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의 도착

“폐하! 소신이 잘못했습니다. 폐하!”
이용익은 열에 뜰 떠 계속 헛소리를 하였다.
이랑이 도술로 그를 치료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너무 많이 쇠약해진 탓에 체력부터 회복시켜야 했다.
그의 기가 너무 약해 숨이 간신히 붙어 있는 정도였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못한 채 도술로 이용익을 재우고는 방을 나섰다.
“동지가 의술을 행할 수 있는지 몰랐소.”
방 문 앞에 있던 안중근이 걱정 어린 얼굴로 나타났다.
“그를 살릴 수 있겠소? 이러다가 자금은커녕 송장 하나 치우게 생겼소.”
“체력을 회복시킨다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어떻게 도울 수 있겠소?”
“열을 내리게 하는 약을 먹이고, 할 수 있으면 뭐라도 입에 넣어줘야 합니다. 미음이나 따뜻한 물이라도 주시지요.”
“그렇게 하겠소.”
중근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이랑이 생전 쉬어보지 않았던 한숨을 쉬었다.
사로와의 재회가 미뤄졌기 때문이었다.
이용익은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다. 이따금 헛소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다음 날, 이랑은 아침에 독립군들의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잠이 깼다.
“무슨 일이오?”
“오늘 3시쯤 이준 대감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도착한다 하오. 그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 훈련을 하는 중이오.”
중근이 훈련을 나가다 말고 이랑 방문에 서서 이야기했다.
“같이 가시겠소?”
“가고 싶으나, 환자가 있어서 좀 어렵겠소.”
“그렇지요. 알겠소. 무사히 이준 대감을 데려오리다.”
중근이 나가자 이랑은 이용익이 있는 방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이준 대감은 안중근이 이끄는 독립군도 있었지만, 사로가 보낸 야폰치크의 부하들도 있으니 걱정 없었다.
이랑은 사로의 치밀한 계획에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그만큼 영민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좀 어떠시오?”
이랑이 물어보자 이용익이 힘없는 소리도 대답했다.
“죽다 살아온 느낌이지요. 물 좀 주시겠소?”
밤새 이랑은 이용익의 방에서 그를 살폈다.
그리고 어스 푸름한 새벽녘이 되어서야 선잠이 들었다.
다행히 그의 정성이 통한 건지, 도술로 이용익의 기가 원활하게 돈 것인지 이용익은 아침이 돼서 조금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랑에게 물었다.
“폐하의 내탕금을 찾으러 가야 하는데 내 이리 누워있으니 힘들게 되었소. 이준 대감이 오늘 온다고 들었소. 맞소?”
이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 돈은 내 돈이 아니오. 폐하께서 밀사가 올 때 쓰라고 내어주신 돈이요. 내가 빨리 사람을 보내어 돈을 찾아야겠소.”
“우리 쪽 사람이 벌써 가있소. 들어보니 예치한 돈을 찾으려면 은행장의 확인서까지 있어야 한다고 들었소.”
“내가 직접 가면 은행장의 확인서까지는 필요 없소. 하지만 도저히 이 몸으로 나가기 어렵겠구려.”
이랑이 볼 때에도 이용익은 좀 쉬어야 했다. 며칠 더 쉬면 분명히 나아질 것이었다.
“체력을 먼저 회복해야 하오. 일본에 동지들이 있으니 믿어보시지요. 대신 위임장과 예치증서를 주시겠소? 내가 빠른 시일 내에 전달하리다.”
이랑은 이용익을 도술로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선택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것이 신선의 방법이었다.
인간이 마음을 먹으면 그들이 선택한 대로 내버려두는 것.
이용익은 곁에 있는 동지를 믿는 것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내가 원래 체력 빼면 시체인 사람인데, 어찌 이렇게 되었나 모르겠소. 돌봐줘서 고맙소. 위임장을 써주겠소. 펜을 주시오.”
이용익의 손이 움직이자 삐뚤빼뚤한 글씨로 위임장이 완성되었다. 그는 도장까지 찍은 후, 도장과 함께 이랑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다시 누워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랑은 이용익을 도술로 그가 편히 잘 수 있도록 회복시켰다. 그리고 그 증서들을 가지고 창밖으로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
벌써 4월인데 배가 연해주 가까이로 가자 아직 쌀쌀했다.
