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 1994 (3)

“대회 일정은 누가 정하는 거야?”
“···?”
소희는 다짜고짜 대회 일정을 따져 물었다.
당황스러움을 넘어서 이제 심각해진 은영.
자연스럽게 말문이 막혔다.
“아마 신문사가 정할걸? 있잖아, 매년 그 대회를 주관하는 신문사.”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막내 간호사가 순진하게 끼어들었다.
“확실해?”
“확실까지는 모르겠는데 아마도···.”
뭔가 위협을 느낀 것이 분명한 막내의 표정.
정확히 3일 뒤.
38회 미스코리아 대회 일정이 바뀌었다.
5월은 가정의 달이지, 미인의 달이 아니라는 해괴한 이유로 3월 3일로 바꾼다는 갑작스러운 공지가 올라왔다.
참가할 사람들은 일정이 변경되어도 알아서들 찾아보고 지원할 사람들이다.
그래서 일정이 변경되었다고 구시렁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단지 의사의 손길을 기다렸던 몇몇을 제외하고는.
“설마? 네가 일정을 바꾸라고 협박한 건 아니지?”
설마라고 말은 했지만 소희가 의심스러운 은영.
불과 며칠 전에 미스코리아 트로피로 홍대성 대가리를 가격하겠다고 말 한 사람이 바로 소희였기 때문이었다.
뭔가 꼬였던 일이 술술 풀리는지 아주 흡족해하는 저 표정.
저걸 보고도 의심하지 않는다면 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
D-day 52일.
미스코리아 대회 일정이 변경되고 나서, 오성병원에는 불문률이 하나 생겨났다.
<연소희를 입방아에 올리지 마라. 무사하고 싶으면 미스코리아 어쩌고저쩌고 하지 마라.>
사흘 전에는 레지던트가,
이틀 전에는 소아과 간호사가,
그리고 어제는 원무과 직원이 소희 뒷담화를 하다가 뼈도 못 추릴 정도로 개망신을 당했다.
혼갈이를 휘갈기며 앞뒤 안 재고 망나니처럼 날뛴 것이 아니었다.
노골적인 뒷담화가 들통나서 거기에 상응한 대가로 무릎 꿇고 공개 사과를 했을 뿐, 소희 생각으로는 아주 가벼운 응징에 불과했다.
물론, 몇몇 직원들은 굳이 저렇게까지 사과해야 하느냐고 수군거렸지만 전적으로 자발적인 사과였다.
그래서!
소희가 눈에 띄지 않더라도 미스코리아 참가가 턱도 없다느니 하면서 주절거리는 직원들은 없었다.
*
D-day 51일.
“이상해. 708호 검사는 방송에 전혀 안 나왔어.”
“그러게. 사고 기사는 요란했는데···”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신임 검사. 그 기사 봤구나.”
겁나는 소희 대신에 입방아에 오른 격강우.
간호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7층에서 2명의 혼수상태 환자가 거의 비슷한 시간에 깨어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뻔질나게 뉴스에 나온 성우희.
그에 비해 격강우는?
<성우희씨 외에도 한 명이 더 깨어나서 세계적인 화제가 되고 있다>는 뉴스 타이틀이 보여 주듯이 그냥 '외 한 명' 이었다.
“성우희도 요즘은 잠잠하네.”
“그러게. 뻔질나게 방송에 나오더니 퇴원하고는 조용하네.”
잠잠한 게 아니라, 성우희는 깨어난 후 단 한 번도 인터뷰한 적이 없었다.
방송에 나온 자료들은 전부 성우희가 혼수상태가 되기 전에 찍힌 것들이었다.
일순이 의도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으나 성우희는 퇴원 이후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708호 검사. 눈을 피하는 거. 그거 대인기피증인가?”
“기피증이든 말든, 퇴원해도 되는데 왜 버텼는지 모르겠어. 급한 환자들도 많았는데.”
“그러게. 재수 없었어. 매번 이상한 질문이나 하고···”
‘이게 뭔 소리야? 퇴원한 건가?’
귀를 쫑긋하고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듣던 소희는 쏜살같이 708호로 향했다.
드르륵~!
쾅!!
아차! 문을 너무 세게 열었다.
아직도 혼 상태인 줄로 착각한 소희.
깜짝 놀라서 소희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격강우 가족이 아니었다.
당연히 혼수상태인 환자도 격강우가 아니었고.
‘이런~! 미스코리아에 정신 팔려서 격강우를 놓쳤네.’
그날 밤.
'크~~흐!!'
혼갈이 한 이후로 소희는 매일 밤 혼술이었다.
소희가 술꾼이었나?
혼이 기절해도 남아 있는 애주가의 몸부림인가?
‘도망가는 놈을 굳이 잡아야 하나? 다시 만나지 않는다면 까마득한 후손까지 단죄할 필요까지···’
격강우를 놓친 그녀는 포기할 핑게거리를 주절거리며 밤새 고민에 빠졌다.
