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 1994 (7)

돈벼락이 죽은 사람도 깨울 수 있다는 지선의 말에 자연스럽게 일순이 떠올랐다.
“그래. 일순이라면 뭔가 있을거야.”
그러고 보니 유아독종, 나일순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19살에 맨홀에 빠져 요절한 천재가 42살의 아줌마로 사는 게 그리 만만치는 않을 텐데···.
“일수? 일수놀이까지 생각한 거예요?.”
혼자 중얼거리는 언니를 추궁하는 지선.
“···.”
“그래. 그거 언니랑 딱 어울리네. 혼을 겁박해서 탈탈 털어버리는 전설의 일수꾼. 미스코리아가 일수놀이 한다면 꽤 관심을 끌겠네요.”
물 만난 고기처럼 쉼 없이 주절대는 지선.
소희는 지선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성우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직도 선명했다.
귀티가 흐르는 깨끗하고 우아한 얼굴.
근데 좀 난감해질 것 같았다.
우희는 40대인데, 만나서 일순에게 하는 것처럼 반말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렇고.
그나저나 성우희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월섬그룹?
아니면 최대만의 집으로?
이혼소송 중에도 같이 살고 있으려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무수한 매체의 인터뷰를 뿌리치고 일찌감치 퇴원해 버린 성우희.
어디에 있는지 알기만 하면 돈은 해결된다.
“언니~! 우리 그냥 슈퍼모델대회에 나가자. 1등 상금이 천오백이래.”
시들지 않고 다시 피어나는 지선의 집요함.
“그깟 푼돈 뭐하게?”
“푼돈? 그게 푼돈이야? 그럼 도대체 얼마를?”
별안간 소희의 스케일이 궁금해진 지선은 바짝 다가와서 앉았다.
“얼마인지는 나도 모르겠고, 너 혹시 성우희라고 알아? 월섬그룹 회장 부인이라던데.”
“알지. 돈에 관심 있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재산분할만 최소 100억이 넘을 거라고 하던데. 사람들은 대박녀라고 하는데 자세한 스토리를 알면 좀 불쌍해.”
“자세한 스토리? 넌 어떻게 알아?”
“여성코리아 3월호에 자세하게 실렸어.”
“···?”
지선이 각 잡고 썰을 푼 성우희 스토리는 이렇다.
아버지 성진택.
현 7선의원 (전 국회의장)
어머니 계연숙.
우희가 중학생 때 교통사고로 사망.
한때 대권을 꿈꿨던 아버지와 일찍 세상을 뜬 어머니는 15살 이후 곁에 없었다.
월섬가의 큰며느리가 되는 30살까지 15년간을 거의 혼자 살다시피 했다.
잊을만 하면 떠들썩한 스캔들이 터지는 남편 최대만.
결혼 기간은 12년이었지만 사랑도, 자녀도 없는 재벌가 부부였다.
재벌가의 그 흔한 쇼윈도우 부부 조차도 되지 못하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저분한 스캔들을 수습했던, 인내심 쩌는 재벌가의 며느리로 알려진 그녀가 별안간 이혼소송을 걸었다.
그녀의 인내심을 꺽어 버린 사건은 바로, 최대만의 내연녀와 혼외자.
그것도 무려 3명이나.
“뭐가 불쌍하다는 거냐?”
불쑥 끼어들어 지선의 장황한 썰을 끊어버린 소희.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잖아.”
“국회의원 아빠는 살아 있잖아.”
“있으면 뭐 해? 남보다 못한 놈인데”
“남편이 부자잖아.”
“재벌이면 뭐해? 개망나니인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소희의 표정.
유명한 정치인 아버지와 굴지의 재벌 남편이 있는데 엄마가 안 계시고 사랑이 없어서 불쌍하다니.
“네 말대로라면 이 세계에는 불쌍한 사람밖에 없겠다.”
“맞아요. 불쌍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죠. 사람들은 태어난 자체가 불쌍한 거예요. 특히 이 나라에서는 더욱더.”
갑자기 진지해진 지선.
자신의 개똥 같은 발언에 살짝 도취한 듯한 표정이었다.
“알았다. 불쌍한 년아!”
***
며칠 후.
소희의 집.
쾅! 쾅! 쾅! 쾅!
“언니! 나~야. 문 열어.”
저년이 또 지랄이다.
초인종은 눈에 안 보이는지.
“나간다. 초인종···.”
띵!~똥! 띵똥. 띵똥. 띵똥. 띵똥.
문을 반쯤 열었는데 이제야 초인종을 빠갤 듯이 누르는 지선.
째려보는 소희는 본체만체하고 화장실로 달렸다.
만두랑 찐빵을 가득 넣은 봉지를 건네면서.
“언니 가족들은 안 와? 내가 안 챙기면 굶어 죽을 것 같네.”
