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 ...또 망령에 사로잡히셨어요. -

-오셨습니까?
“너무 오랜만이라 서운한가?”
-오시지 말라는데 자꾸 와서 귀찮습니다.
“술이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매일 오셔야 했을 걸요?
“크큭. 그런가?”
-여기 술 먹고 싶어 하는 놈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일단 저부터도 술을 가져오신다면 이곳에 자주 오시라고 재촉하겠지요.
“그래, 미안하다. 이번에도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이라.”
-촤아아아악.
내 말과 함께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당연히 내 의지로...
-대장! 누가 보면 우리가 흡혈귀인줄 알겠습니다.
-가뜩이나 핏밥으로 살아왔는데, 죽어서도 피나 먹게 하고 너무한거 아니요? 으하하핫.
-징글징글하네요. 총대장님.
그들은 쉴새없이 입을 놀리며 피를 맞았다.
팔에서 쏟아졌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끊임없이 토해내는 피를...
심상 속에서 쏟는 피는 곧 내 정신.
상태창에서는 버서커화를 늦추기 위해서라도 이 짓을 하지 말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이들이라는 마약에 취해 버린 내 정신은 무수히 많이 분열되어 저들에게 동화되어 버렸기에...
그리고 이내 내 시선이 가장 구석의 그에게 머물렀을 때 그가 눈을 떴다.
-왔구나. 저번에는 아주 아까웠어.
온 몸이 사슬로 결박되어 있는 이.
내 옷, 얼굴을 똑같이 하고 있는... 얼마 전에 발현했던 버서커화의 또 다른 나였다.
-거의 다 왔는데. 하필 똥이라니. 더러운 녀석.
“똥 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잖아. 나도 좀 굴러봤지.”
-허세를 부릴 상대를 잘못 알은 것 아닌가? 네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전부 알 수 있다고.
“그래? 그럼 맞춰 봐.”
주어도 목적어도 생략된 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녀석.
-자살? 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야. 물론 죽어주면 나야 좋지. 그때야말로 나는 너지만, 너는 없으니까.
“틀렸는데? 죽긴 왜 죽어. 세상에 좋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했던 건 아니지만, 실제로 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고.”
잔뜩 허세를 담아 말했다.
진짜로 그럴 생각은 없긴 했지만, 만약의 상황이 오면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크크큭. 그럼 그러던가. 나야 기다림이 조금 길어질 뿐이지, 반드시 올 미래야. 지금도 서서히 다가오는. 크하하.”
“설령 그날이 온다고 해도 친구들이 날 막아 줄 거야.”
“누구? 여기 이미 죽어 자빠진 떨거지들? 아니면 현실의 그녀들? 불가능하다는 건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
그가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내 주위를 둘러싸고 시끌벅적하던 이들이 어느덧 침묵하고 그저 조용히 지금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둘 모두 나였다.
그들을 몇 번이고 죽음의 늪에서 건져낸 것이 나였고, 또 죽음으로 내몰은 어리석은 지휘관 역시 나였다.
모두가 입을 모아 어리석다고 외친 작전을 대성공으로 이끌기도 했으나, 당연히 성공했어야 하는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물러나기도 했다.
대표로 나와 있는 것은 저놈 하나지만, 저놈의 등 뒤에 숨어 있는 수많은 나의 시선이 느껴진다.
-내 차례야?
-아니야, 이번에는 내 차례야.
수많은 내가 튀어나와 현실을 차지하고자 한다.
반복하고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망령들과의 회동.
-크아아아악! 조용! 아직 내 차례가 끝나지 않았다!!!
나와 대화하던 내가 호통을 치자 뒤에서 중구난방으로 나오던 말들이 일순 멎었다.
잔뜩 찌푸려진 내 입에서 항변의 소리가 튀어나오는 그때.
-샤샤샤샤.
내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
“영주님! 정신 차리세요. 정신 좀 차려보세요.”
“리비안느인가?”
“오, 여신님!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으셔서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는데, 이 상태셨어요.”
“음...걱정을 끼쳐서 미안. 알다시피 내가 몸에 좀 문제가 있어서 종종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몰라. 그냥 냅두면 알아서 괜찮아 질거야.”
“그냥 냅두라고요? 식은 땀을 이렇게 흘리시는데요? 성녀님께라도 말씀드려야 하지 않나요?”
“이미 알고 있어. 그리고 두 손을 들기도 했고...”
