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 잘한다 우리 성녀! 덮쳐 버렷!!! -

한창 축제를 즐기는 와중에 은밀하게 쪽지 하나가 전해졌다.
-초특급 정보 입수. 30분 후 그곳에서.
누가 보낸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황급히 황녀에게 전달했다.
꼬치구이를 양손에 들고 전혀 귀족 답지 않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던 황녀는 전언을 듣자마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감히 황녀의 유희를 방해할 만한 사안이여야 할 것이에요.”
어휴, 저 철딱서니. 입가에 살짝 묻은 소스나 닦고 말하지.
“이를 말이겠습니까?”
“말해보세요.”
......
“뭐라구욧! 남작님이 상행에 잠행하신다고요?”
황녀의 옆에 있던 나도 깜짝 놀랐다.
이 바지 영주놈이 뭐라는 거야?
이 시국에 영주가 영지를 안 지키고 어딜 싸돌아 다닌다는겨?
짧은 의문은 지금의 영지 상황을 들음과 함께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으나...는 개뿔?
그래도 그렇지.
그럼 이 시한 폭탄은 누가 책임지고?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테러리스트의 폭주를 막아야만 했다.
“네네~ 그렇다니까요.”
“흐으음...”
“참고로 황녀님의 지인들과의 소개팅을 빌미로 입막음을 시도하셨습니다.”
미친, 뭐라는겨?
불난 집에 부채질을?
“저 그래서 말인데...”
의도가 다분한 말 흐리기를
“보상은 걱정 마시죠.”
“감사합니다.”
황녀가 쿨거래로 받아쳤다.
당근이세요?
이내 짧은 문답과 함께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황녀의 모습.
황녀의 눈가가 움찔움찔 거리는 것이 딱 봐도 자신도 몰래 그 상행에 껴들 생각임이 분명했다.
막아야 했다. 골든 타임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근데 어떻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일단 조심스럽게 다가가 귓가에 되는 대로 속삭였다.
“여자로서 큰 점수를 딸 기회입니다.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십시오.”
-!!!
“참고로 전 동행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다행이다. 임시방편이 통했다.
이제 뇌를 굴려야 했다.
뭔가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붙여야 내가 산다.
“예. 옛?”
“누구와는 달리 저에게는 붙은 눈들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바람 피는 것도 아니고, 바람 쐬는 정도로 쪼잔하게 굴 제가 아니랍니다. 알았으니 걸리기 전에 어서 자리로 복귀 하세요.”
황녀는 불만이 가득 찬 표정이었지만 던진 미끼가 통했던 지, 알려준 대로 말하고는 자리를 정리했다.
“네! 가보겠습니다.”
눈앞에 있던 신형이 복도를 돌아 사라지자, 애써 유지하고 있던 가면이 벗겨졌다.
“안나! 안나아아아~ 남작님이 나 두고 간다는데, 왜 따라가지 말라는 건데~! 나 미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앙?”
이미 제 정신이 아니신 듯 싶습니다만요?
방금 전의 우아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3살짜리 떼쟁이가 보인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죠?”
“점수 따는 법을 알려 줄 테니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라고...하...하지만...”
“자, 들어 보세요. 원래 남편이 바깥 일을 하면 아내는 내조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아...아내?”
“지금 영지가 얼마나 어수선한지는 누구보다 잘 아실 테고. 그런 상황에 영주가 영지를 위해 몸소 자리를 비웠다! 그럼 누구를 믿고 그랬겠습니까?”
“.....설마 나?”
“빙고! 자, 눈을 감고 생각해 보세요. 이 시국에 영지를 떠난 사실을 알게 되는 영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내 영지의 생사가 달린 중요한 업무 때문에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알게 되죠. 바로 그때야!!! 영주 대신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 온 존재를 인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 영지민들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어떻게 생각하는데?”
반쯤 홍조를 띄운 모습이 알면서도 내 입으로 듣고 싶어하는 티가 팍팍 났다.
“당연히 예비 반려자로 보이지 않겠습니까? 트리토니아의 안주인!!!”
“흐에에에~ 부끄부끄~”
의...의태어를 입으로 소리 내고 있어!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어후.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바람을 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업무를 위해 단지 바람을 쐬러 나가시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오시겠지요. 집에 돌아오셨을 때, 여자여자한 모습으로 가장 먼저 ‘어서오세요.’라고 말할 사람이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당연하지! 나 말고는 없지! 그래도 한참 동안을 못 보는 건 좀 그런데...”