*
D-day 50일.
밤 11시 30분.
홍성대가 또 찾아왔다.
이브닝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소희는 모른 척하고 그냥 가려고 했다.
“야! 연소희.”
어김없이 어두운 주차장 구석탱이에서 소희를 부르는 놈.
“···.”
“미스코리아 대회 나간다고?”
“그래요.”
“나 때문이냐? 나랑 선본 여자를 질투해서?”
“꺼져···요.”
즉답과 철벽.
그게 바로 소희의 매력이었고 홍성대와 헤어진 이유였다.
“네가 미스코리아 진이 된다고 해도 다시 시작하는 일은 없을 거야.”
물러서지 않고 기어이 하고픈 말을 마치고 마는 홍성대.
“당신이 보기에도 내가 진이 될 것 같죠?”
“···? 그게 아니라 진이 되어도 소용없다고.”
“뭔 소리예요? 내가 진이 되면 당신을 왜 만나요?”
"···."
미스코리아 출전이 자신과 상관없음을 눈치 챈 홍성대.
안심인지 낙심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남기고 터벅거리며 병원으로 돌아갔다.
소희가 미스코리아에 집착하는 이유는 저 놈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천수무녀 때문이었다.
천 년 전부터 아름다움을 삶의 이유로 여기고 무수한 미녀들을 혼갈이 한 천수무녀였다.
격구치와 최봉만 일가의 집요한 추적과 함정에도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만 혼갈이 하는 원칙을 버리지 않았던 불굴의 미모지상주의자.
이제 37년 역사의 미스코리아 대회에 새역사가 열릴 것이다.
**
D-day 40일.
4층 간호사 탈의실 겸 휴게실.
“근데 매년 5월에 하던 대회가 왜 연기된 거야?”
“야! 미스···, 그거 말도 꺼내지 마.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면.”
오성병원에서 나름 기가 센 간호사들이 몰려 있다는 4층.
이곳도 불문률 예외 지역은 아니었다.
“난 미스···거시기는 말도 안 했는데? 이거 겁나서 살겠냐?”
“아~씨파. 욕하는 것도 아닌데 미스코리아 언급도 못 하냐? 난 솔직히 소희가 진이 되었으면 좋겠다. 잘 다듬으면···.”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병원 최고참 황간호사.
역시 연륜은 무시 못 하는 법.
“언니까지 그러는데 우린 오죽하겠어요? 천방지축 스타일이긴 했는데, 얼마 전부터는 미친 것 같아요.”
“한 소리 하세요. 위계도 없이 이게 뭔지. 암튼 개판이예요.”
황간호사를 부추기는 후배 간호사들.
“내가 말한다고 들을까? 괜히 더 큰 소란만 피우게···.”
드르륵!
“누가 소란을 피운다고?”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소희.
황간호사를 비롯한 네 명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들처럼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긴장들 풀어요. 내가 잡아 먹기라도 합니까? 사람들이 참 이상해요. 자기들이 괜히 뒷담화해 놓고서 피해자인 척하고···”
“어, 어! 그렇지.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참. 근데 여긴 왜?”
후배들에게 떠밀려서 점점 앞으로 나오는 황간호사.
학교 다닐 때 줄곧 짱 먹었던 그녀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황간호사님 언니가 세라황 맞죠?”
다 알고 온 것 같다.
어설프게 발뺌하면 안 되겠지?
“아~. 큰언니가 미스코리아 준비하는 애들에게 유명하긴 하지. 너도 알아봤구나. 근데 올해는 안 할거래.”
주저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한숨 돌리는 황간호사.
“왜···요?”
한숨이 아니라 반숨도 안 되서 바로 질문하는 소희.
“흐~읍. 성질 참 급하네. 너 작년 미스코리아 사건 몰라? 뉴스에서 엄청 때렸잖아.”
그랬다.
천수무녀가 동강에서 빠져나올 즈음에, 미스코리아의 산실이라던 소위 큰손 미용실 원장들이 구속되었다.
지망생 부모에게 뒷돈을 받거나 심사워원을 매수하는 이른바 검은 거래가 발각된 것이다.
“그래서 뭐? 쫄려서 이젠 안 한대요? 세라황도 잡혀갔어요?”
“어? 그건 아니고, 우리 언니는 기껏 지역예선에 몇 명 입상시킨 것이 전부야. 큰손은 따로 있지.”
언니가 망신살 뻗치도록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언니를 위해 서슴지 않고 거짓말로 둘러대는 황간호사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역예선? 그건 뭐예요?”
“···.”
미인대회라는 그럴싸한 타이틀에 의욕만 넘쳤을 뿐 아는 것이라곤 쥐뿔도 없는 소희, 아니 천수무녀였다.
“너 소희 맞냐? 대성인가 그놈 때문이냐?”
엉뚱한 소리만 해대는 소희가 이상해 보여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헛나온 황간호사.
