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 1994 (9)

성진택 의원.
한때 집권 여당의 대선 후보로 부상했었다.
비록 당내 경선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꽤 오랫동안 잠룡으로 불렸다.
정권이 넘어가고 이젠 야권의 잠룡이 아니라 잡룡이 되버린 신세지만 아직도 현역 최다선 의원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의 정치 이력이 이 정도 인데 로비가 없었을까?
모르긴 해도 월섬그룹의 장부엔 단골로 등장했을 게 뻔했다.
"로비장부. 그게 도움이 된다면 찾아봐라."
어느 날, 적당히 취해서 들어온 성의원은 거실을 지나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희가 듣던 지 말던 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로비장부를 찾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도움이 된다면 찾으라고?
우희는 묻지 않았다.
성의원의 말투는 모든 걸 포기하고 부러진 검을 내려놓는 노쇠한 검객의 느낌이었다.
궁금하다고 준비 안 된 질문을 쏟아내며 재촉하는 부녀관계도 아닌 듯 했고.
로비장부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수족으로 충성을 다하고 있는 황철민.
그는 성진택에게 아들보다 더 아들 같은 존재였다.
뭐, 아들이 없었으니 그럴 만도.
"비서관님. 월섬과 아버님은 무슨 관계죠?"
황비서관이 서류를 정리하러 집에 왔을 때, 무심한 듯 그냥 지나치는 말처럼 물었다.
이게 웬걸?
황비서관은 마치 검찰조사를 위해 미리 준비한 것처럼 술술 읊어대기 시작했다.
우희가 이미 눈치 챘다고 생각한 건가?
아무리 딸이라고 해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불과 석 달밖에 안된 사람에게 성의원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말해 주는 것은 의외였다.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너무 정확했다.
8년 전, 국회의장이 되었을 때부터 월섬은 본격적으로 그리고, 끈질기게 접촉을 해왔다.
국회의장이 되기 위해 세를 불리던 중에 상당수 의원들이 이미 월섬의 손아귀에 있음을 간파한 황비서관은 최악의 결과를 피하면서 국회의장이 되기 위한 시나리오를 보고 했고, 성의원은 과감하게 자충수를 선택했다.
검은 속내를 알면서도 맞잡은 추악한 거래.
일부는 쪼개기 정치기부금으로, 일부는 지역구 자선비용으로, 그래도 남으면 지금 살고 있는 집처럼 차명으로 부동산을 위장 매입했다.
모두 두말 할 것 없는 범법 행위지만, 도의적으로 면피할 쥐구멍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 황비서관의 변명이었다.
"도의적이라뇨?"
황비서관의 시나리오는 검찰에 발각되는 정도에 따라 꺼내 놓을 단계적 대응방안이었다. 말이 좋아 시나리오고 대응방안이지 전부 구차한 변명이고 감정에 호소하는 비겁한 수작이었다.
정치기부금 쪼개기는 담당자의 회계처리 실수로, 잔뜩 부풀려진 자선비용은 선의의 착오로, 차명 부동산은 전부 공익재단의 소유로 돌려놓았다.
이 정도면 탈법이지 중범죄는 아니라는 정서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정치인은 법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표가 무서운 법.
여태껏 황비서관의 시나리오는 꺼내 쓸 일이 생기지 않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우희가 필요하다면 양날의 칼을 꺼낼 수밖에.
"전부 얼마나 받았어요?"
"···그게 워낙 오랜 기간이라서."
"비서관님 성격이라면 꼼꼼하게 기록했을 텐데요?"
"대략 5개 정도?"
5억.
푼돈이다.
우희가 최대만 회장에게 요구한 재산분할 규모는 천억이었다.
우희가 아닌, 일순의 입장에선 로비장부가 꽤 탐나긴 했다.
부정한 거래를 했으면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 마땅하지···만, 지금 자신은 누가 봐 성진택 의원의 딸이었다.
고작 몇 억 때문에 아버지의 30년 정치 이력을 구정물에 처박을 수는 없는 노릇.
남편과 소송하고 아버지의 구린 과거 들춰서 막대한 돈을 손에 쥔 독한 년으로 낙인찍히긴 싫었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로비장부를 손에 넣어도 일방적인 협박 수단일 뿐 확실한 협상 카드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상대가 월섬이라면 이미 예상 가능한 약점이기 때문에.
"월섬에서 아버님 말고 공들인 인물이 또 있나요? 거물급으로."
"글세···, 아마 모르긴 해도 최고 권력도 엮여있을걸?"
