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 1994 (6)

“···, 우리 슈퍼모델 대회에 나갈래요?”
“지쳤다. 슈퍼고 뭐고 이제 좀 쉬자.”
지치지도 않고 슈퍼모델 타령하는 지선을 겨우 달래서 돌려보냈다.
썰렁한 방에 주저앉은 소희.
이제 뭘 해야 하나 고민하는 천수무녀.
어제 휴직한다고 했는데, 하루 만에 번복하면 이상하겠지?
기다렸다는 듯이 휴직계는 시간 날 때 제출해도 된다고 배려까지 해준 병원장.
배려를 가장한 그들의 손절을 외면할 수도 없고···.
‘가만···, 방이 너무 좁은 거 아냐?.’
새삼스럽게 자신의 원룸을 찬찬히 돌아보는 소희.
대략 10평도?
몇 개 안 되는 기본적인 가재도구도 간신히 들여놓은 방.
그나마 햇볕은 잘 들어오니 다행이었다.
소희에게 혼갈이 하자마자 미스코리아에 홀딱 빠져서 집에는 한두 번 들어 온 게 전부였다.
본선에선 20일 넘게 합숙까지 했으니 더욱 낯선 자신의 집.
‘원래 이렇게 소박한 성격인가? 아니면, 돈이 없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말고 소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옷장 쪽으로 갔다.
벌~컥!
옷장을 열어 봤다.
‘허, 이게 전부야?’
작은 옷장에 계절 구분 없이 대충 걸려있는 외투 서너 벌.
그리고 십여 벌의 티셔츠와 후드, 바지 몇 벌. 모든 옷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도였다.
혼갈이 하고 나서 그날 얼핏 눈치채긴 했다.
매력적인 얼굴에 비해 소박하다 못해 좀 털털한 옷차림.
그래! 돈이 없다면···, 돈을 벌어야지.
허락도 없이 혼갈이 했으니 허락도 없이 돈벼락을 맞게 해주마.
그런데 어떻게?
세 번째 봉인에서 풀린지 고작 1년도 안 됐다.
정확히는 9개월.
당연히 돈을 벌어본 경험은커녕 앞으로 어떻게 살지도 모르는데 무슨 돈벼락을 상상하고 있는 건가?
한참 동안 돈벼락을 내려 줄 방법을 궁리하던 끝에 내린 결론은?
“어! 나야~소희 언니. 빨리 우리 집으로 와라.”
불과 두 시간 전에 억지로 등 떠밀어 내보낸 지선에게 삐삐를 쳤다.
400년을 뛰어넘은 이 세계는 천수무녀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세계에서 혼갈이 하면 기절한 원혼의 본성이 혼합되어 일상 생활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일상에서 벗어난 특이한 상황이 오면 급격하게 백지화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시간 후.
쾅! 쾅!
“야! 초인종 있어. 왜 두드리고 지랄이야.”
띵~똥! 띵똥. 띵똥.
띵똥. 띵똥. 띵똥. 띵똥.
‘하~’
지선이도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지선을 부른 자신을 타박하며 현관을 열어주는 소희.
“결정했어? 슈퍼모델 나가기로?”
현관이 열리자마자 기대에 부푼 얼굴을 들이대며 묻는 지선.
“아냐! 들어와. 뭐라도 먹었냐? 그러고 보니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네.”
“쨘~! 내 그럴 줄 알고 이렇게 준비해 왔잖아.”
떡복이와 순대, 쫄면, 그리고 기타 잡스러운 튀김까지···.
지선은 분식집을 털어 온 듯이 한가득 들고 들어왔다.
눈치 없는 또라이는 아닌 것 같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슈퍼모델 나가자. 작년에 수상한 얘들 지금 얼마나 잘 나가는 데.”
“어딜 잘나가?”
“···.”
지선은 흙 씹는 표정으로 언니를 쳐다봤다.
“장난해? 걔들 TV 틀면 여기저기 안 나오는 데가 없어.”
“얘가 왜 정색하고 난리야. 그리고, 너 왜 반말이야?”
은근슬쩍 말을 놓는 지선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농담 말고 내일 당장 참가지원서 써~요. 응?”
“됐어! 미스코리아 하나 망친 걸로 충분해.”
“뭔 소리야? 마치 언니가 망친 것처럼 말하네.”
“어? 그게···, 누가 그랬든지 간에 대회가 망해버렸잖아.”
황급하게 흘린 말을 주워 담는 소희.
“그러니까 슈퍼모델에 나가서 다시 인정받아야지.”
지선의 집요함은 슬슬 짜증을 불러왔다.
“그만해. 꼭 TV에 나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애 같다.”
“당연하지. 이미 얼굴 팔렸는데, 인기도 얻고 돈도 벌고, 님도 보고 뽕도 따야지.”
지선의 솔직함에 슬쩍 당황한 소희.
