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 1994 (2)

‘네 놈은 격강우가 아니구나.’
살짝 감은 잡고 있었다.
잔뜩 긴장해서 눈을 피하는 모습을 보니 확실해졌다
격강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젊은 검사가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났으니 병원 여기저기에서 그에 대해서 주절거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며칠 동안 병원을 싸돌아다녔으니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병원 직원들이 격강우를 입방아에 올리면 꼭 이렇게 시작했다.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신임 검사! 검찰 총장 앞에서 당당하게···.>
이딴 식의 기사가 많았던지 항상 깔고 가는 유치한 수식어였다.
그런 놈이 새로운 발령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암벽등반을 하다가 떨어져서 1년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난 것이다.
혼수상태가 되기 전에 그렇게 패기, 열정 어쩌고저쩌고하던 놈이 깨어나서는 간호사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후유증인가?
깊게 생각하기 싫은 천수무녀.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이유는 없어 보였다.
가장 거슬리는 것은 바로 '눈'이다.
이놈은 천수무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주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격구치와 최봉만이 활개 치던 그 시절.
두 번째 봉인에서 해제되고 복수는 커녕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격가 3인방은 심각한 패닉 상태였다.
공포에 휩싸여 어쩔 줄 몰라서 서로를 의심하던 격가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 전 격강우의 모습이 딱 그랬다.
“검사님? 오늘은 돌발 퀴즈 안 하세요?”
일부러 격강우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 소희.
소희는 혼갈이 한지 몇 시간 안 된 따끈따끈한 상태지만 천수무녀는 매우 익숙했다'
설하와 헤어지고 나서 열흘 정도?
오성병원에 죽치고 있으면서 계속 소희를 관찰했다.
당장 혼갈이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708호를 자유롭게 드나들기 힘들어서 혼갈이를 늦췄다.
간호사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천수무녀라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소희의 성격이나 말투까지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티 나지 않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부원장님 생일을 맞춰 볼까요? 아니면 오늘 제 팬티 색깔?”
미쳤다. 내 팬티 색깔을 내가 맞춰?
너무 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질주해버렸다.
소희의 과감한 접근에 격강우도 하마터면 시선을 돌릴 뻔.
격강우의 모친은 방금 자신이 들은 소리가 믿기지 않은 듯 귀를 후비고 있었다.
“저기···, 간호사님? 방금 뭐라고 한 겁니까?”
격강우 모친은 소희의 명찰을 보며 물었다.
“아! 농담입니다. 농담!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서둘러 빤스를 회수하는 소희.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간호사님. 장난 그만하시고 빨리 주사 놓고 일 보세요.”
“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좀 전에 혼갈이 했는데 주사 놓는 법을 알 리가 있나. 시늉만 할 려고 했는데···.
‘이런~!’
아무 생각 없이 소희 얼굴만 보고 혼갈이 했으니 당연한 낭패였다.
딱 한 번 의녀에게 혼갈이 한 적이 있었으나 그게 무슨 소용일까?
‘그래. 침착하게···, 차리리 역공을 하자.’
몹시 당황했지만 들키지 않으려고 태연하게 격강우를 쳐다보는 소희.
“검사님? 혼수상태에서 기적같이 깨어나셨으니 이제 천수무강하세요!”
“천수무강? 만수무강이 아니고?”
소현을 정신 나간 여자로 확신한 격강우 모친.
서둘러 그녀를 내보내려 했다.
아마도 귀한 검사 아들에게 수작을 걸려는 간호사로 생각하는 듯.
“네네. 나갈게요. 주사 투여는 이따가 수간호사님이 하실 거예요.”
소희는 주머니에서 작은 거울을 꺼내 뒤쪽을 살짝 비춰보았다.
그 순간.
소희는 자신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격강우의 눈빛을 봤다.
곧이어 작은 거울을 눈치챈 격강우가 잽싸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제자리걸음 하는 소희를 째려보며 등까지 떠밀며 밖으로 몰아내는 아줌마.
‘아~! 이 아줌마를?’
“사모님 왜 이러세요. 이렇게 함부로 밀치면 안돼요.”
밀려서 넘어지는 척하며 쇼파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소희.
순식간에 격강우의 모친에게 혼갈이 했다.
“참 대책 없는 간호사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빨리 나가세요.”
꿈쩍 않고 멍하니 시위하듯이 천정만 쳐다보는 소희.
“알았어요. 밀친 건 내가 사과할 테니까 조금만 쉬었다가 나가세요.”
이거 좀 어색한가?
