너무 길게 주절거렸다.
‘하~, 이 년이 스스로 수명 단축을 자청하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소희에게 완전하게 동화되었다.
혼심동체!
지난 세월 동안 쭉 그래 왔듯이 외모가 흡족할수록 빠르게 동화된다.
“어쩌긴요. 꼴리는 대로 지껄였으면 각오는 해야죠. 당장 사과하면 용서는 해줄게요. 선-배-님.”
뒷걸음치는 선배를 노려보는 소희.
좁은 휴게실은 싸한 분위기의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동안 성질 죽이고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네.
털-썩!
갑자기 쇼파에 주저앉더니 편하게 등을 기대고 살포시 눈을 감는 소희.
누가 봐도 잔뜩 겁먹은 선배의 사과를 기다리는 태도였다.
이미 판세는 기울었다.
풀-썩!
선배 간호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생각 없이···, 아니, 네가 워낙 예뻐서 질투한 거야. 우리 병원 총각 선생님들이 모두 네게 관심 있잖아. 질투 안 하는 척하는 저것들이 가식적인 년들이지.”
느닷없이 가식적인 여자들이 되어버린 나머지 간호사들.
또다시 집중포화를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다.
“참~내. 저년이 미쳤나? 너야말로 위아래도 없냐?”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재수 없네.”
“언니!. 정신 차리세요. 혹시 약 먹었어요?”
“눈이 풀렸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가식적이라는 말에 자극을 받은 건지 곁에 있던 간호사들이 일제히 십자포화를 던졌다.
잠시 후 이제 휴게실을 나온 소희는 곧바로 708호로 향했다.
드르륵-!
병실엔 격강우와 그의 모친만 있었다.
문을 열 때부터 소희가 격강우의 얼굴을 쳐다볼 때까지 분명 놈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새 딴 곳을 쳐다보고 있는 격강우.
‘네 놈은 격강우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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