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

신임 영주가 용사일 줄이야.
정말 놀랐다.
나보다 1년 늦게 소환된 존재로 나로 인해 용사라는 굴레를 뒤집어쓴 피해자...
...는 개뿔.
솔직히 내가 좋다고 환생 트럭에 뛰어들어서 온 것도 아니고, 나도 피해자라 이거야!
물론, 내가 런(RUN) 해서 대신 왔다고 하니 약간의 연민? 미안함? 이 눈곱을 쥐어짜면 나오는 즙만큼 들긴 했다.
어쩌라구, 배 째!
라고 하고 싶었지만 지위에서 밀리고, 힘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아서 가슴 속에서만 울리는 메아리였다.
근데 더 놀라운 사실은 예비 장인이 나와 같은 전이자라는 사실.
어쩐지 그 영감, 지방 영지의 대장장이치고는 예사롭지 않더니만...
아무튼 지금 상황이 매우 난감해졌다.
우리 비올레타만 아니라면, 이깟 경비 대장 그냥 때려치우고 야반도주라도 할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는 몸.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납작 엎드리는 것 뿐이었다.
...맘은 알지만 적당히 하자 좀! 이러다 탈모 오것다, 진짜!
그렇게 고통의 시간이 가고, 영주는 예비 장인이 있는 감옥으로 날 데리고 갔다.
굳이 나까지 대동하는 것이 어째 거기 가서 또 한 번 푸닥거리를 할 듯한 강렬한 예감이 뒤통수를 후려쳤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저나 예비 장인은 이분이 그 용사님이 신 거...당연히 모르겠지?
괜히 고향이 어쩌구, 반갑네 어쩌구... 남천동 서장 얘기까지 나오면 난리 날 텐데...
...
평소에도 나랑 비올레타 사이에 끼어들어 눈치 없이 굴더니, 여지없었다.
거기서 왜 반갑다는 말이 나오냐고!!
물론 앞뒤 문맥상 충분히 나올 법한 소리긴 하다만...
반가운 사람이 두들겨 패고 감옥에 가둬 두것냐고 이 양반아.
아무리 몸짓으로 신호를 줘도 못 알아 먹는다.
장인 어른 죽을라면, 제발 혼자 죽으십쇼.
***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머리를 박고 있는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누르한 영감과 빌리...그리고 나.
세 명의 지구 출신 전이자라니.
이게 과연 우연일까?
뭐, 온 우주에 생명체가 사는 곳이 이곳과 우리 행성 뿐일 수도 있으니 그건 둘째 치자.
근데 이놈들은 왜 이러고 살고 있을까?
비록 용사의 길을 포기해서 여신의 축복은 끊겼으나, 용사로 내정되어 불려 온 만큼 둘의 잠재력은 나조차도 가늠이 안 됐다.
지구로 치면 만수르는 아니지만 조그만 땅덩어리의 샘송 오너 정도는 되는 수준의 능력을 지니고도 경비 대장?
경비 대장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대장장이?
진짜 환장하겠네.
황실에서 알면 어서옵셔~ 하면서 신나서 끌고 갈 텐데...
찔러? 그럼 내가 굴리 질 못 하는데?
그럼 그냥 눈 감아? 아, 그건 좀 억울한데...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쓰읍! 자세 똑바로 안 할래? 한쪽 발 든다. 실시.”
“끄어어어. 영주님, 진짜 죽...겠습니다.”
"은근슬쩍 마력 끌어 올리면 진짜 뒈지는 거다."
"노예 계약까지 수락하지 않았습니까? 제발 넓은 아량으로 자비를..."
“나 속 좁아. 그러니 니들이 양심이 있다면 이 정도에 수작 부리지 마라.”
이렇게 뺀질거리는 모습에 결정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굴려주기로...
......
“그래서 영주님이 거두신다고요?”
“네, 그러니 황실에는 비밀로 좀...”
“현직 용사는 아니지만, 용사로 내정되어 소환된 마나 최적화 인간을 둘 다요?”
“전쟁이 싫어 도망간 겁쟁이들일 뿐입니다. 이제와서 억지로 전장에 데려다 논다고 무슨 활약을 하겠습니까?”
“그래도 스승님이 은퇴를 하신 마당에 저 정도의 강자라면 하나가 아쉬운데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황녀의 일침.
“그렇다고 이곳 사람도 아닌데 강제 징역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곳에서 직업을 가지고 수년 간 살아왔으면, 이곳 사람이죠. 아니 그렇습니까?”
“그래서 굳이 강제 징역을 하시겠다?”
“아뇨, 전 그저 아바마마께 보고를 드릴 뿐이지요. 판단은 황실에서 알아서 하겠죠.”
그 말이 그 말이잖아!
능글능글거리며 미소 짓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이제야 대화가 좀 되겠군요. 어차피 고착된 전선, 저도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게 해주시지요.”
