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 아뉘아뉘~ 제 스케줄 말고... 우-리 스케줄이요~ -

한슨은 식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이 차리는 것도 못 보고 이대로 집에 왔다고?”
“네. 그럼 어쩝니까? 언제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는데. 집에 와서 밥도 먹어야 하고...”
그러자 또 작렬하는 등짝 스매시.
이번에는 한 대도 아니었다.
-짝! 짝! 짝!
“어이구! 이 화상아! 옆집 드라일은 벌써 애가 6살인데 뭐가 어쩌구 저째? 넌 장가 안 갈 거야! 여자한테 초두효과가 얼마나 중요한데 이것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자리를 비워, 비우길! 이 국밥에 말아 먹을 자식 같으니라구!”
“아! 아! 아파요! 그리고 신분도 고귀해 보이는 여자라 저랑은 안 어울려요.”
“그래서? 또 포기하겠다? 니놈이 그렇게 포기한 실비가 저기 과일집 아들이랑 결혼해 알콩달콩 잘살고 있는 건 알고 하는 말이지? 너 지금 이 애미 쓰러지는 꼴 보려고 그러는 거니?”
“알아다구요 알았어. 가면 되잖아요! 그래도 하루종일 뛰어다녀서 몰골이 이런데 먼지 털고 땀냄새라도 좀 빼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가뜩이나 위중한 환잔데...”
그러자 한슨의 어머니가 잠시 말이 없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또 맞는 말이구나. 아무리 내 새끼지만 이 몰골을 보면 좋다가도 싫어지긴 하겠다.”
“엄니!!!!! 무슨 말을...”
“빨리 씻고 오기나 해 이것아. 이 애미가 입고 갈 옷은 준비해 둘 터니...”
억지로 등 떠밀려 씻으러 가면서도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엄니? 저 무서워요.’
그렇게 씻는 사이 한슨의 어머니는 장롱에서 사별한 그의 남편의 옷을 뒤지고 있었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찾았다!”
마침 대충 씻고 나온 한슨이 그 소리를 듣고는 물음을 던졌다.
“찾긴 뭘 찾아요?”
“네가 입고 갈 옷.”
“......설마 지금 손에 들고 계신 그 옷은 아니죠?”
“왜 아니겠니?”
한슨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저건 흡사...
‘예복?’
그의 부친이 결혼식에 입었을 법한 예복이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아니, 누가 병문안을 가는데 그런 옷을...”
“그래서 지금 헤지다 못해 구멍까지 나 있는 그 옷을 입고 가시겠다?”
자신의 직업 특성상 숲을 돌아다니다 보니 대부분의 옷이 헤지고 구멍이 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런 옷을 입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노무 자식이!”
-짝!
“이노무 자식이!”
-짝!
“엄니 숨 넘어 가기 전에 빨리 안 갈아입엇!”
어머니의 성화에 아무래도 자신이 가십거리의 주인공이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 옷을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
‘여긴 어디지?’
분명 자신은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근데 눈을 뜨니 숲이 아닌 어딘가의 방이라니...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으나, 자신의 정체가 들켰다면 이렇게 무방비하게 방치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며 긴장을 살짝 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이 안전하다는 의미는 아닐 터.
일단 정확한 상황 파악이 먼저였고, 마침 그 답을 알고 있을 거 같은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엇! 깨어나셨습니까?”
“네, 근데 여긴 어디...?”
“여긴 트리토니아 영지입니다. 산속에 쓰러져 계시던 걸 마침 한슨이란 놈이 사냥을 갔다 발견해서 데려왔습죠.”
“아...그렇군요. 으으윽...”
“무리해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 마시지요. 포션을 써서 외상은 치료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달은 거동이 불편하실 겁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얘기는 한슨놈이 오면 해주시지요. 저야 돈 받고 치료한 것밖에 없으니... 그럼 어디 불편하면 말씀하시고 좀 더 쉬십시오.”
하필 자신이 침공한 영지의 사람에게 구함을 받다니... 전사로서 이런 치욕이 없었다.
‘하긴, 이미 목숨이 아까워 전장을 이탈한 순간 더는 전사가 아닌 건가?’
당시에는 공포가 잠식해 자신도 모르게 도주하고 코어까지 파괴했으나,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면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황에 빠진 사람이 환각을 보거나 환청을 듣듯이 자신이 그런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다.
남은 명예라도 지키기 위해서 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자진함이 맞았으나, 처음 한 번이 어렵지 죽다 살아나니 더욱 죽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어. 이대로 적진에 침투해 방심한 용사의 목을 딴다.’
다시 용사를 보면 또 공황장애가 발생할 것만 같은 불안감을 애써 누르며 자기합리화를 시전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정신 없는 와중에...