화장실을 나오면서 싱크대를 힐끗 쳐다보는 지선.
맞다.
지선이 거의 매일 들락거리는 덕분에 별도로 음식을 챙겨 먹지 않았다.
냉장고는 열어 봤었나?
“가족이 여기 왜 오냐. 지금 한창 바쁠 텐데. 그리고 내놓은 딸이라 관심도 없어.”
소희 부모님은 지리산 기슭에서 버섯재배로 근근이 살고 있고 남동생은 직업군인이다.
수년째 연락도 없는 무늬만 가족관계인 게 확실했다.
공중파의 모든 방송에 딸이 등장했으니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은 알린 셈이었다.
“알아냈어. 성우희 여사님이 계신 곳.”
“여.사.님?”
갑작스러운 존칭에 살짝 당황한 소희.
“어디 아프냐? 여사님은 얼어 죽을.”
“어~허! 언니도 그러면 못써요. 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 소송을 했다고 해도 예의는···”
소희는 지선이 그녀를 존중하는 건지 돌려 까는 건지 헷갈렸다.
“알았어. 그 여사, 아니 마님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대?”
“그전에 우선 약속 하나 해줘야죠?”
야려 보는 듯이 실눈으로 쳐다보는 지선.
저 눈빛은 뭔가 흥정의 물꼬를 트려는 신호다.
“약속?”
“언니가 어리바리해서 도와주는 거지만, 그래도 마냥 향단이 노릇만 할 순 없죠.”
“네가 향단이를 어떻게 알아?”
“···”
난데없는 향단이 드립에 지선은 잠시 폭주했다.
암튼 간에,
지선이 약속해 달라고 한 것은 단순했다.
성우희를 만나서 뭘 하든 간에 자기를 빼지 말라는 것.
그건 소희, 천수무녀에게는 오히려 반가운 요구였다.
그럼, 지선의 속마음은?
소희를 믿고 따른 후에 벌어진 일들이 놀라움을 넘어 신기했다.
앞뒤 설명도 없이 재벌가 며느리를 거처를 수배하는 그녀의 엉뚱함에 과감하게 베팅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슈퍼모델은 물 건너 갔으니까.
“오케이. 접수했어! 우희 마님 어디에 있대?”
흔쾌히 승낙하는 소희.
“그럼 나중에 모른 체 하기 없기예요.”
“알았어. 절대로 없을거야. 아니지, 지금 당장 우희가 있는 곳으로 가자.”
소희는 지선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일어나 집을 나섰다.
“근데 성우희씨와 아는 사이예요?”
얼떨결에 소희를 따라나서는 지선.
궁금함을 못 참고 한마디 던져본다.
“아는 사이가 뭐야? 영혼의 조력자지.”
“영혼의 조력자? 그게 뭔데요?”
지선의 궁금증은 질문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게···, 그런 게 있어. 나중에 말해 줄게.”
“그렇게 나오면 서운한 향단이가 될 거 같은데?”
지선은 진심으로 심통이 난 표정이었다.
“알았다. 대신 추가 질문은 금지다. 성우희씨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건 뉴스에서 봤지? 그거 내가 도와준 거야. 그러니까 내가 생명의 은인이지.”
“생명의 은인이요?”
소희는 지선의 끝없는 질문을 무시한 채 택시를 잡았다.
“주소 불러 드려.”
“예? 아~! 도곡동 스카이비스타로 가주세요.”
성우희는 퇴원 후 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입주민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는 공권력과도 대치한다는 스카이비스타.
그녀의 아버지, 성의원이 꽤 오래전에 입주한 곳이었다.
스카이비스타 경비소 앞에 도착한 택시.
택시가 멈추기 전부터 두 명의 경비원의 시선이 따라붙고 있었다.
“여기는 사유지입니다. 입주민이 아니시면 그냥 지나가세요.”
건장한 경비원들의 협박 같은 경고.
목소리도 위압적이었다.
잔뜩 쫄아서 소희의 팔을 꽉 붙잡고 시선을 회피하는 지선.
팔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허-헐!
이놈들 봐라. 누군지 확인도 안하고 일단 겁부터 주는 건가?
“아이~고! 사유지군요. 몰랐습니다~요.”
능글맞은 말투가 거슬렸는지 소희를 노려보는 경비원 한 놈.
곧바로 혼갈이 작업 완료.
지선은 살짝 휘청거리는 소희를 붙잡고 얼른 경비소를 벗어나려 했다.
“어이! 잠깐만요. 성우희씨 만나러 온 거 아니예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소희를 노려보던 경비원이 소희와 지선을 불러세웠다.
“김대리! 성의원님 댁에 인터폰 넣어서 손님 오셨다고 전해. 방문객 성함은 천설하!”
잠시 후.
스카이비스타 정문이 열렸고,
천설하를 언급했던 경호원은 풀썩 주저앉았다.