떡볶이를 뒤적거리면서 아주 잠시 머뭇거리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말이야. 인기와 돈! 둘 중에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뭘 선택할 거냐?”
“...?”
방금 전까지 즉문즉답식으로 주절대던 지선이 입을 다물었다.
경지선. 22살.
지방전문대 졸업 후에 파트타임으로 모델을 하고 있었다.
길거리를 지나가면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시 쳐다보게 되는 늘씬한 몸매의 서구형 미인이었다.
미스코리아 나가보라는 소리를 지겹게 들었다.
하나같이 입상은 할 거라고 입을 모았지만 그간에 당선자들의 학벌이나 배경을 보면?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일 뿐 의미 없는 메아리 같았다.
그런 대도 굳이 참가하게 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돈.
가난에 찌든 집구석도 아니었는데 늘 돈에 전전긍긍하는 부모의 강박에 시달렸다.
돈과 인기 중에 선택하라고?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런데 언니의 조건이 잘못된 것 같았다.
어떻게 인기와 돈이 별개인가?
“무슨 말 하려고 밑밥을 까는 거야?”
짧고 깊은 정적을 깨는 지선의 질문.
“또 말을 놓네. 너 안 맞고 자랐냐?”
고작 5살이 아니다.
소희는 27살일지 모르지만,
천수무녀가 느끼는 나이는 무려 968살이다.
“미안해~요. 언니가 편해서 그런가? 사실은 열등감 때문에 반말을 하는 버릇이 있어요.”
“네가 열등감? 그 얼굴에 그 몸에? 뭐, 나보다는 못 하지만 그 정도면 베스트인데?”
의외의 고백에 어설픈 위로를 던지는 소희였다.
“언니? 내가 경기 선이고, 언니는 미였어요.”
“오~~오냐! 근데 본선에서는 역전이잖아.”
“본선은 무효예요.”
서로 지지 않으려는 팽팽한 자존심의 대결.
“야~! 진지한 대화가 안 될 것 같다. 까놓고 물어 볼께.”
“진작 그럴 것이지.”
드디어 뜸 들였던 본론이 나올 것 같은지, 지선은 젓가락을 힘껏 빨면서 소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돈 버는 방법이 없을까?”
“···? 얼마나?”
“벼락부자가 될 만큼.”
정적을 깨는 까마귀 소리가 들리는 듯.
“언니 정체가 뭐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정체라는 단어가 나오면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천수무녀.
소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어떻게 살았길래 그런 생각을?”
“간호사 출신, 미스코리아 진. 그게 나야.”
썰렁한 상황에서 의도된 동문서답.
“그럼 그중에 하나만 하면 되겠네요. 병원에서 돈 벌던지, 취소된 미스코리아 팔아서 돈 벌던지.”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지선은 소희를 잠깐 째려보더니 일어나서 옷을 챙기기 시작했다.
[화났냐?]
“유치한 말장난 그만 해요.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일어나려던 지선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소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벌어진 믿지 못할 상황.
소희는 한쪽 벽을 살짝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깊은 잠에 든 것처럼.
조금 전에 분명히 화났냐고 물었는데?
[믿기지 않지? 이게 내가 가진 능력이야.]
천수무녀는 결국 지선에게 혼걸이를 했다.
“흐~억! 뭐, 뭐예요? 최면술? 귀신?”
[놀라지마. 귀신도 아니고 소희도 아니다.]
“그, 그럼 누군데요?”
[호~ 이년 겁나니까 반말은 안 나오네.]
“···?”
[잘 생각해봐. 예선이나 본선에서 일어난 일 들.]
“···!”
[그렇지. 이제 이상한 것들이 좀 풀리지?]
잠시 후,
천수무녀는 다시 소희에게 돌아왔다.
지선에서 나름 차분하게 설명했으나 지선은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아니, 거의 기절한 상태였다.
그냥 과거에 신내림을 받아서 무당의 기운이 많이 남아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또다시 잠시 후,
‘아~씨발. 조졌다. 귀신 들린 것 같은데···. 여기 계속 있다가는 골로 갈 것 같은데 어쩌지?’
정신이 돌아온 지선.
하지만 의심과 두려움 가득한 상태라서 눈을 못 뜨고 있었다.
“뭔 생각하는지 다 들린다.”
남은 순대와 튀김까지 다 해치운 소희가 젓가락을 부러트리며 중얼거렸다.
‘흐-억! 저걸로 날 쑤시겠다는 건가?’
잔뜩 겁먹은 지선.
“뭐 없어? 이렇게 남의 머릿속을 들락거리는 능력으로 한방에 돈 버는 방법? 왠지 넌 알 것 같은데···.”
소희는 떨고 있는 지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쓰레기를 정리했다.
소희의 행동을 유심히 살피는 지선.
그녀의 눈에 소희의 모든 행동, 손가락 움직임까지도 지선을 움찔하게 했다.
