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 난 ‘용사’였지, ‘용자’는 아니었다. -

보통의 경우 몬스터의 영역에 영주성을 근접해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훌리오 자작령의 경우에는 약간 특별했다.
기존에 산맥을 끼고 방어에 용이하도록 영주성을 지었는데, 산맥 너머에 오크 부족이 이주해오며 문제가 되었다.
본성을 이전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전통적으로 기습보다는 정면 승부를 즐기는 오크족.
중간에 초소를 설치하면, 혹시 모를 상황이 와도 충분히 대처가 가능하다는 판단이 섰다.
거기에 인간보다는 타종족을 주식으로 삼고 내부 다툼이 잦은 오크족의 특성은 오히려 다른 몬스터의 1차 방벽이 되어 주는 경우가 많아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그동안 대규모 공습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나, 그동안은 특별히 문제될 일이 없었다.
아쉽게도, 마족의 침공 이전까지는...
......
훌리오 자작은 허탈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의 자랑인 기사단은 그래도 좀 나았지만, 나머지는 살아 있는 이보다 죽은 이들이 더 많았다.
저들의 퇴각이 조금만 빨랐더라도, 저들 중에 반수는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정작 본인조차 간신히 살아났음에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부상자들부터 추스르도록. 저쪽으로는 내가 가보지.”
저 멀리 누군가가 오크들을 거스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이 사태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리라.
지친 신형을 일으켜 세우며, 직접 맞이하기 위해 성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게 부서진 성문의 잔해를 밟고 넘어가는 속이 먹먹해져 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자는...
“...카인 남작? 아니,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저들과 휴전을 하라고?”
“네, 지금은 그래야 합니다.”
“애초에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네! 가만히 있다가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건 우리야! 저쪽이 아니라!”
“그래서 굳이 퍼져있는 병력을 끌어모아 오크족과 멸망전을 하시겠다 이겁니까?”
“피의 대가는 피로만 갚을 수 있다네.”
“확인된 오크 마스터만 셋이었습니다. 물론 저들도 대부분의 병력을 끌고 온 것으로 보이니 많아야 다섯은 넘지 않겠지만, 감당 되시겠습니까?”
“황궁에 원조를 요청할 것이네. 그깟 오크 마스터 다섯이 아니라 열다섯이라도 물러날 수 없음이야.”
“그러다 마족이 전선을 밀고 내려오면요?”
“마족들도 지금 상황이 좋지 못해서, 그러지는 않을 걸세.”
“혹시라도 진짜 내려오면요?”
“......”
“제국에 있는 마스터의 숫자만 총 15명. 그중에 10명이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5명도 함부로 움직일 위치가 아니란 걸 모르시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크으윽. 그럼 이대로 당하고 가만히 있으란 소린가?”
“힘드시겠지만, 그러셔야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시지요.”
훌리오 자작이 이곳을 책임진 이후로 지금까지는 소규모 국지전만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들었다.
딱 어제까지.
저쪽은 동족상잔이 수시로 일어나는 특성에 맞게 쿨하게 거래를 하고 떠났지만, 이쪽은 불구대천의 원한이 생긴 것이다.
주변을 가득 메운 신음소리와 울음소리 사이로 전의가 감돌고 있다.
“어쩌라는 말이냐...”
하지만 이곳을 책임지는 입장에서는 쉽사리 결전을 선포할 수가 없었다.
황실의 도움 없이는 오늘 일의 반복이 될 뿐인데, 황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기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훌리오 자작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언을 건넬 수는 있지만, 결정은 온전히 그의 몫이어야 했기에, 이제는 그저 그의 결정을 기다릴 뿐이었다.
-으드드드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휴전을 하겠네.”
훌리오 자작의 감정이 절절히 느껴졌다.
얼마나 억울하고 또 억울할까?
“이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도 듣지 못하게 기막을 치고, 낮은 목소리도 말을 이었다.
-속닥속닥.
“...그렇게 해 주겠는가?”
“네, 물론이죠. 전 인간이니까요.”
“고맙네.”
***
훌리오 자작의 도움을 받아 물건을 싣고 빌리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를 통해 성녀를 불러왔다.
“오셨습니까?”
“안타까운 일이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성녀님, 오셨습니까? 위로 감사드립니다.”
성녀와 인사를 나눈 훌리오 자작은 사후처리가 바빠 바로 자리를 떴고, 성녀에게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설명해줬다.
“흐으으음... 대가는요?”
“글쎄요? 아무래도 당장은 힘들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훌리오 자작님이 알아서 챙겨주시지 않겠습니까?”
