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의 병

“혹시 제가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황후가 이랑은 잠시 바라보고는 말없이 황태자를 감싸고 있던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그동안 모성이 눈앞을 가려 이랑을 볼 수 없었으나, 이제 그 간절함이 신께 닿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랑의 환술이 아니라 정말로 이랑이 자기 자식을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아들을 맡겼다.
이랑은 황태자를 살펴보았다.
“먼저, 지금 투여하고 있는 약을 중단해 주십시오.”
투여하고 있는 약은 아스피린.
황궁의는 황태자의 고통이라도 줄여주기 위하여 진통제를 주었지만, 그 약은 오히려 혈소판의 기능을 저하시키기 때문에 출혈이 더 심해지는 약이었다.
사로는 이랑이 치료를 하는 것을 휘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일부러 휘와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랑이 정말 의술을 배운 건 아니겠지?”
“네. 오라버니. 의술을 배운 건 아니에요. 하지만 황태자는 우리가 아니라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나아질 것이에요. 제가 보기엔 저 약 때문에 출혈이 더 심한 것 같거든요.”
사로를 믿기로 선택한 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로는 조금 전 이랑에게 언질을 준 상태였다.
“황태자는 저 약을 먹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쉬다 보면 저절로 나아질 겁니다. 의원 행세만 해주세요. 손에서 불꽃같은 걸 나오게 해도 좋고요.’
‘하, 참. 내가 환술사도 아니고 불꽃이 왜 나오냐고.’
사로는 몰랐겠지만, 신선은 도술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인체의 기를 운용하는 것을 통해 의료과 도술 그 모두를 행할 수 있었다.
‘신선이 괜히 신선이 아니지.’
이랑은 세르게이를 물리고 황태자의 다리를 먼저 살펴보았다.
살짝 긁힌 것 같은 상처에 피가 끊임없이 쿨럭쿨럭 나오고 있었다.
보통 이런 상처면 저절로 피가 멈출 터인데, 이 병은 혈액의 응고되지 않는 병이기 때문에 지혈 자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피가 많이 나온 것을 보아 겉은 긁힌 것 같이 보여도 속에서 출혈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랑이 다리 쪽으로 손을 뻗자, 다리의 피가 곧 멈추었다. 부족한 응고력을 도술로서 생겨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부의 출혈도 곧 줄어들었다.
그것을 본 의사가 재빨리 황제에게 알렸다.
“폐, 폐하 피가 멈추었습니다!”
“뭐라? 그게 정말인가?”
황제와 황후가 놀란 눈으로 황태자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이랑은 황태자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모든 인간은 몸 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있다.
그 기가 막혀있으면 몸의 흐름이 망가져 병을 얻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약하게 태어났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럴만했다.
이랑이 보니 황태자의 몸에 기가 운용되지 못하고 뭉쳐있었다.
그가 황태자의 몸에 손을 대자 여러 개의 바늘 같은 빛이 나와 황태자의 피부에 꽂혔다.
원래 빛이 안 보여도 고칠 수는 있지만 사로가 치료의 능력을 보여달라 했기 때문에 술수를 쓴 상태였다.
“오오, 이게 말로만 들었던 동양의 침술인가!”
니콜라이 2세는 매우 신기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개의 빛이 바늘처럼 보였다.
침술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것이 꼭 한의사 놓는 침인 줄 알 것이었다.
“아프진 않겠지요?”
줄곧 남동생 옆에 있었던 타티야나 공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아프진 않아.”
이강이 어린 소녀에게 미소를 짓자 타티야나 공주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황태자의 숨이 점차 고르게 되고 있었다.
빛을 거두자, 황태자의 몸의 기가 원활하게 도는 것을 이랑은 확인했다.
“잠이 드셨습니다.”
궁중의 세르게이가 황태자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앞으로 아플 일은 없을 것입니다. 상처가 나도 다시 보통 사람들처럼 다시 아물것이니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제야 황후가 안도하는 숨을 내뱉었다. 아까 이랑이 황태자에게 다가갈 때부터 숨까지 멈추고 모든 것을 세세하게 본 황후였다.
“황후 폐하 제가 왔습니다.”
그제야 라스푸틴이 헐레 벌떡 뛰어왔다.
그는 선재 동자의 방해로 수도로 진입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먼저 선재동자는 넘어진 노파로 변해서 그에게 나타났다.
“아이고 젊은이. 나 좀 도와주게.”
“황후가 날 부르시는데 이 노망난 자를 보았나!”
라스푸틴이 할머니를 넘어뜨리자, 주변에서 그를 보는 눈빛이 사나워졌다.
수도승 차림인 그가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라스푸틴은 주변의 눈을 의식하여 할머니를 일으켜주고는 부리나케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그다음 선재 동자는 어여쁜 아가씨로 변하여 라스푸틴에게 갑자기 나타났다.
“신성한 사제님 제가 고해할 것이 있사옵니다.”
라스푸틴은 그녀의 미모에 혹 했으나, 황후가 부르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정식으로 성직자로 임명된 적은 없었으므로 그녀의 고해를 받아줄 필요도 없었다.
“이, 이따가 보세. 왕궁으로 와서 라스푸틴을 찾게나. 꼭 찾아오게 알겠지? 지금 바빠서 가봐야 하네.”