암튼, 소희는 쇼파에 잠깐 내버려 두고 격강우에게 다가갔다.
“참 이상한 간호사네. 천수무강이 뭐야? 요즘엔 그게 유행어인가?”
격강우에게 바짝 다가가는 모친. 아니, 천수무녀.
하지만!
“잠깐! 아빠 생신이 언제죠?”
격강우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돌발 퀴즈를 발동시켰다.
이런~!!
“어? 잠깐만! 간호사가 이제 나가려나 보다.”
천수무녀는 재빨리 격강우의 모친을 나와 소희를 다시 혼갈이 했다.
‘그래. 계속 견제해라. 네가 누군지 곧 밝혀내마.’
격강우를 혼걸이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천수무녀.
그래도 썩어도 준치가 아닐까 염려되었다.
혹시나 예상치 못한 저항력으로 놈이 눈치채고 튀어버릴 것 같아서 꾹 참고 병실을 나왔다.
그날 늦은 밤.
“야! 연소희.”
누군가 퇴근하는 소희를 불렀다.
그는 바로, 얼마 전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린 그 인턴이었다.
설하를 찾기 위해 천수무녀가 잠깐 혼갈이 했던 그 억울한 남자.
그가 바로 소희의 헤어진 남친이었다.
“어? 아! 뭐예요? 왜?”
아뿔싸. 너무 성급했다.
둘 사이의 감정을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먼저 말을 내뱉어 버렸다.
전 남친의 등장에 화를 내야 하는지 좋아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불과 며칠 동안 소희를 지켜본 게 전부라서 미처 거기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다.
홍대성.
27살, 이 병원 인턴이다.
“할 말 있다.”
“뭔데요?”
“나, 내일 선본다.”
“그래서 어쩌라고요?”
“너랑 다시 시작할 수···.”
“됐어요. 선? 잘 보세요.”
“···.”
자신도 모르게 툭툭 내뱉듯이 대답해 버린 천수무녀.
이게 소희의 성격인가?
‘아! 내가 망쳐버린 건가? 선보지 말라고 하고 다시 시작하자고 할 걸 그랬나?’
수백 년간 무수한 여자에게 혼갈이 해서 살아온 천수무녀.
이렇게 연인 사이의 감정을 두고 쉴 틈 없이 치고 빠지는 대화는 처음이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인연이면 다시 잘되겠지. 뭐!’
매몰찬 대답에 살짝 비틀거리는 대성.
충격을 받은 건가?
절대로 아니었다.
대성은 숨도 안 쉬고 답하는 소희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못해서 몹시 분했다.
‘다시 시작할 수는 없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아~ 졸라 성질 급하네.’
**
이틀 후.
“야! 그거 알아? 홍대성, 그 새끼 미스코리아랑 선봤대.”
“그 몸매 죽이는 아나운서?”
“누구?”
“있잖아. 미스코리아 출신 아나운서. 얼굴은 퍼펙트, 몸매는 땡큐.”
“하여튼 그 새끼 얼굴 졸라 밝혀.”
“맞아. 7층 그 간호사도 보통이 아니었는데.”
“저 새끼 맘 접었으면 내가 대시해볼까?”
와~. 박수!
인턴과 레지던트의 수다도 만만치 않은 레벨이었다.
저 멀리서 주둥이를 터는 그들만의 수다.
소희 눈에 전부 보였다.
독순술.
월선 덕분이었다.
“오호라! 홍대성. 결국 몸매였냐?”
갑자기 전의에 불타는 소희
느닷없이 휴게실로 달려가서 완전 탈의 완료.
“오~! 이 감동적인 몸매는 뭔데? 놈이 여태까지 본 적이 없었나?”
거울에 비친 적나라한 모습에 감탄하는 소희.
미친 년이 따로 없었다.
이쯤에 간호사들이 휴게소로 들어와야겠지.
그리고 또다시 거한 수다가 한판 벌어지는 것이 순리.
“야! 연소희.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어머머머. 쟤 좀 봐. 드뎌 정신줄 놨네.”
“홍대성 때문이야? 참 꼬인다 꼬여.”
“호~! 굉장한데?”
“누구 기죽일 있냐? 빨리 입어!”
봤나?
역시 수다는 간호사들도 의사들에게 꿀리지 않는다.
눈을 떼지 못하는 간호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다시 옷을 입는 소희.
그녀들의 시선을 즐기는 것 같기도···.
“은영 선배! 미스코리아 대회 나가면 어떨까?”