-똑똑.
-끼이익.
문을 두드리더니 살며시 열고 들어오는 인영이 있었다.
“정신이 좀 드셨습니까?”
“누...구?”
“전...”
“아! 혹시, 절 구해주셨다는 그 분?”
“구했다기 보다는 그저 발견해서 의원으로 데리고 온 것 뿐이라...”
“그게 구해주신 거지요. 고마워요, 구해줘서.”
“에...어...음. 네, 뭐...흠.”
“어디 불편하신데라도?”
“아뇨! 아뇨아뇨! 그냥 좀 어색해서...그나저나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저는 시트리라고 합니다. 그쪽은...?”
“하,한슨 이라고 합니다!!”
“네, 하한슨님.”
“아니, 하한슨이 아니라 그냥 한슨입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어쩌다 그곳에 쓰러져 계셨는지요?”
“제가 이름 빼고는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
“네? 그럼?”
“네, 기억을 전부 잃었답니다.”
“아...뭐라 위로를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일단 치료비부터 벌어 봐야죠.”
아공간에 있는 잡동사니만 몇 개 처분해도 돈은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정작 아공간을 불러낼 마력이 날아갔다.
무일푼의 7죄악이라니...
“그...그럼 당분간이라도 저희 집에 와서 지내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한슨님의 집이요?”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립하실 때까지... 당분간만...”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이었지만, 이곳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 사람을 통하면 영지내 사정이나 정보에 접근이 용이하리라.’
짧은 계산을 마치고, 이내 영업용 미소를 띄우며 화사하게 웃었다.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 영지를 대륙에서 지우는 날이 와도 너 하나 정도는 살려주마.’
그렇게 동상이몽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
“남작니이임~ 오늘은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요?”
“휴양 중이신 황녀님의 스케줄이야 저도 잘 모르는데, 전담 시녀분께 여쭈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뉘아뉘~ 제 스케줄 말고... 우-리 스케줄이요~”
“...우리 스케줄은 없습니다만?”
“이라고 할 거 같아서 제가 준비해 왔답니다~ 호홍홍.”
그러면서 무슨 종이를 쫙 펼쳐 드는데...
“배 타고 바다에 나가서 자빠뜨리기, 주점에서 술 취한 척 대실 유도하기, 소풍 가서 다리 다친 척 업어 달라 하기?”
뭐가 이리 솔직해.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앗! 앗! 그게 아니라 이거랍니다...”
읽고 있던 종이를 잽싸게 낚아채 가더니 새로운 종이를 내밀었다.
-배 타고 낚시 가기, 일반인인 척하고 주점에서 술 마시기, 소풍 가기 등등
이미 앞에서 읽은 내용이 있다 보니 그냥 그러자는 말이 안 나왔다.
“이미 앞에 걸 본 뒤라 썩 내키지 않는뎁쇼?”
“역시...그럼 바로 대실로 고고슁?”
“이익.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투닥거림이 이어지는 와중에 바루스가 찾아왔다.
“오! 바루스경! 무슨 일인가? 내 도움이 절실한 표정이구만! 말만 하게!”
“...영주님의 허가가 필요한 일이니 도움이라면 도움일까요? 마족 잔당이 남아 있을지 몰라 통행이 극도로 위축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병사들을 일부 차출해서 정찰을 보낼까 하는데,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다 보니 그 두 사람을 좀 활용할까 싶어서요.”
“콜! 그거 받고 나까지 엎어서 따블로 가지!”
“네? 영주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마나 친화적 존재인 전이자는 남들과 달리 회복도 빨랐다.
거기다 성녀의 도움까지 받았으니 대규모의 전투는 무리더라도, 소수의 적들을 상대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영지민들의 불편을 내 어찌 모른 척 넘어가겠나. 자! 가세나! 그런 고로 황녀님, 오늘은 동행이 좀 어려울 듯 하옵니다.”
입술이 댓발로 튀어나온 황녀를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내 미소가 지워지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럼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황녀의 뒤에 조용히 시립해 있던 전담 시녀가 돌을 던졌기 때문이다.
-!!!
“그렇죠! 제국의 신민들이 고난을 겪고 있다는데, 황녀의 신분으로 놀러 갈 생각만 하다니! 제가 너무 안일했나 봅니다. 저도 제국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아니, 대외적으로 휴양 중인 황녀님까지...”
“지금 황족의 의무를 저버리란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목소리를 깔며, 진지충에 빙의해서 저렇게 말하면 반칙 아니냐?
나와는 달리 황녀는 아직 회복이 덜 되어서 직접적인 전투는 무리겠지만, 황녀를 따르는 호위들은 분명히 도움이 될 터지.
“...알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그렇게 난 또 다시 후회할 결정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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