“아니,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여기 통신실이 어느 쪽이죠?”
황녀는 단호박을 좋아했다.
“아, 알았다고요. 제가 한번 말은 해보겠습니다만... 꼭 된다고 장담은 못 드립니다.”
“그럼 저도 사랑하는 아바마마께 감히 비밀을 만든다는 걸 장담은 못 드리겠죠? 호홍홍.”
으, 얄밉다, 얄미워 죽겠다.
지가 언제부터 황제랑 그렇게 애틋했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일단 통신을 좀 하고 다시 얘기하시지요.”
“네에~ 호홍홍~~~”
......
“아~ 따거~ 고막 나갈 뻔 했잖습니까!”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애써 새로운 신분으로 은퇴까지 시켜줬더니, 거기 다 황녀를 둔다고? 지금 그곳 영주가 실은 용사에용~ 하고 광고라도 할 셈인가?”
“황녀가 전선에서 내상을 입어 전선에서 먼 곳으로 휴양차 갔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애당초 지금 전선이 예전처럼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무한 고착 상태라면서요? 인류는 서로 자기들 나라에 피해가 올까봐 소극적이고, 마족들도 마왕 자리를 두고 눈치 싸움이 한창일 테고...”
“그건 그런데...”
“제가 이렇게 뭐 부탁하는 적 있었습니까?”
“아니, 자네는 보통 부탁을 들어주는 쪽이긴 했지...”
“검술 가르쳐, 목숨 살려줘, 딸 케어해줘, 대륙도 구해주고...”
“아...알겠네. 그만, 그만. 매번 그 소리 하도 들어서 머리가 지긋지긋하네.”
“매번 그 소리라뇨! 계속되는 부탁을 들어주느라 뒤에 사족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구만요!”
“사실 다른 나라들이 소극적인데 제국만 나서서 뭘 어찌해볼 상황도 아니라, 슬슬 황녀를 불러들여서 맞선이나 보게 하려 했네.”
“맞...선이요?”
그 선불 맞은 멧돼지를?
전장에서 하도 거칠게 굴러먹어서,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쉴 텐데...
“후계도 생각을 해야 하니까. 어떻게 생각 있나?”
내 짧은 상상을 황제가 오해했나 보다.
“그럴 리가요? 그저 상대방에 대한 연민? 걱정? 애도? 뭐 그런 감정이 잠시 들어서...”
“쳇... 그러니까 자네가 그 자리에 맞춤 인간 아닌가.”
어허! 이 쏴람이 어디서 던지기를 하려고!!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대체 자네 스타일이 뭔가? 이건 황녀를 떠나서 오랜 친우로서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네...”
“음...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긴 생머리를 기본으로 깔고, 약간 고양이 상의 눈매에 살짝 보조개가 들어가면 귀여울 거 같고, 성격은 어느 정도 내숭이 있는 곰처럼 보이는 여우 스타일에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서로 미소 짓게 하는 사람 정도?”
뭐 대충 저 정도만 되면 배우자로 합격인가?
“신분은?”
“저런 사람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동네 거지라도 상관있겠습니까? 제가 먹여 살리면 되는데.”
“후...하긴 자네는 그런 사람이었지. 모두가 평등한 세상에서 왔다고 했던가?”
“그곳도 그곳 나름대로 권력과 부의 정도에 따라 암묵적인 신분의 고하가 있기는 했지만, 일단은 그랬죠.”
“알겠네. 전선에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푹 쉬라고 전해주게.”
“황녀 전하가 이런 폐하의 걱정과 사랑을 아셔야 할 텐데요?”
“......자꾸 검을 빼들고 황위를 계승하려 하는 것만 빼면 사랑하지. 푸흐흐흐.”
“크크큭. 네, 그럼 그리 알고 얼굴 까먹지 않도록 종종 황도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럼 그때 보도록 하지, 회의 시간이 다 돼서 이만.”
“네, 들어가십쇼.”
후,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좀 난감할 뻔했는데 일단 한 고비는 넘겼구나.
협박을 받아 황제와 담판을 지은 듯했으나, 내심 황녀가 안쓰러웠다.
길지 않더라도 조금은 쉴 공간이 되어 주고 싶었다.
물론, 사심 없이!
-딸깍.
문을 열고 나오자, 조금 떨어진 복도 건너편으로 긴 생머리가 나풀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전담 시녀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고양이 같은 얼굴로 뭐가 그리 신나는지 실눈이 되도록 웃으며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어으응?
어? 어? 어?
긴 생머리, 고양이상, 보조개, 곰처럼 보이지만 다방면에 뛰어난 내숭 10단...?
아니지? 아닐 거야.
그래! 서...성격이 안 맞잖아!
......
하아~ 황제님~ 폐하~ 방금 얘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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