옷을 다 입은 소희는 전신 거울을 향해 미스코리아 포즈를 취하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난 나이가 좀 많아서···.”
“···?”
“그리고 난 결혼도 했고···”
“...??”
부끄러워하면서도 진지한 은영.
소희는 그런 은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셔? 선배 말고 나 말이야. 이참에 미스코리아 나가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너? 네가 나가려고? 왜 나가려고?”
“그거야···.”
“대성이 그놈 때문이구나. 소문 다 들었어.”
이놈의 병원에선 누가 방귀만 뀌어도 금세 소문이 난다.
하긴, 의사 선생들이 그렇게 수다를 떨 정도면 간호사에겐 이미 파다하게 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야지. 우리 소희가 어떤 인물인데, 고작 미스코리아 선에게 밀릴 수는 없잖아.”
“미스코리아 선?”
하~! 그게 뭐지?
미스코리아도 등급이 있나?
끝도 없는 무지 때문에 눈알을 굴리기 시작하는 소희.
“그래. 혼선생이 선 봤다는 그 아나운서가 재작년 선이래. 사진 보니까 예쁘긴 하더라.”
“예쁘다고? 나보다?”
살기가 넘쳐나서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은영을 째려보는 소희.
“그, 그건 아니고. 사진은 풀메이크업하고 찍은 거잖아. 실물은 당연히 너보다 못하겠지. 그럼 그럼.”
당황한 은영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 했다.
“동작 그~만!”
다들 슬금슬금 은영을 따라서 휴게소를 나가려고 하자 대뜸 소리치는 소희.
“지금 나가는 사람은 내가 두고두고 기억할 거야. 다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면 순순히 풀어주겠다.”
흡사 인질극 같은 이 상황은 뭔가?
“뭔데?”
4명의 간호사가 이구동성으로 호흡까지 맞춰 물었다.
“그년과 나. 둘 중에 누가 더 예뻐? 진실만 이야기해 줘. 알지? 거짓말 귀신같이 잡아내는 내 눈썰미.”
“어디서 그깟 년을 우리 소희랑 비교 해. 우리 소희 완승!”
“사진 봤는데 얼굴에 칼자국이 철철. 자연미인 소희 만세!”
“미스코리아 선 따위는 줘도 안 한다. 오성병원 퀸. 소희 만만세!”
진실이 발각되기 전에 말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앞다퉈 말하는 간호사들.
역시 소희는 오성병원의 지존으로 등극한 모양이었다.
한번 찍으면 박살 내는 독한 성격.
모르긴 해도 홍성대가 치를 떨며 달아난 것도 그것 때문?
예전에도 소희의 성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혼갈이 한 이후로 그녀의 돌발 행동을 두려워하는 직원들이 부쩍 늘었다.
“오케이. 언니 동생들의 마음이 그렇다면···, 내가 나가는 수밖에.”
“우리가 나가면 되는데 굳이···?”
“뭐? 다들 내 경쟁자가 되겠다는 거야?”
“미치겠다. 넌 계속 여기서 고민해라. 우린 여길 나가려니까.”
“고민 끝났어. 난 출전할 거야. 이제부터 전쟁이다.”
**
다음 날.
또다시 간호사 휴게실.
“뭐? 5월이라고? 왜?”
1994년 38회 미스코리아 대회 일정을 전해 들은 소희.
5월까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조급해졌다.
“수능시험도 아니고 미인대회를 왜 그렇게 늦게 해.”
“5월이면 늦은 것도 아닌데? 그리고, 수능이랑 무슨 상관이야. 수능은 공정하게 시험 보는 거고 미인대회는 순전히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돌아이 같은 소희가 두렵기도 했지만 그래도 맞장구쳐주며 챙겨주는 은영.
며칠 전부터 더욱더 똘끼가 넘치는 소희가 걱정되었다.
“수능도 짜고 쳐서 차석까지 했는데 뭘!”
필터링 없는 즉답.
혹시 혼갈이 오류인가?
소희를 혼갈이 하고 나서 천수무녀의 성격도 더 선명해졌다.
소희와 천수무녀의 성격은 같은 색깔이었으니까.
“뭐라고?”
귀를 의심하는 은영.
“어? 내가 뭐라고 했는데? 수능시험을 짜고 치면 차별이라는 거?”
이런 임기응변을 즉답으로 뽑을 수 있다고? 감탄하는 천수무녀.
“대회 일정을 바꿀 수는 없나? 좀 당겨서 다음 달에 그냥 해버리지. 그 놈 대가리에 1등 트로피를 던져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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