“네? 무슨 말씀이시죠? 전 카-인-남작님께 말씀드린 건데요? 제가 무슨 악덕 기업도 아니고, 지금 이 상황에 이곳에 보답을 바랄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답니다.”
그럼 나는? 나한테는 괜찮고?
아니, 애당초 내 영지의 일도 아니고 제 3자의 입장인 나한테 보상을 말하다니, 뭔 개소리세요?
하지만 그간의 행태로 미루어, 이럴 때 강하게 나가면 오히려 반격에 호되게 당하기 일쑤였지.
“...그, 음, 저... 제가 왜 보상을 해야 하나요?”
최대한 성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반문했다.
그러자 눈이 거의 일자로 샐쭉해지며 째려본다.
“......”
“...왜 그러시는데요?”
“어휴, 진짜 눈치가 더럽게 없는 건 알고 또 알았지만, 진짜 이 상황에도 이걸 묻는다고요?”
“......진짜 모르겠어서 그럽니다.”
“다 들었답니다.”
“뭘요?”
“......”
대뜸 저 한 마디만 던지더니 다시 입을 꾹 다문다.
이 상황에,
“어후, 답답해! 뭔데?! 말을 하라고! 말을!”
...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자가 몇이나 되려나?
난 ‘용사’였지, ‘용자’는 아니었다.
다그치지 않고,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햇님의 심정으로 지그시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뭔가 굉장히 억울하고, 분하고... 아무튼 여러 감정이 담긴 표정으로 혼자 변검(變瞼)을 한참 하더니 나직하게 말을 꺼냈다.
“...리비안느에게는 머리핀, 황녀님께는 헤어밴드를 선물했다고 들었습니다.”
야, 너두?
별것도 아닌 일로 비탄에 잠긴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이렇게 꼭 말로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자존심 상하고 속상하지만, 저만 못 받으면 더 열 받을 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녀님께만 아무것도 못 드려서, 이번 일정에 무언가 사갈 생각이었습니다.”
“제 거만요?”
네 거만이겠냐?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하지만 립서비스에는 돈이 들지 않는 법.
좋게, 좋게 넘어가기 위해서 입을 놀렸다.
“그건 아니지만, 성녀님 것만 좀 더 좋은 걸로 사려고는 했습니다.”
“아! 역시 그렇죠? 믿고 있었답니다.”
화사하게 미소짓는 성녀.
이쁘긴 더럽게 이쁘네.
“어어? 잠깐, 잠까아아!”
“왜 그러시죠?”
“지금 방금 대화를 없던 일로 만들려고 기절 시키려고 하셨잖아요?”
“칫...”
“불리하기만 하면 사람을 기절 시키고 보는 습성은 대체 언제 고치냐고요!”
“그러게 누가 숙녀에게 부끄러운 말을 하게 하래요? 흥!”
“...죄송합니다.”
“기다리지 못한 제게도 잘못이 있지요. 한 0.5% 정도?”
그게 말이냐 방구냐.
니년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해놓고 왜 내 잘못이 99.5% 인건데?
아오! 귀여워서 봐줬다.
“자, 그럼 준비하고 오크 부족으로 출발하시죠.”
“네에~ 참고로 전 목걸이가 좋답니다.”
“네네~ 참고합습죠.”
***
오크 족장, 크라카라훔의 거처.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간소하게 성녀와 그의 수행 사제 요한만을 대동하고 방문했다.
“여기 이분이 마독을 해주 해주실 거다.”
“취이이익. 못 했다, 주술사. 가능한가, 인간 여자?”
“대륙 유일의 성녀님이시다. 아무리 오크족이라지만, 여신의 은총을 모르지는 않겠지?”
“취이이익. 좋다. 해라, 빨리.”
“대신 조건이 있는데...”
“취익? 틀리다, 약속. 물러나는 것, 조건.”
“그럼 우리 그냥 가?”
“....취이이익. 말하라, 조건.”
.........
“취이이익. 알겠다. 해라, 빨리.”
어떻게 보면 무례하기까지 할 수 있는 조건의 수락과 함께, 마독의 치료가 이루어졌다.
다행히도 팔백...음...
뭐였지? 아무튼 엄청 ‘하꼬’ 암흑신교 녀석의 목적이 말살이 아닌, 협박이라 해주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성녀니까 쉬웠지, 평범한 사제 같았으면 피똥을 싸다 포기 했을지도 모르지.
***
그리고...
“성녀야~ 그만~ 그마아아안~~~~~ 먹고 죽을래도 없다고!!! 왜 자꾸 신성력을 대규모로 가져다 쓰는데!!!!!!!! 그마아아안, 제발... 엉엉엉엉.”
누군가의 외침은 성녀에게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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