"예? 그 정도예요?"
"의원님도 대권후보였어."
황비서관이 나름의 증거와 다양한 첩보를 바탕으로 추정한 인물 중에서 파급력이 큰 인물은 두 명.
전직 대통령 이대산과 현 검찰총장 구학성.
이미 10년전 퇴임한 이대산은 월섬과의 결탁설이 무성했던 인물.
대선후보 토론에서도 상대편 후보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지만 능구렁이 같이 빠져나갔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그럴싸한 당위성이 받쳐주는 신기에 가까운 말발이었다.
그렇다. 그는 국민이나 국가에 대한 진정성은 개뿔, 화려한 언변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놈이었다.
구학성.
현 검찰총장.
월섬그룹 장학 프로그램인 봉만 인재상을 수상하고 고3부터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검사가 되고나서 최대만 회장의 외사촌과 결혼했으나 3년 만에 결별.
이혼 당시 막대한 재산을 분할 받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부인에게 별다른 재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큰 키에 사마귀를 연상케 하는 특이한 외모로 살벌한 검사의 이미지를 구축한 놈이었다.
우희는 두 가지 노림수를 가지고 거물급에 대한 운을 띄워 본 것이다.
로비장부 따위는 진실여부를 가리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회유와 조작이 비집고 들어 올수 있기 때문에 한방에 조질 수 있는 파급력이 큰 커넥션을 찾고자 함이 첫 번째.
만일, 월섬 측에서 아버지 성의원의 비리로 언론전을 펼 경우 그에 걸맞는 연막탄 몇 개는 확보하려는 계산이 두 번째 노림수였다.
둘 중 누구도, 노림수 중 어느 하나도 구체적인 증거도 없고 단순히 헛물켜는 짓이 될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뭐가 나올지 모르는 가마니를 여기저기 쑤셔보는 수밖에.
털면 다 나오기 마련이다.
쌀이 든 먼지 든, 쥐새끼 든 간에···.
우희는 아버지를 밟고 다음 수를 내다보기 보다는 옆으로 몇 걸음 비켜나서 월섬의 전횡, 검은 커넥션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물론 파악하는 임무는 천수무녀, 소희의 몫이 될 것이다.
전직 대통령과 현직 검찰총장을 구린 과거를 털어 오는 것이 보통 사람이 가능한 일인가?
혼을 쥐락펴락하는 신기한 존재가 있으니 망정이지.
"여사님? 밥 먹다 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숟가락 뺏어가도 모르겠네."
"어? 맞다. 비빔밥!"
잠시잠깐 황비서관을 떠올리는 순간에 비빔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 그릇 더 비벼봐. 아니 아예 두 그릇."
주방에서 냉면 그릇을 가져와 지선 앞에 내려놓는 소희.
"언니는 직접 해. 난 여사님 꺼만 비벼 드릴 거야!"
눈치 빠른 지선.
우희 맘에 들기 위해 대놓고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그래 그럼. 난 여기 이사 안 오고 딴 데로 가야겠네."
"아, 알았어요. 두 그릇. 만나게 비벼드립니다요."
나물을 몽땅 때려 넣고 주방으로 가는 지선.
신나게 밥을 비비는 지선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우희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야! 호칭 좀 정리해야겠다. 내가 너보다 15살 정도는 많아. 근데 계속 반말하면 지선이는 그렇다 쳐도 사람들에게 이상한 관계라고 떠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언니라고 불러. 존댓말하고."
"15살이나 많은 예비이혼녀. 그러네. 그게 맞겠어. 언니!"
"예비이혼녀는 빼고."
"자~! 비빔밥이 왔어요. 여사님 먼저~!"
"고마워. 지선이도 이제 여사님 말고 언니라고 불러. 여사님은 좀 거리감 있잖아."
"에이~! 그래도 어떻게? 저보다 20살은 많을 텐데···. 그럼 제가 나이든 느낌이잖아요."
"···."
역시 지선이도 나일순 못지않게 머리가 남다르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2층에 빈방에 들어오려면 언니라고 불러. 안 그럼 같이 사는 것은 없던 걸로 하자."
우희의 돌발 조건으로 호칭 정리는 간단히 끝났다.
며칠 후,
소희와 지선은 기어이 우희의 집, 성의원의 저택으로 이사했다.
알고 보니 2층에 비어있는 방은 하나가 아니라 2개였다.
우희는 창고처럼 쓰던 방을 정리시켜서 가구까지 완벽하게 세팅을 해 놓았다 .