아차차!
선을 넘었다고 자각한 황간호사.
조용히 바닥으로 눈을 떨궜다.
“황간호사님. 그냥 묻는 말에만 대답해 주세요.”
이건 뭐, 인질극도 아니고 너무 싸하다.
마치 대답만 잘하면 살려는 주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역예선 말이지? 모를 수도 있지.”
“그러니까 설명해 달라고요.”
다시 인질극을 벌일 듯한 소희의 표정이란.
“이러지 말고···, 내가 언니에게 말할 테니까 네가 직접 만나봐.”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언니를 팽개친 황간호사.
당장 망신당할지도 모르는 자신부터 구해야 했다.
D-day 37일.
“뭐? 올해 당장?”
어이없는 표정의 세라황.
동생의 황당한 전화를 받고는 그냥 웃어넘겼는데···.
세상 진지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 소희를 보니 웃고 넘길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무시했다가는 동생 말대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소희라고 했지? 미스코리아에 나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있을까?”
이 정도면 세라황이 최대한 깍듯하게 물어보는 것이다.
“이유요? 있죠. 공식 미인대회에서 1등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전부야? 입상해서 방송쪽으로 가고 싶다거나 돈 많은 집안에···”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무조건 1등만 하면 끝이예요.”
역시 숨 쉴 틈도 없이 대답하는 소희.
“참 특이하네. 근데 서울 예선이 다음 주야.”
“근데요?”
“이미 늦었다고.”
“다음 주라면서요.”
“···.”
“접수 마감되었나요?”
“아니, 낼 마감인데?”
지역예선 마감 하루 전에 찾아와서 미스코리아 진이 되겠다는 20대 중반의 간호사.
절대로 미스코리아가 될 상이 아니었다.
꽤 매력적인 구석이 있긴 하지만, 대회에서 추구하는 미인이라기보다는 패션모델에 가까웠다.
‘유라 말대로 진짜 미친 년인가?’
어제 동생, 황유라의 목소리가 이상하긴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동생이 조심하라는 말을 몇 번씩 되풀이했으니까.
“황간호사님이 뭐라고 했나 보죠? 너무 걱정 말고 그냥 원서나 접수해 주세요.”
평소 세라황 답지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굳이 혼걸이 해서 멘탈 털리게 할 필요는 없을 듯.
“원서 내는 건 어렵지 않아. 근데 동생 후배라니까 말해 주는 건데···.”
돈 이야기를 꺼내려는 건가?
작년에 난리가 났다면서 또?
‘그래. 짜고 치는 대회라도 일단 내가 참가만 하면 상황 종료다.’
소희는 분노에 앞서, 자신의 통장 잔고를 떠올리고 있었다.
“얼마···면?”
소희 답지 않은 소심한 목소리.
“돈? 호호호~,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돈 앞에서 수그러든 소희를 보고 방심하고 웃어 버린 세라황.
“뭐죠? 변한 게 없다는 건가요?”
갑자기 정색하는 소희.
“아! 오해하지 마. 내가 말하는 건 뒷거래가 아니라 순수하게 들어가는 돈이야.”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세라황은 재빨리 진지한 표정으로 바꿨다.
모든 게 답답한 과정이고 설명이 생략된 퀴즈 같았다.
“순수하게 들어가는 거랑 뒤로 들어가는 거랑 차이가 뭡니까?”
“···? 평소 관심이 없었나 보네. 모른다니 간단히 설명해줄게. 허영에 찌는 부모와 탐욕에 취한 원장들의 거래 말고, 정상적으로 준비하는 보통 지망생들도 돈이 꽤 들어. 헤어와 메이크업은 당연하고 피부관리, 워킹과 스피치 코칭, 필요에 따라 치아교정이나 시술까지. 그러니까 들어가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지.”
세라황은 소희를 자극하지 않게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솔직히, 지역예선 일주일 전에 부랴부랴 시작하는 경우는 여태까지 단 한 명도 없을 거야. 아무리 절세가인이라도 아무런 준비 없이 참가하면 백프로 꽝이야. 아무리 급해도 6개월은 준비해야 되거든”
‘절.세.가.인.’
기억났다.
아주 잠깐 혼갈이 했던 소희가 강한 인상을 남긴 이유.
바로 소향이었다.
소희의 얼굴에 소향이 있었다.
“알았어요.”
“그래? 오~호. 다행이네. 잘 생각했어.”
“네. 확실해졌네요.”
“그래. 솔직히 매력 있는 얼굴이긴 해. 아쉽네.”
세라황은 진심이었다.
사이코라니까, 긴장하긴 했지만 흔치 않은 매력이 보였다.
게다가 모델처럼 키도 크고 무용수처럼 선도 갖췄으니.
“무조건 참가합니다. 절세가인이 뭔지 보여 줄 때가 왔어요. 담 주에 참가지원서 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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