일부러 혼을 덜 깨우고 빠져나왔으니 당연히 맥을 못 출 수밖에.
단독세대로 전망 좋은 언덕에 30채가 들어선 스카이비스타.
그중에서도 맨 앞쪽 3층 건물이 성의원의 집이었다.
띵~똥!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누군가 뛰어나왔다.
반쯤 열린 문을 활짝 열고 소희를 껴안으려고 팔을 활짝 펼친 성우희.
“어? 뭐야? 설하가 아니잖아! 넌 누구냐?”
“나야, 나.”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소희.
“누군데?”
“아이~참! 내가 계속 설하겠어? 일순? 이제 알겠지?”
“···?”
재벌 며느리가 되더니 머리가 둔해졌나?
아니면 그동안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분명히 안정적으로 혼갈이 하고 확인까지 했는데.
소희를 천천히 훑어보는 우희.
“야! 알고 있으니까 반말하지 마. 이상하잖아. 여기 우리 말고 듣는 사람들 많아.”
웃는 얼굴로 슬며시 다가와서 귓속말로 속삭이는 우희.
모를 리가 없었다.
공중파 방송, 그것도 9시 뉴스에 나온 도발적인 여자.
단박에 그녀가 천수무녀임을 알아챘을 뿐만 아니라, 오성병원 7층 간호사였다는 것도 기억해냈다.
괜히 장난치고 싶은 맘에 모르는 척했는데 옆에 웬 여자가?
“자~! 어서 들어오세요. 오랜만에 소희 동생을 만나니 반갑네. 호호!”
“아! 예. 근데 오랜만인가~요?”
소희와 지선을 집안으로 안내하는 우희는 뒤따라 들어오는 지선을 흘낏 쳐다보았다.
“야~! 쟤는 뭐야? 아! 미스코리아 선이구나. 똘마니. 쟤도 네 정체 알아?”
우희는 소희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다시 귓속말을 이어갔다.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대신하는 소희.
지선은 혼갈이를 고작 신종 최면술 따위로 알고 있을 테니.
지선은 우희와 소희의 속닥거리는 소리는 관심 없었다.
지선의 시선을 뺏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희가 걸친 모든 것들.
옷, 신발, 시계, 팔찌, 목걸이···.
아니 그러겠는가?
우희의 행색은 맨홀에 빠져 죽은 일선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티나는, 말 그대로 재벌가 며느리였다.
거실에 들어선 세 사람.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내부는 평범했다.
거실에는 화려한 장식장이나 비쌀듯한 그림도 없이 덩그렇게 놓인 작은 소파와 대형 TV가 전부였다.
아주머니가 내어 온 커피를 마시면서도 계속 눈빛을 교환하는 우희와 소희.
“그러고 보니 두 분 이름이 비슷하네요? 혹시 친척인가요?”
“아~하! 그러네. 친척은 아닌데 친척보다 더 친한 사이죠.”
“그렇겠네요. 영혼의 조력자니까.”
“예? 그게 무슨?”
당황한 눈으로 소희를 쳐다보는 우희.
소희는 눈을 살짝 감으며 시선을 피했다.
“언니가 그러던데요?”
“그래요? 그게 무슨 뜻이래요?”
“뭐. 영혼이 통할 만큼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사이?”
“오~호! 정말 탁월한 비유네요. 맞아요. 우린 그런 사이에요.”
지선이 화장실에 간 사이.
“야! 네 정체도 모르는 애를 여기 데리고 오면 어떡해. 기껏 혼갈이 했는데 탄로 나면 말짱 도루묵이잖아! 여기 사람들 아버지 때문에 눈치 백단이야.”
우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걱정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데리고 왔겠냐? 조만간 쟤도 알게 될 거야. 근데 엄청나네. 와~! 시계랑 목걸이 봐라. 어마어마하네.”
우희의 팔목을 들어 가까이 들여다보는 소희
“흠,흠. 뭐 이 정도 가지고, 갖고 싶으면 말해. 얼마든지 줄 테니까.”
“그래? 그거 팔면 얼마나 되냐?”
“돈이 궁한 거냐? 아니면 사람들의 관심이 궁한 거냐?”
우희는 목걸이와 시계를 풀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뭔소리야?”
“야. 지금 대한민국에 나보다 더 유명한 여자가 너야. 쪽팔리게 혼갈이로 미스코리아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소희의 손을 펼쳐서 목걸이와 시계를 건네주는 우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희를 쳐다보았다.
“야! 구걸하러 온 거 아니야. 이건, 주니깐 일단 고맙게 받겠다만 다시는 이러지 마라.”
화장실을 바라보며 잽싸게 주머니에 쑤셔 넣는 소희.
“그러지 말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라. 그 대단한 능력을 왜 그렇게 하찮은데 낭비하고 있냐?”
“선한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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