북쪽 기후에 익숙하지 않은 이준은 괜스레 콧물을 훌쩍였다.
대한 제국의 황제는 아직 일본의 감시 하에 있었다.
그는 고종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블라디보스토크행 배를 탄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다.
[내가 살해당해도 나를 위해서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마라. 너희는 특명을 다하라. 대한 제국의 독립주권을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고종은 해당 내용을 어새가 찍힌 신임장 및 친서와 함께 헐버트를 통해 전해왔다. 헐버트는 이 말을 끝으로 이준에게 당부했다.
“폐하의 마지막 전언일세. 조국의 운명은 그대 손에 달렸으니 부디 몸조심하게나. 나는 일본으로 먼저 건너가겠네.”
“일본에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도와야 할 사람이 있네. 자네는 자네의 일을 하면 되네.”
헐버트는 그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헐버트는 대한매일신보에서 전보를 받고 오는 길이었다.
[다이이치은행장 만남 주선 요망]
이강이 보냈던 전의 밀사들에게 온 전보였다.
그는 몇 글자 되지 않은 글자의 행간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읽어낸 듯했다.
그는 이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행운을 비네. 우리가 성공을 한다면 자네의 앞길이 탄탄대로일걸세.
헐버트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모자를 쓴 뒤 급히 나갔다.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 안에서 황제의 억울함을 담은 친서를 읽고 또 읽었다. 절절하고 간곡한 편지였다.
[대한 제국은 러일 전쟁 이전에 이미 중립을 선언하여 세계가 대한 제국이 이미 중립국임을 다 알고 있을 겁니다. 또한 우리는 영국, 청국, 러시아, 미국과 각각 조약을 체결하
였으므로 이번 회의에 외교관을 파견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하지만, 1905년 11월 18일 일본은 국제법을 위반하고 황후를 살해하였으며 대한 제국의 외교 대권을 강제로 빼
앗았으니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이제 저의 특사단을 보내 일본의 불법 행위를 각국의 위원에 알리고자 합니다. 그대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자신을 최대한 숙이고 각 나라에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왜 이지경까지 왔는가?’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민비가 좀 더 자신을 굽혔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때 황제가 을사늑약에 관련된 이들을 모두 처형하지 않아서 그랬을까?
이준은 계속 과거에 대한 후회를 계속 곱씹었지만 무엇 하나라도 정답인 것은 없었다.
이준은 편지를 접어서 자신의 품속에 다시 넣었다.
이제 이것을 가지고 첫 번째로는 러시아와 청국 그리고 미국, 영국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의 의원들에게 보여주고 만국 회의에서 대한 제국에 대한 의견을 물을 것이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며 갑판에서의 찬 바람을 맞았다.
배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선착장에 거의 닿았다.
닻을 내리고 배가 정박하자, 큰 여객선인데도 불구하고 몸도 출렁거렸다.
그 바람에 이준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의 뒤에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누군가 파고들었다.
예리한 칼이 그의 목덜미에 닿자, 그는 몸이 뻣뻣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조용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이준은 클클 거리는 뱀이 내는 소리와 비슷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한 사내가 그를 부축해 주는 척 하면서 그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자신에게 조선말을 한 것으로 보아 조선인이었다.
그는 칼을 들지 않은 다른 한쪽 손으로 그의 품을 뒤져 황제의 밀서를 찾아냈다.
“이게 여기 있었군.”
“그쪽도 조선의 백성 아니오? 조선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그 문서를 다시 내게 주어야 할 것이오. 나라를 살릴 수 있는 문서요. 이리 내시오.”
“아니, 아니지. 이건 내 기회의 문서야. 나라는 이미 망했어. 망한 것을 다시 세우려 해봤자 헛수고라고. 이 기회로 나는 누구보다 높이 올라갈 수 있지.”
그는 칼로 위협하며 이준을 이제는 정박한 배 밖으로 끌어내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여기 계신 외국 나으리들이나 여자들이 당신의 피를 보기 전에.”
이준은 꼼짝없이 그에게 잡혀서 끌려갔다.
“일단 당신을 잡아가야겠어. 총독께서는 황제를 겁박할 증거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거든. 물론 이 문서도 좋은 증거이긴 하지.”