불과 몇 분 전에 누군가 순식간에 머리 속에 들어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을 건네고 나갔다.
여긴 저 언니밖에 없는데? 근데 분명 소희는 아니라고 했잖아.
최면술? 아니면 초능력?
세상 달관한 척 남에게 무관심하게 살았지만 방금 전의 경험은 너무 섬찟했다.
정말 그런 식으로 미스코리아 예선과 본선을 손에 쥐고 흔들었던 건가?
당시엔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얼떨결에 당선되었다.
비록 본선에서는 무효가 되었지만 그래도 지선의 마음은 영원히 미스코리아 선이다.
소희 말대로 퍼즐을 맞춰보니 대충 짐작은 갔다.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무대를 내려갔던 후보자들도 똑같이 당한 게 맞다면···.
“야~! 안 잡아 먹어. 그만 떨고 말 좀 해봐.”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소희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곁에 앉았다.
“아~이. 씨-. 쓰레기 만진 손으로 머리를 만지면 어떡해!”
벌벌 떨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욱해버린 지선.
금세 소희의 눈치를 보고 엉덩이를 뒤로 내뺐다.
“참-내! 더러운 거 만진 손도 아닌데, 유난스럽네.”
“그래도 싫어~요. 다신 그러지 마~요.”
“야! 무슨 말이 그러냐? 존대하려면 제대로 해. 콱~! 주둥이를!”
겁먹은 지선을 풀어 주려고 최대한 귀엽게, 장난치듯이 말했지만, 지선은 기겁해서 창문 밖으로 도망칠 자세였다.
“오버하지 말고 앉아라. 너도 돈 필요하잖아?”
좀 이상하지만, 소희의 형편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선의 형편은 자세히 알고 있었다.
예선에서 얼떨결에 선에 당선된 직후부터 줄곧 소희를 따라다녔고, 합숙 기간 동안에도 같은 방에서 지냈기 때문이었다.
“돈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딨어요?”
잔뜩 긴장했던 지선이었지만 돈소리에 스멀스멀 기어서 소희 앞으로 왔다.
조금 전의 섬뜩했던 상황도 돈 앞에서는 별거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그렇지! 돈으로 얼굴 갈고 애들이 수두룩했으니.”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그게 좀 애매해. 읽을 수는 있는데 그리 간단하지는 않아.”
소희의 애매한 대답에 지선은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뭐냐? 그 표정?”
“상대의 생각을 읽으면 쉽게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널렸거든요.”
어느새 지선은 적극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좀 전에 겪은 신비한, 아니 무서운 경험을 잊은 듯이.
“뭔데?”
“날 샜어요. 그런 애매한 능력으로는 잘못되면 좆되요.”
“···! 말 좀 가려라.”
지선이 말한 돈벌이는 다양했다.
5살이나 어린 동생이지만 이 세계 경험이 고작 9개월에 불과한 천수무녀에 비하면 거의 도사급이었다.
어려서부터 겪은 밑바닥 경험 때문인지 돈에 대한 정보도 빠삭했다.
암튼, 빠삭한 지선이 입에서 나온 것들은 대부분 도박이었다.
해외 카지노, 사설 도박판, 내기바둑···.
정식 포커대회도 있다지만 자주 열리는 것이 아니고 참가 자격도 까다롭다고.
도박이야 예전 세계에도 있었고 그곳에 돈이 많이 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박 방식이 전혀 달라서 선뜻 내키지 않았다.
상대의 패를 읽으려면 여러 번 혼갈이 해야하고, 더구나 상대가 여러 명이면 그 과정이 너무 복잡해진다.
상대가 아예 판을 포기하게 할 수도 있지만 지선의 말대로 작은 실수로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혼갈이 유효기간이 37년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지 모든 것이 부쩍 조심스러워졌다.
동강에서 풀려났을 때만 해도 남은 기간 동만 막 살 거라고 다짐했는데.
지선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혼갈이가 별거 아닌 능력같이 느껴졌다.
상대의 과거도, 현재도 파악하지 못하는 반쪽짜리에 불과한 느낌?
그 옛날엔 혼갈이를 안해도 자기들끼리 의심하고 서로 죽이는 살벌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400년의 세월을 건너뛴 이 세계는 돈 때문에 의심하고 죽이는 일은 다반사지만 남의 혼은 관심도 없었다.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돈이면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요.”
세상 물정 모르는 언니를 가르치듯이 말하는 지선.
“모든 걸?”
“사랑도, 결혼도, 죽음도, 심지어 운명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라는 듯이 덤덤하게 말하는 지선.
“돈으로 운명까지 바꾼다고?”
“돈벼락 맞게 해준다면 죽은 사람도 깨어날걸요?”
콩떡같이 말하면 찰떡같이 받아들일 줄 알았지만, 소희는 생각은 다른 길에 있었다.
“운명까지···? 아, 맞아! 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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