말 그대로 입을 것과 숟가락, 젓가락만 들고 들어온 소희와 지선.
"와~! 이거 전부 명품가구잖아. 역시 재벌 언니."
"그러네. 고급지네. 역시 예비이혼녀."
"···죽을래?"
옷 이외에 정리할 게 없는 상황인지라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이사는 끝났다.
첫 번째 거래는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참동안 우희의 설명을 듣던 중,
"누구? 이대산과 구학성?"
놀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두 사람을 몰라서 묻는 소희.
"그래. 두 사람을 탈탈 털어 줘."
놀라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하는 우희.
"대산과 학성? 누군데요?"
또 있었다.
이대산과 구학성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
암담한 상황이다.
비록 혼갈이 능력을 탑재하게 되었지만 27살의 철없는 간호사 출신 백수와 눈치만 빠르고 남자들에겐 관심 없는 22살의 모델 출신 백수.
공통점은 당선 취소된 미스코리아.
"뭐라고? 대통령의 뒤를 캐라고?"
"와~ 언니 이제 보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 토끼야?"
"뭔 토끼?"
"거 있잖아요."
"별주부전?"
"맞아요. 별주부."
우희는 끼어들지 않았다.
순전히 미스코리아 둘이서 하는 신중한 대화였다.
"너무 위험해요. 차라리 예비 이혼녀의 과거를 캐는 것은 어때요?"
소희가 불쑥 꺼낸 타켓 전환.
"뭐예요? 우리 언니의 구린 과거를 캐자고? 혹시, 이혼 귀책사유가 언니한테 있는 거야?"
"시끄러!"
소희가 웃자고 헛소리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우희는 일순이 혼갈이 해서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기억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일순과 우희의 과거는 별개고 서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고작 3개월 동안의 생활이 일순이 기억할 수 있는 성우희 삶의 전부였다.
그밖에 알고 있는 기억은 각종 매체에서 수없이 다뤘던 것들.
심지어 성의원이나 황비서관도 그녀의 정체를 모르기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잖아. 이혼 사유도."
"그건 티비에 전부 나왔잖아. 그 나쁜 쉐끼가 바람 피워서 혼외자식을···."
우희 대신 흥분한 척 씩씩대는 지선의 연기는 너무 리얼해서 콧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티비에 나온 내용?
지선의 말대로 최대만 회장은 두 명의 혼외자식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세 명일수도 있고 그보다 많을 수도 있다. 워낙에 방탕한 놈이라서···.
물론 월섬 측에선 끝까지 부인하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기정사실로 다루고 있었지만, 최회장은 기자들의 질문에 침묵으로만 일관할 뿐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우희, 아니 일선도 그 점이 가장 답답하고 의문이었다.
전 국민이 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혼외자를 정작 당사자인 최회장은 인정하지 않았고, 피해자인 자신은 언론에 나온 내용으로 추정할 뿐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전무하다니.
이런 와중에 성의원과 황비서관은 우희의 소송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
소희의 말대로 당장에 대어를 낚을 생각만 할 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했다.
내가 어떤 여자였는지,
최대만 회장과는 어떤 사이였는지,
어떻게 천억이라는 재산분할 소송을 하게 되었는지···.
'어? 그럼 교통사고는?'
우희의 생각은 자신을 혼수상태로 만든 교통사고에 대한 의문까지 이르렀다.
왜 이제야 교통사고를 생각하게 된 거지?
"맞아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나를 알아야 적을 이기죠. 당장 언니부터 털어 봐요."
불쑥 끼어 든 지선 덕분에 복잡해지려는 우희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털긴 뭘? 내 기억 조각을 찾아서 퍼즐을 맞춰야지. 안 그래도 너무 어지럽고 혼란스러워."
그럴 만 했다.
남들보다 뇌 가동률이 높은 그녀인데 없는 기억을 더듬는 일이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소희 언니! 다른 사람에게 들어갈 수 있잖아!"
"어? 최면술 말하는 거냐?"
"아냐.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최면술이라고 그런 거지, 언니가 하는 괴상한 능력 있잖아. 마치 뇌에 들어가서 말하는 것 같은 거."
이제 지선에게 혼갈이와 혼걸이를 말해 줘야 하나? 눈치 백단이라서 이미 뭔지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단지 어휘력이 딸릴 뿐이지.
"혼걸이? 마치 내 몸에 소희 언니의 혼을 살짝 걸치고 말하는 듯 한 느낌. 딱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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