“그런...”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면 좋겠는데? 걱정해줘서 고마운데 정말 괜찮아. 이 정도에 무너지지 않아. 절대.”
“네...믿을께요. 그럼 쉬세요.”
혼자 있고 싶은 내 마음을 읽은 듯 자리를 비켜준다.
-탁.
리비안느가 나가고 다시 정적에 잠든 나의 공간.
방금 전의 잔향이 뇌리에 아른거린다.
점점 [나]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분열의 끝은 파멸이리라.
비릿한 피 냄새가 계속 코끝에 남아있다.
망령에게 피를 쏟아냈던 팔이 욱씬거렸다.
애써 신음을 삼키며 상자를 제자리에 돌리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한숨 자고 나면 조금은 나아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
-짝!
어? 리비안느가 갑자기 왜 때리지?
-짝짝!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2대를 더 맞고 말았다.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황당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저 조신하고 단아한 리비안느가 이를 앙물고 싸대기를 날린다고?
그리고 그 대상이 나라고?
내가 혼이 나간 표정으로 생각하는 사이 다시 손을 올리는 리비안느.
“잠깐!”
“정신이 좀 드세요?”
이게 무슨 개솔...
대답이 없자 그새를 못 참고 다시 손을 올리는 리비안느.
“들었어! 자,잠깐! 갑자기 왜 그러는데!!”
“...또 망령에 사로잡히셨어요.”
“......”
참담한 표정으로 죄책감에 휩싸인 리비안느의 표정을 보니 차마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냥 잠깐 멍 때린 것 뿐이라고 하면 저기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니 그냥 잠깐의 헤프닝으로 끝내기로 했다.
“많이 아프셨죠? 죄송해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고...”
“아, 그랬었나? 고마워. 덕분에 빨리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
어차피 저 쪼만한 손으로 때려봐야 아프지도 않...겠지?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이후로도 내가 조금만 딴생각에 빠져 멍한 표정을 지으면 여지없이 리비안느의 손이 날아오게 될 것을.
...
“영주님... 뺨이 부으셨는데요?”
“음, 별거 아냐.”
“손자국이 남아있는뎁쇼?”
“어? 음... 솔직하지 못한 자의 업보랄까?”
“정신줄 놓으신 줄 알고 누가 뺨이라도 때렸습니까?”
“자네는 빙구같이 보여도 가끔씩 날카로울 때가 있다니깐.”
“리비안느죠? 의심이 가는 대상은 넷인데, 그 수호자님이야 그 어떤 상황에도 영주님께 손을 댈 리가 없고, 여기저기 바쁘시기도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성녀님이나 황녀님이 그러셨을 리도 없을 테고요.”
“저...정답! 사실 내가 평소에도 멍 때리길 잘하지 않나. 근데 그걸 리비안느가 오해해서...”
마치 영혼의 단짝을 만난 듯 말하지 않아도 내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것 같이 알아채는 바루스에게 그간의 고생을 털어놨다.
“오구오구 그러셨쪄요?”
그렇게 바루스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다.
해결책을 주지는 못 했지만, 그저 내 말을 들어줄 이가 있다는 것에 고마웠다.
“정말 안타깝지만 당분간은 그냥 이렇게 지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멍은 알고 때리는 게 아니라, 그냥 무의식적으로 때리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리비안느가 진실을 알게 되면, 많이 상심할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별수 없지. 크게 아프지는 않은데 피부다 보니 이렇게 자국이 남아서 좀 그렇네. 아무튼 고맙네. 덕분에 좀 후련해졌어.”
***
그가 모르는 뒷이야기...
이 사단이 나기 바로 전.
“영주님이 가끔 망령에게 사로 잡히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리비안느가 최대한 영주님을 현실에 붙들어 두셔야 합니다.”
“어찌하면 되나요?”
“뺨을 때리십시오. 온 힘을 다해서!”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럼 이대로 망령들에게 끌려가는 걸 보고만 계실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좀...”
“그곳에 오래 머물수록 악화가 가속화될 거에요. 부탁드려요.”
“...알겠어요. 해보겠어요.”
결의를 다지는 리비안느는 보지 못했다.
등을 돌리고 집무실로 향하는 바루스의 입꼬리가 한껏 치솟아 있음을...
누군가의 소박한 복수는 소박한 날개짓과 함께 날아올랐다.
‘어후, 속이 다 시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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