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 1994 (8)

“선한 영향력?”
“그래. 천년이나 살면서 뭣도 아닌 놈들 피해 다니지만 말고, 아예 작살을 내버릴 생각이 아니면 남은 세월 동안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기는 게 좋지 않겠어?”
“···.”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진지해지는 소희.
우희의 돌직구에 생각이 많아지려고 하는데···.
“언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화장실에 있는 줄 알았던 지선이 2층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너, 화장실에 있는 거 아니었어?”
진지한 생각들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언니와 여사님이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하길래 잠깐 집구경 좀 했지. 괜찮죠? 여사님?”
“아, 네. 말했으면 내가 안내했을 텐데.”
소희보다 더 당황한 듯한 우희의 표정이란.
“야~. 어쩔 건데? 이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니면 안 돼.”
우희는 소희에게 바싹 붙어서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기요. 여사님. 다 들려요. 제가 눈칫밥을 오래 먹어서 귀가 밝아요.”
화낼 줄 알았는데 오히려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어? 들었어요? 오해하지 말아요. 얘가 전부터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녀서 괜히 지선씨가 피해입을까 걱정되서 그런 거예요. 표현이 좀 이상했지만 지선씨 탓하는 게 아닙니다.”
지선이는 눈치가 더럽게 빠르지만, 일선은 머리는 그보다 더 빠르다.
우희의 순발력에 입이 떡 벌어진 소희와 다시 밝아진 표정의 지선.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2층에도 방이 많네요?”
다 식은 커피를 마시던 지선이 무심한 듯 중얼거렸다.
응큼한 눈빛을 커피잔으로 가렸지만 소희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한강 전망의 최상급 타운하우스에서도 제일 좋은 위치다.
실거래가는 말해서 뭐 하겠냐?
지하 1층에 지상 3층.
엘리베이터도 있다.
이런 집에 당연히 방이 많겠지.
“많죠. 비어 있는 방도 있어요. 아버님도 거의 안 오시니까 집이 썰렁해요.”
머리도 좋고 순발력도 탁월하지만 가끔씩 눈치가 느린 일순.
덕분에 우희는 지선의 작전에 말려들고 있었다.
“그러게요. 우리 여사님 안 그래도 힘드실 텐데 혼자 계시면 외롭겠어요. 일하시는 분들도 살가운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노골적으로 미끼를 던지는 지선.
그제야 우희도 눈치챈 듯했다.
“아! 2층에 방 하나 비어 있긴 한데 황비서관님이 가끔씩 일을 보기도 해요. 그래서 쌓여있는 서류가 굉~장히 많아요.”
“···?”
어림도 없다는 뉘앙스가 다분한 우희의 대답에 작전 실패를 감지 한 지선.
결투에서 패한 검객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화장실로 갔다.
“쟤는 또 화장실에 가네. 근데 갑자기 무슨 일로 온 거야?”
우희는 똘끼 넘치는 지선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화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일순, 아니 성우희 여사에게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욱하는 성질을 못 참고 미스코리아 대회에 참가한 것부터 병원도 휴직했는데, 이제 뭘 할지 모르겠다는 하소연까지.
그 와중에 초라한 원룸은 탈출하고 싶고.
“미쳤네. 이제 고작 36년 남았을 텐데 미인대회에서 혼갈이 쑈나 하고 다니고, 그리고 병원에 가면 뭐 할 줄 아는 게 있냐? 그만둔 건 잘했어.”
“이~씨. 말이 너무 심한 거 같은데?”
틀린 구석은 없지만, 일순이 아니라 우아한 성우희의 입에서 노골적인 비판이 튀어나오니 타격감이 폭탄급이었다.
근데, 일순은 내 남은 기간까지 계산하고 있었네?
“나한테 도움을 달라고 온 거 아냐?”
“됐다. 내가 너 없다고 굶어 죽겠냐?”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소심하게 반발하는 소희.
“그래. 남은 세월 저~기 변두리에서 점이나 봐주고 살아라. 점은 볼 줄 아냐? 설마 혼갈이만 할 줄 아는 건 아니지?”
매몰차게 약점을 찌르는 괘씸한 년!
그래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을 거라 확신하기에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
수능시험 당일, 일순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다.
머리는 차갑지만 가슴은 따듯한 년이라는 걸.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의리녀였다.
“돈은 얼마든지 그냥 줄게. 네게 아까운 게 있겠냐?”
역시 기대했던 대로 일순은 의리의 결정체였다.
“돈 말고 그냥 여기 같이 살게 해주세요. 어차피 언니도 집 구할 돈이 필요한 거잖아. 뭐 하러 귀찮게 주고받고 해요?”