“사제님! 지금 꼭 들으셔야 합니다!”
여인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잡았기에 그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몇 십분을 그녀에게 잡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너무 우는 탓에 라스푸틴은 그녀의 말을 절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인을 잘 달래주고는 재빨리 다시 황궁으로 달렸다.
세 번째로 선재 동자는 궁정 하녀로 변신해 라스푸틴을 막았다..
“지금 황후 폐하께서 공을 잠시 대기하라 이르셨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지체되고 나서야 라스푸틴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황후 폐하께서 이렇게 급히 불러내실 때는 언제고 왜 나를 찾지 않으시는가?”
아까 자신에게 대기하라 했던 하녀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제야 그는 손님방을 나가 다른 하녀들을 찾아 이곳에 왔던 것이다.
황후는 나아진 황태자를 본 기쁨에 라스푸틴에게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깨끗이 다 나았는가? 아이 혈색이 이렇게 건강한 건 처음 보네! 볼이 정말 빨갛구먼!”
핏기 없이 창백했던 아이는 어느새 장밋빛 뺨을 지니고 있었다.
“저 황후님, 여기 라스푸틴이 왔습니다.”
라스푸틴이 황후의 마음이 변할까 재빨리 자신을 더욱 어필했지만 이미 황후는 라스푸틴이 아니라 이강을 보고 있었다.
“정말 고맙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걸세.”
사로는 황후의 마음이 이랑에게 돌아선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이제부터 황후는 라스푸틴이 아니라 이랑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될 것이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마음이 약하고 부드러운 황후였다.
그녀는 안타깝게도 자신이 믿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랑이 나타나기 전에 라스푸틴이 정말로 영적인 지도자이며 황태자를 고쳤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이 어리석은 생각이 러시아 왕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라스푸틴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영향을 미쳤을 분만 아니라 군사 외교 정책까지 자신이 마음대로 하였다.
더불어 술과 여자를 좋아하여 그로 인해 러시아 궁정은 타락의 상징까지 되었다.
사로는 이 일로 인해 러시아 황실의 운명이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사로는 대한 제국, 아니 대한민국의 운명에 관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함께 식사하지.”
황후는 라스푸틴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사로 일행을 환대했다.
“저 황후님. 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로 인해 황태자 전하께서 괜찮아지셨나 봅니다.”
라스푸틴이 황후의 환심을 사러 계속 기웃거렸지만, 황후는 이미 이랑의 도술을 본 이후였기 때문에 그의 기도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 기도 고맙네. 돌아가서 계속 기도해주게. 황실의 안녕을 위하여 원래 성직자가 할 일이 그것 아니겠나?”
라스푸틴은 결국 이곳까지 온 소득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사실 고향에 간 목적도 그는 사기꾼으로 고발을 당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 갔다 온 것이었다.
황실에서 권력을 쌓았을 때는 그가 그 소문을 막을 수 있었으나 아무런 힘도 없는 지금 그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은 곧 황실까지 알려지게 될 것이 자명했다.
러시아 황궁의 식사는 정말 화려했다. 황후의 명에 따라 궁중의 요리사가 한껏 실력을 뽐냈다.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기 때문에 현대에서 못 먹어본 음식이 없었던 사로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르시라는 붉은 비트로 만든 수프에는 소고기가 덩어리째 들어 있었고, 크림소스로 소고기와 버섯, 양파를 졸여 만든 소고기 스트로가노프라는 음식도 있었다.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었기에 사로 일행들은 조금씩 덜어 그 맛을 느꼈다.
“이곳에 온 것을 환영하네. 최대한 오래 이곳에 머물러주게.”
휘와 이랑은 긴장하면서도 황후의 환대를 기쁘게 받았다.
4명의 공주들은 그들 앞에 앉아, 자신들끼리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연신 까르르하고 웃어대었다.
가끔 이랑과 휘를 보고 웃는 것을 보아 그들의 얼굴이 재미있는 게 틀림없었다.
러시아의 황후는 그 모습을 보더니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 자리에서 사로 일행에게 약속했다.
“황태자가 깨어나면 그 어떤 것이라도 그대들을 도울 것을 약속하지.”
***
사로는 자신의 시계를 꺼내 보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자정이 넘어서도 이용익이 나오지 않으면 안중근과 그의 동지들이 러시아의 감옥을 무력으로 점령할 터였다.
그걸 알면 아무리 이랑이 황태자를 구했다고 해도 러시아의 황제는 결코 조선을 믿지 못할 것이다.
사로의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먼저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황제가 먼저 말을 꺼내주기를 사로는 기다리고 있었다.
황태자 알렉세이가 긴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긴 꿈을 꾼 아이처럼 잠에 취에 몽롱해진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엄마? 내 딸기는요?”
뺨이 발그레 진 건강한 아이와 다름없어 보이는 황태자를 보고 황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던지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이기 전에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황제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사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정말 고맙네. 조선에 이렇게 훌륭한 명의가 있는지 미처 몰랐군. 조선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보게. 내가 최대한 돕겠네.”
사로는 그제야 기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황제 폐하. 저희는 러시아에 투자하기 위해 왔습니다!”
휘와 이랑이 놀라 사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사로가 이용익을 꺼내달라 말하기 위해 온 줄 알았던 것이다.
- 작가의말
이용익 좀 꺼내주세요.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