휴, 급하게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는데 다행히도 반쯤은 넘어왔다.
내 뇌, 칭찬해.
그럼 여기서 쐐기골을 넣고 세레머니를 하자.
“바로 그겁니다. 이곳이 어디? 바로 영주성! 곳곳에 영주님의 체취가 묻어 있는 곳... 영주님의 방 청소 정도는 안주인의 권한으로 직접 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흐에에에에엑!!!!!!!”
내 주둥이에서 나왔지만, 진짜 더럽고 변태 같은 멘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미친 황녀가 뭘 상상했는지는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을 상상했든 현실은 더 지저분하고 변태 같을 테니깐.
“역시 안나는 천재야! 진행 시켜! 오홍홍.”
어휴, 내가 진짜 더러워서 빨리 다른 보직을 받아야 할 텐데.
오늘도 나의 위기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
“이씨, 뭐지? 왜 갑자기 오한이 드는 걸까?”
“어디 안 좋으십니까?”
업무에 바쁜 바루스가 급한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 돌아오며 말을 건넸다.
“아니, 뭔가 아주 찝찝한 느낌이 들어서.”
“아, 그러니까 좀 자주 씻으시라고요!”
“그 찝찝함이 아니다만?”
“오늘 씻으셨습니까?”
“먼 소리야. 아직 해가 쨍쨍한데. 씻는 건 자기 전에 하는 거지.”
“......”
“아, 됐고. 문서상으로 전투 후 부상이 회복되지 않은 걸로 했으니 초야권 문제는 해결됐고. 어차피 내가 할 일도 없는데 밥이나 먹으러 가지.”
“정확히 말하면 영주님만 할 일이 없으신 겁니다. 제가 다 하고 있으니까요.”
“응, 개꿀. 크큭. 점심인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꿍한 표정의 바루스를 끌고 식당으로 가는 길에 반쯤 혼이 나간 표정의 성녀가 눈에 들어왔다.
수백 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상황이라 밤잠을 설쳐가며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고 듣긴 했지만 막상 저 몰골을 보게 되니 미안한 감정이 몰려왔다.
“성녀님이시네요. 또 치료소로 가시는 길인가 봅니다.”
“그러게. 나 치료한다고 신성력을 바닥까지 긁어 써서 회복도 아직 덜 됐을 텐데.”
“정확히 말하면 영주님 포함 곧 숨이 넘어갈 거 같은 사람들이지요. 신성력이 만능은 아닌 것 뿐입니다. 잘린 팔을 붙일 수는 있지만,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접착제로 붙인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신성력으로 죽지 않게는 할 수 있지만, 병신이 되지 않게 하기는 어려웠다.
나야 마나 최적화 신체를 바탕으로 워낙 강인한 신체를 가진 것에 최우선으로 치료를 반복했기에 멀쩡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재치료 필요했고, 그나마도 시간이 흘러 고착화 되면 그것 조차 불가능했기에 성녀는 저리 혹사 당하고 있었다.
“도움을 줄 수 없이 보기만 해야 하니 답답하구만.”
“이따 저녁에 찾아가서 어깨라도 주물러 주며 말동무라도 해주시지요. 그거면 충분할 겁니다.”
“그래도 명색이 성녀인데 남자인 내가 스킨쉽을 하기는 좀...”
“이 악물고 모르는 척하시는 것은 좋지만, 성녀님이 안쓰럽지도 않으십니까?”
내가 바보도 아니고, 저렇게 티를 내는데 내가 모를 리가 있나.
하지만, 성녀는 다른 의미로 곁에 두기 힘들었다.
“...미안해서 그러지.”
“어차피 성녀님이 영주님을 하루, 이틀 겪은 것도 아니고,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으실 겁니다.”
그건 그렇지.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 거 같았다.
나를 위해 저렇게 고생하는 이에게, 선을 그어 놓고 넘어 오지 못 하게만 하고 있다니...
적어도 오늘 하루는 성녀를 위해 시간을 내기로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보수는...”
“뜻한 바를 이루실 거예요.”
바루스는 교토삼굴(狡兎三窟)에 충실한 전략가 타입이었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존재가 그 상황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잘한다 우리 성녀! 덮쳐 버렷!!!”
그 성녀에 그 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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