느닷없이 낑겨들어오는 지선의 목소리.
어느새 회장실을 나와 주방에서 냉장고를 열어보고 있는 지선.
우희와 소희는 그런 지선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쥐도 새도 모르게 지선에게 혼갈이 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소희를 힐끗 쳐다보는 우희.
“걱정마세요. 저는 저예요. 소희 언니가 아주 거시기한 술수를 부리는 거? 저도 알고 있어요. 말했죠? 눈치 빠르다고.”
말릴 수도 없고, 예측하기도 힘든 지선의 오지랖은 소희의 그것과는 달랐다.
꼭 필요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오지랖일 뿐 뻔뻔한 지선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 그래. 그럼 수근거릴 필요도 없겠네.”
“예. 그냥 여사님은 방 하나 내어주고 소송은 언니한테 맡기면 돼요. 변호사들만 믿지 말고요. 의원님이나 비서관이 오시면 알아서 피할게요.”
자기 마음 가는 대로 간단하게 정리한 지선.
놀랍다.
이건 눈치밥에서 나온 짬밥이 아니라, 흥정에 통달한 달인이 면모였다.
“맞아. 소송이 길어질 것 같아. 실력 있다는 로펌을 추천받았는데 저쪽도 만만치 않아. 성공 보수를 높게 걸었지만 결연하게 일하는 것 같지도 않고.”
“여사니~임? 일단 방 하나 약속만 하면 제가 최고의 해결사를 연결해 드릴게요. 미스코리아 대회도 한방에 작살내는 그분!”
크-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는 우희와 멋쩍은 표정의 소희.
어쩌면···?
내가 쟤를 미스코리아 선으로 만든 게 아니라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 내 능력을 간파하고 눈치작전으로 곁에 붙어서 픽업 된 건 아닐까?
소희는 갑자기 팔뚝에 닭살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당분간 같이 살자. 소희 동생이니 나도 편하게 말할게.”
어느새 지선을 향한 경계심을 풀고 우아하게 미소 짓는 우희.
시건방진 일순의 모습이 살짝살짝 나오긴 했지만, 소희에겐 재벌 며느리가 매우 낯설었다.
“그럼. 구두계약은 끝난 것으로 하시고, 이제 뭘 해결해 드릴까요?”
어느새 소희와 우희 사이로 엉덩이를 들이밀고 들어와 앉은 지선이 물었다.
“일단, 내일 변호사들을 만나보자. 아무리 유아독종이라고 해도 쉽지 않더라고. 워낙에 전문 분야이기도 하고.”
“여사님? 유아독종이 아니라 유아독존이예요. 배우신 분이 왜 이러실까? 프~훗!”
“···?”
**
그날 저녁.
“어? 여사님은 매끼 이렇게 드세요? 이건 절간보다 심각한 그린벨트네요.”
저녁 메뉴에 실망한 지선이 주둥이에서 나오는 대로 주절거렸다.
소희의 눈에도 저녁 찬거리는 의외였다.
소박하다 못해 영양실조가 걱정되는 수준이었으니.
“내가 원래 채식주의자였나 봐. 깨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삼겹살이었는데, 아줌마가 믿지를 않네.”
“예? 여사님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기적은 뉴스에서 보긴 했는데, 그럼 식성이 바뀐 거예요? 혹시 고기 못 먹어서 환장한 귀신이 들어간 건가?”
환장하겠다.
저게 뭘 알고 저러는지, 그냥 생각없이 주절대는 건지···.
저녁을 함께 먹으며 우희가 들려준, 재산분할 소송은 예상보다 상황이 안 좋았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에 아버지, 성의원이 추천한 로펌으로 바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망스러웠다.
첫 미팅에 부장판사 출신이라는 변호사를 비롯, 6명이나 나왔길래 신경 써주나 싶었는데 두 번째 미팅에 갔을 땐 그는 이직하고 없었다.
그 후에 몇 번 더 미팅했는데, 그때마다 변호사들이 물갈이되더니 최근에 만났을 땐 전부 새로운 얼굴이었다.
상대 쪽 최대만이 내세운 초대형 로펌의 라인업을 보고 일찌감치 계산기를 두드리고 적당 선에서 합의 할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승소 가능성이 별로 없거나 분할금이 시시할 거라고 판단한 건지, 중량감 있는 파트너는 한두 명씩 발을 뺐다.
그 와중에 최대만은 전직 검사장급의 변호사도 끌어와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유리한 상황이라면 굳이?”
나물 일색의 반찬과 밥을 냉면 그릇에 때려 넣은 지선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렇지. 뭔가 약점이 있는 거지.”