이준을 붙들은 자가 눈짓을 하자 주위에 있던 자들이 이준을 에워쌌다.
그들은 일본의 비밀경찰이고, 이준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자는 설한규였다.
그때였다.
“와, 몇 명 있나 보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아따. 많이도 왔네?”
큰 덩치의 석돌이 이준을 에워싸고 있는 비밀경찰들의 목덜미를 잡고 내팽개쳤다.
그의 힘에 비밀경찰들이 힘없는 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들은 바로 일어나 석돌한테 총을 겨눴다.
석돌을 보고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던 설한규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쏴 버려!”
그러나 그들이 석돌을 쏘기도 전해 독립군들이 비밀경찰들을 하나둘씩 총으로 쏴 죽였다.
자신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이 총으로 쓰러지는 것을 보고 설한규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움직이면 이 자의 목숨은 없다.”
그는 이준의 목을 더욱 더 졸랐다. 숨이 막혀 새빨개진 이준이 커헉 하는 소리를 냈다.
“저, 저런.”
그 모습을 보고 석돌이 잠시 주춤했다.
설한규는 이준의 목덜미를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총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독립군들의 눈을 피해 달아나기에는 역부족 같았다.
‘다 된 밥에 저놈이 또!’
설한규는 석돌을 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이곳에서 석돌을 볼 지는 꿈에도 몰랐다.
또 자신의 일을 그가 방해하자 설한규는 할 수 있다면 지금 그를 뭉개버리고 싶었다.
독립군들의 총구가 이제는 한 사람만 향하고 있었다.
총들이 하나둘씩 자신을 향해 오자 설한규가 겁을 먹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
그는 이준을 끌어당기고 한쪽 손에는 칼을 든 채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마주 오는 트럭에 몸을 날려 실었다.
그러고는 이준을 트럭 위로 억지로 데려갈 수는 없었는지 바닥에 내팽개쳤다.
“저 자가 황제의 서신를 가져갔소!”
이준이 트럭에 타지 못하고 바닥에 굴렀다.
그는 억압되었던 목덜미가 풀어지자마자 아픈 것도 잊고 고래 고래 소리 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독립군들이 트럭에 총을 조준하였으나 안중근은 이를 저지하였다.
“민간 트럭이다. 무분별한 살생은 금한다.”
독립군들은 치를 떨며 분개하였지만, 안중근은 그들을 침착하게 다독였다.
“우리의 목적은 이준 대감을 보호하는 것이다. 대감을 모셔라.”
설한규는 트럭에 타고 멀어지는 독립군을 향해 여유롭게 손을 흔들기까지 하였다.
황제의 친서를 탈취하였으니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무리들이 있었다. 바로 사로가 보냈던 야폰치크의 조직원들이었다. 조직원들은 설한규 모르게 그를 쫓았다.
“분하오. 이렇게 허무하게 황제의 서신을 잃어버리다니!”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나 분통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황제의 서신은 우리가 찾아보겠소. 하지만 당신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소? 마음을 다 잡으시오.”
안중근의 말이 맞았다. 이준은 원통한 마음을 표현할 시간도 없었다. 그는 또 다른 밀사인 이상설을 만나야 했다.
“이상설 대감은 언제 오기로 했소?”
“이상설 대감은 현재 중국 지린성 용정에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으니, 기별하면 내일 늦게 도착할 것이오.”
“황제의 서신을 잃어버렸으니, 우리의 말을 뒷받침할 증거들이 필요하오. 먼저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할 것이오. 그곳에서 일본이 국제법을 어겼다는 증거를 모아야 하오.”
“그전에 노어(러시아어)는 하실 수 있으십니까?”
“그, 그건······”
이준이 망설였다. 러시아 말은 조금 할 줄은 알았지만 황제를 설득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前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인 이위종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7개 국어가 능통하오니, 그와 함께 하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좋소. 황제의 친서는···.. 내가 만들겠소.”
“네?”
“우리가 황제의 명을 받은 사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친서가 꼭 필요하오. 하지만 그걸 잃어버렸으니···.. 내가 몇 번이나 봐서 다 외우고 있으니 만들어서 가야겠소.”
안중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황제의 서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신들이 열강의 국가들을 설득하는 것. 그것만이 조선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이었다.
- 작가의말
30화가 가까이 오는 군요 ^^ 월 수 금 연재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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