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 1994 (13)

"예? 저는 술 안 마시는데요. 아시잖습니까."
헉!
괜히 한마디 더 붙여서 일이 꼬이게 될 판이었다.
"그렇지. 나도 이제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허허."
다행이도 황비서관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의원님의 혼이 기절하고 딴 사람이 된 걸 어떻게 알까?
"그래서 뭐라고 했냐?"
"예?"
"우희가 200억의 행방을 물었다면서."
"제가 그렇게 말했나요?"
"그래. 방금 전에."
평소답지 않게 강한 눈빛으로 재촉하는 성의원.
표정보다는 말투로 기분을 나타내는 직설적인 분인데 지금 표정은 황비서관에게는 상당히 낯설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우희와 통화했던 것을 말씀드렸나?
기억이 안 나는 짧은 시간에?
황비서관은 혼란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짧게 대답했다. 건물 매각대금 200억에 대해서 묻더라고.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냐?"
"···?"
"어디까지 말했냐?"
황비서관은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재촉하는 성격이 아닌데?
"매각한 것도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믿는 목소리였습니다."
이번엔 성의원이 당황한 듯 했다.
더 캐묻고 싶은데 자칫하면 선을 넘어 의심을 사는 상황이 되었다.
"우희가 어떻게 알고?"
"금융기록을 전부 조회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임대료가 끊긴 걸 알게 되었겠죠."
"그럼 200억은? 우변호사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다.
최대한 짧고 건조하게 물어보는 것이 나을 테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200억은 우희가···, 의원님이 그렇게 부탁을 했는데도."
아~!
이 새끼 말을 참 띄엄띄엄 하네.
안되겠다.
황비서관이 모든 전후 상황을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힘들 것 같고, 최대한 많은 말을 유도해서 나중에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는 수밖에.
"그래. 왜 내 부탁을?"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갔는지. 누군가는 우희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겁니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천수무녀는 답답해서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지나간 일이라니?"
"예?"
황비서관이 몹시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성의원을 살짝 흘겨봤다.
"그래. 어쩌겠어. 다 끝난 일이니."
이 쉐키.
슬쩍 눈빛을 살피는 표정이 의심하는 게 틀림없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뻔히 알고 있는 지나간 일을 들먹이는 것이 큰 실수인 듯.
"의원님이 제일 조심하고 있는 부분을 의원님이 여쭤보시네요. 절 떠보는 겁니까? 설마 제가 대한당에 붙었다는 말을 믿는 겁니까?"
오케이! 여기까지!
성의원, 아니 천수무녀는 대강의 맥락은 파악했지만 핵심에는 전혀 접근하지 못한 아쉬운 결과였다.
지나간 일이 뭔지?
200억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 두 가지에 대해 더 파고들고 싶지만 일단은 한 숨 고르는 차원에서 다른 걸 찔라보기로.
"차 한 잔 가져오지. 괜히 흥분하지 말고. 그 딴 소문 믿는 성격이면 자네는 이 자리에 없어."
일단 자연스럽게 한번 접고,
"수첩은?"
주방으로 가는 황비서관에게 툭 던져봤다.
"성변호사 수첩 말입니까?"
"그래. 그거."
"암호 비슷하게 써놓은 것은 아직 풀지 못했습니다. 뒷장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찢어버려서···."
"그게 뭐? 아니 그게 중요해?"
"제 생각인데, 암호 같은 메모는 200억의 행방에 대한 힌트이고 그 뒷장은 그 이상의 비밀을 메모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원님께서 찢어서 버린 것 아닙니까?"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황비서관의 눈빛이나 목소리.
이제 그만해야 할 듯.
"비밀은 무슨, 어서 차나 내어 와."
천수무녀는 살짝 흥분한 황비서관을 말을 잘라버리고 고민에 빠졌다.
황비서관에게 혼갈이 해서 찢어버린 뒷장의 정체를 물어볼까? 눈치를 보니 상당히 중요한 실마리 같은데.
황비서관에게도 말하지 않는 걸 봐서는 쉽게 알려주지 않을 것도 같고.
일단, 이쯤에서 혼갈이는 끝내는 것으로.
"국화차입니다. 뜨거우니 조심하십시오."
"어? 웬 국화차···? 고맙다."
"···?"
성의원의 혼이 깨어난 그 순간,
"으이~휴. 찌뿌둥하네. 이제 힘드네, 힘들어. 이짓도 이젠 버겁네."
차 뒷 자석에서 누워 자고 있던 소희가 깨어났다.
"잠을 기절하듯이 자네요. 기면증 있어요? 그 신박한 최면술 때문인 것 같은데···."