“마구 몰아쳐서 싹을 밟으려는 작전이죠. 근데 고추장과 참기름은 어디 있어요?”
이미 냉장고와 싱크대를 뒤지고 있는 지선.
누가 봐도 이 집 주인 같은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왠일로 소희는 잠자코 우희와 지선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이유는 자신이 바빠질 것 같은 불길함 때문.
우희와 지선이 뭐라고 하든 결론은 한가지였다.
적진에 뛰어 들어가 혼갈이로 약점을 알아내라는 것.
그리고,
우희가 아직 지선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지 않아서 말은 아꼈지만, 소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일순의 입장에선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우희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하는데, 소송이 시작된 시점의 정황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뉴스나 언론에서 다루는 그저 그런 가쉽성 정보는 거의 대부분 사실과 달랐다.
재벌가의 맏며느리로서, 7선 의원의 외동딸로서 그간에 겪은 진실들은 아주 깊숙히 숨겨져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대충이라도 감이 오는 거 없어요? 로비 장부나 횡령, 분식회계, 그것도 아니면··· 페이퍼컴퍼니나 해외 차명계좌 같은 거요.”
맛깔스럽게 비벼진 비빔밥을 크게 한술 들면서 웅얼거리는 지선.
주둥이에 밥이 한가득 들어 있는지라 발음이 이상하긴 했지만, 뉴스에서 자주 들어 본 용어가 툭툭 튀어나왔다.
뭘 알고 떠드는 건지 그냥 주워들은 걸 아무렇게나 주절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볼이 터질 듯이 쑤셔 넣은 비빔밥을 음미하는 지선.
살포시 눈을 감은 얼굴에 만족감이 넘쳐흘렀다.
말해 뭐해?
슬그머니 지선의 비빔밥에 접근하는 두 개의 숟가락.
타닥-툭!
“동작 그만! 점잖은 분들이 왜 이러셔? 꼭 이렇다니까. 먹을 만하다 싶으면 숟가락을 얹는 분들이 있어요. 특히 많이 가진 분들이.”
“···.”
툭!
푹!
지선의 숟가락을 노련하게 제치고 한 술 듬뿍 입에 넣은 우희.
그래! 저게 일순의 모습이다.
“생각보다 예리하네. 네 말대로 월섬그룹에 숟가락 얹은 놈들이 꽤 많아. 내가 아는 정치인만 해도 손가락이 부족하지. 로비 장부가 있는 게 확실해.”
“그럼 소희 언니가 그 괴상한 최면술로 장부를 찾아오면 되잖아요. 뭐 이거 싱겁게 끝나겠는데요?”
‘괴상한 최면술?’
황금고리 월식의 기운을 받아 천수를 누리는 천수무녀의 신성한 혼갈이 능력을 최면술이라니?
소희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렇다.
지선은 천수무녀에게 잠깐 혼걸이 당했지만 아직도 자신이 잠시잠깐 최면에 걸린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최면술만이 자신이 겪은 황당하고 살짝 섬뜩한 경험이 조금이라도 이해되기 때문에.
다만, TV에 가끔 나오는 최면을 위한 준비 과정 따위는 건너뛰고 단박에 자신의 머리에 들어와 이야기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억지로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 아닌지라 지선은 소희의 괴상한 능력을 그냥 인정해 버리기로 했다.
“진작에 생각했던 방법이다. 그래서 소희를 찾아볼까 생각도 했었고.”
당연히 그랬었다.
우희가 누군가? 역대급 천재소녀 유아독종 나일순이 혼갈이 해서 들어간 재벌 며느리다.
싸이코 같은 미스코리아보다 몇 수는 더 내다볼 수 있는 머리였다.
그런 그녀가 소희, 즉 천수무녀에게 부탁해서 로비장부를 빼내 올 생각을 못 했을까?
혼수상태가 아니라도 혼갈이 된 사람의 기억을 가져올 수는 없다.
그러기에 자칫 어설프게 행동하거나 생각 없이 말하게 되면 의심받기 마련이었다.
다행이도, 혼수상태에 빠졌던 우희를 혼갈이 한지라 그녀가 기억을 못하거나 예전과 다른 행동을 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고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희가 마음을 다치지 않을까 조심하는 눈치였다.
로비 장부?
우희에게 로비 장부의 존재를 확인시켜준 사람은 다른 아닌 아버지, 성진택 의원이었다.
현역 7선 의원이 굴지의 재벌이 십수 년간 은밀하게, 때론 노골적으로 뿌려온 금품을 모를 리가 없었다.
정계에서 돌아다니는 소문으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성의원 자신도 로비의 대상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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