"기면증? 그게 뭔데?"
"누구에게 최면을 걸면 언니는 잠자듯이 기절하게 되요? 왜 그러는 거예요?"
"야!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 기면증이 뭐야?"
지선의 말에 따르면, 자신도 모르게 대낮에 잠이 들어버리는 질환이란다.
딱 좋다.
소희의 혼을 깨우지 않고 나가면 딱 그 증상이 된다. 이제 부터 소희는 기면증 환자라고 하면 되겠네.
덜컥!
우희가 차에 탔다.
혹시 몰라서 현관에서 대기하다가 혼갈이 상황이 끝난 것 같아서 차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주고받는 말이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그러지는 분위기는 아닌 듯 했다.
"근데요. 궁금한게 있어요."
지친 소희, 정신없는 우희와는 달리 편하게 차에서 쉬고 있던 지선이 못 참겠다는 듯이 물었다.
"뭐가?"
"언니가 신박한 최면술 때문에 신경을 너무 쓰는 것 같아서 생각한 건데, 그냥 도청을 하면 더 편하지 않을까요?"
"···?"
소희는 할 말을 잃었다.
도청장치?
하긴, 자연스럽게 대화하면 의심 없이 술술 나올 수도 있겠지. 근데, 혼갈이 능력이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전락하는 건가? 고작 도청장치로 혼갈이를 대신하자고?
"그건 아냐. 도청의 위험 부담이 더 클 수도 있어. 성의원은 20년 넘게 정치를 해 온 사람이야. 능구렁이가 따로 없지. 그리고 황비서관? 모르긴 해도 금세 눈치 챌걸? 그냥 기절시켜버리는 것이 더 확실하지."
"기절? 최면이 아니고? 근데 언니는 아버님을 꼭 남처럼 말씀하네요. 성의원이라고."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지선.
이젠 그녀의 질문이 상당히 귀찮다.
전부 밝힐 수도 없고 안 밝히자니 계속 귀찮을 것이고.
"풋! 아버지? 혼수상태 이전의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 무슨 감정이 있겠냐? 사이도 별로였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핏줄인데."
"그것도 기억이 안나니 확인해 봐야지."
"핏줄인지 아닌지 어떻게 기억해요. 언니도 참!"
이쯤에서 지선에게 더 이상 질문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는 우희. 찰떡 같이 눈치를 짼 지선은 입을 다물고 우희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풀어 봐. 뭐라 든?"
우희는 지선의 얼굴을 한 손으로 밀어버리고 뒷자리의 소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걸 못 참은 지선, 조수석에서 나와 이번엔 소희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소외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소희가 늘어놓은 획득물은 크게 세 개였다.
첫째, 성의원과 황비서관은 빌딩 매각을 알고 있었음. 여기서 일단, 황비서관의 거짓말 발각.
둘째, 두 사람은 현재 200억의 행방을 모르고 있음.
매각대금은 성변호사를 거쳐 우희에게 간 것으로 추정되고, 무슨 이유에서 인지 성의원은 그 200억을 필요로 함.
세째, 성변호사의 수첩 암호를 아직 못 풀었고 200억의 행방에 대한 힌트로 추정하고 있음. 황비서관이 중요하다고 하는 수첩 한 장을 성의원이 찢어버림
"그럼 성공한건가요? 소희언니 성공보수 획득?"
역시나 성공보수가 중요한 지선.
당연히 소희도 궁금했다.
"그래. 정산은 나중에 하더라도 판단은 정확히 해야지.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해?"
"아~! 녹음을 했어야 했네."
이제야 뒤늦게 후회하는 지선.
자신이 받을 것도 아닌데 너무 심하게 안타까워했다.
"걱정 마. 번복 안 해. 이래 뵈도 기억력 하나는 국가대표급이다."
"황비서관이 200억의 행방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그거 맞~죠?"
아직도 존댓말이 어색한 소희가 정확하게 끄집어냈다.
"오! 맞아. 근데 빌딩을 매각하고 200억이 우희에게 간 것은 알고 있지만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잖아."
"그럼 200억을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건 좀 억지 같은데요?"
지선은 마치 자신의 몫을 뜯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황비서관이 알고 있냐가 중요할 뿐, 200억이 어디 있는지가 아니었다. 지선의 말이 맞았다. 200억의 종착지가 우희라면 성공한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실패다.
문제는 성공이라고 해도 우희가 200억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을 못한다는 것.
"애매하네. 계좌를 탈탈 털어도 없었고, 이사할 때 발견되지도 않았으니, 종착지가 다른 곳이거나 가까이 있는데 못 찾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데."
반발이 만만치 않음을 그녀들의 살벌한 눈빛으로 감지한 우희.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은 했지만 동생들이 살짝 무서워졌다.
"일단 착수금 1억은 적립하고, 성공보수는 절반만 적립. 어때? 나중에 내가 200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 전액 적립하기로 하고."
절반씩 양보.
간단하게 합의했다.
"성의원이 내 200억을 달라고 했다는 거. 그건 뭔 뜻일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탁했지만 거절했다는 뉘앙스였어~요. 꽤 중요한 사용처가 있었는데 이젠 지나간 일이라서 부질없다는 그런 느낌?"
소희는 혼갈이때 들었던 말을 양념 없이 그대로 말해주고 싶었다.
"그건 간단하게 생각하면 되요."
최고의 오지라퍼가 뭔가를 눈치 챈 모양이었다.
"뭔데?"
"왜 빌딩을 팔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니 수중에 현금 200억이 있다는 말을 듣고 정치자금으로 쓰자고 부탁했겠죠. 봐요. 언니가 빌딩을 매각한 시점 이후로 성의원의 위세가 많이 꺽였어요. 아마 그 즈음에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큰돈이 필요했을 거예요. 다들 아시잖아요. 정치라는 게 돈 없이 안 된다는 거."
속사포처럼 쏟아낸 지선의 생각은 특별한 게 없었지만 그 이상을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니까, 정치자금을 안 빌려준 건가? 그래서 교통사고를? 설마 그건 아니겠지?"
마치 남의 사고를 이야기하듯이 덤덤하게 막장을 상상하는 우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가 딸을?"
"모르죠. 7선이나 해 먹었으면 권력을 위해 뭔들 못하겠어요? 막장 드라마가 현실이라고 하잖아요."
"닥쳐.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그렇지. 그런 상상은 하지 말자."
사실, 소희도 제일 먼저 그 생각을 했지만 막상 지선이 불을 지피려고 하자 거부감이 들었다.
'세상이 이렇게도 변했나?'
괜한 호기심에 무서운 세계에 말려드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 옛날, 자신을 봉인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봉만과 격가일당의 잔인함이 다시금 떠오르고 있었다.
"근데, 언니가 끝까지 빌려주지 않았다면 그 돈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건, 수첩 메모가 가장 유력한 실마리일거야."
"맞아요. 황비서관도 그렇게 말했어요. 아참!"
하던 말을 멈추고 뭔가를 찾는 소희.
"수첩! 어디 있지? 안가지고 나왔어요?"
"아~! 경찰서에서 가져 온 수첩. 아까 부축할 때도 없었는데? 집에 두고 온 거 아냐?"
"예~에? 그럼 거실에?"
다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나같이 낭패라는 표정이었다.
거실에 그 수첩이 있다?
황비서관이나 성의원이 그걸 본다면?
세 여자가 수첩을 어떻게 회수 할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그 시간.
우희 집 거실.
방금 전 국화차를 타서 성의원 앞에 내려놓은 황비서관.
그의 눈에 낯익은 수첩이 들어왔다. 성의원의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은 곳에 놓인 그것은 성미란, 성변호사의 수첩이었다.
분명했다.
경찰서 증거물 보관소에서 봤던 것이었다.
'제게 왜 여기에?'
황비서관은 성의원이 눈치 채지 못하게 맞은편에 앉아서 시야를 완전하게 가렸다. 이제 성의원이 자리를 뜰 때까지 버티고 있다가 손에 넣으면 된다.
성의원도 수첩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황비서관이 보기 전에 한 장을 찢어버렸다.
바로 옆에 담당 경찰이 보고 있는 상황에서 증거물을 훼손할 정도로 숨길만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황비서관은 경찰서에서 성의원의 어깨너머로 메모장 뒷장을 보려고 했지만 내용을 알수 없었다.
이참에 수첩을 손에 넣는다면 사진이라도 찍어 놓고 자세히 들여다 볼 생각이었다.
이왕이면 성의원 몰래.
그건 그렇고 ,
황비서관은 수첩이 여기에 있는 상황이 의아했다. 가족이 없으니 혼수상태에서 깨어 난 우희에게 전달한 건가?
우희가 훔쳐오지는 않았을 테고.
'뭐든 상관없다. 200억만 챙기면 끝이다.'
황철민은 지긋지긋한 가스라이팅을 끊어내고 싶었다. 오랜 시간 머슴처럼 시키는 것은 무조건 따랐다.
지저분한 일, 위험한 일. 가리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성의원은 이미 3선 의원.
한두 번 더 하고 지역구를 넘겨 줄 것이라 생각했다.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다.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만 마신 지 20년.
심지어 자신의 딸까지 이용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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