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장점에서 만난 이

사로와 휘는 일본 도쿄의 한 거리에서 서 있었다.
사로는 야폰치크에게 긴밀한 명을 내렸다.
“저번에 부탁한 정보를 가져와.”
야폰치크는 사로를 보고 끄덕이며 조직원들과 함께 도쿄의 뒷골목으로 사라졌다.
도쿄의 거리는 벚꽃이 다 지고 푸른 새싹이 돋아난 나무들이 즐비해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거리의 상점들과 길거리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 위로 작열했다.
거리에는 서양식 의복을 입은 신사들과 기모노 차림의 여성들이 뒤섞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리 한쪽에는 구미식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건물들 사이에는 목조 전통 가옥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로는 일본에 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거리가 신비로워 계속 눈에 담았다.
“오라버니 일본어를 하실 줄 아십니까?”
“그렇지. 사업을 하다 보면 언어는 해야 하지 않겠느냐. 일본어와 영어는 할 줄 안다. 연이는 청국어와 노어(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것 같던데 일본어는?”
사로는 일본어를 할 줄 몰랐다.
애니메이션에서 배운 몇 가지 단어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선재 동자가 사로의 머릿속의 울림을 통해 말을 걸었다.
‘사로 낭자, 모든 말을 번역할 수 있는 여기 선재 통역기가 있습니다.’
‘그래? 너무 잘 됐다. 그럼 부탁해!’
“할 줄 알지요. 오라버니는 좀 더 분발하셔야겠습니다. 겨우 두 개 언어만 아시지 않습니까?”
사로가 휘에게 한쪽 눈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혀를 내밀었다.
“이 녀석이!”
휘가 놀리는 사로를 잡으러 뛰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어색했던 오라비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사로에게 정말 가족이었다.
특히 이번 여정에서 휘와 함께 하면서 끈끈한 가족의 애정을 느꼈다.
사로는 한 번도 아버지 말고는 다른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곳에 와서 어머니, 오빠 둘 그리고 언니같은 정이가 생겼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은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휘가 사로에게 말했다.
“잠깐만, 아까 은행장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만나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네. 맞아요.”
“내일 밤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주최하는 무도회가 열린다는데?”
휘가 신문 가판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신문 1면에는 일어로 큼지막하게 [다시 열리는 로쿠메이칸 무도회]라는 제목과 함께 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로쿠메이칸이라······’
신문을 자세히 읽어보니 은행장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주최하는 무도회는 도쿄 중심가에 있는 로쿠메이칸 이라는 사교장에서 열린다고 쓰여있었다.
사로가 아는 로쿠메이칸이라는 사교장은 전 외무대신 이네우에 가오루의 외국 손님 접대용 사교장으로 서양식의 무도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이곳은 호사가들이 [서양을 따라가려하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무도회]라고 비판했던 무도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서양식 예법을 몰라 비웃음을 사곤 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많은 외교들이 이루어졌지만, 결국 이네우네는 세간의 비판과 함께 외무대신을 사임했다.
하지만 이네우네가 사임한 후에도 여전히 이 사교장은 외교의 발판이었다.
“우리 이렇게 하고는 무도회에 갈 수는 없어요. 오라버니.”
사로가 자신의 옷을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사로와 휘의 옷은 엉망이었다.
조선에서 떠날 때는 멋들어진 정장을 입고 배를 탔지만 옷이 몇 벌 밖에 없었으니 몇 주가 지나자 그들은 거지꼴을 겨우 면한 상태처럼 보였다.
“선재 동자, 혹시 이 옷을 드레스로 바꿀 수는 없어?”
사로는 선재 동자를 불러 물어보았지만, 선재 동자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그런 건 못해요.”
“하긴, 선재 동자가 요정 할머니는 아니지······”
“네? 요정 할머니요?”
“아, 아냐.”
사로는 신데렐라처럼 요정 할머니가 딱 나타나길 바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로의 환상 속에 존재할 뿐이었다.
“일단 양장점에 들리죠. 맞춤복은 못 입더라도, 그곳에 가면 어쨌든 옷이 있을 테니까요.”
“무도회가 어떤 곳이냐?”
‘아, 이런······ ‘
사로는 무도회를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많은 소설에서 읽고, 영화를 봤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사람인 휘는 전혀 모를 것이다.
“여성과 남성이 서로 안고 춤추는 거예요. 책에서 봤어요.”
“뭣? 여성과 남성이 왜 서로 안는다는 것이냐. 어허! 남녀가 유별나거늘.”
“예. 예. 오라버니. 지금 춤 가르칠 시간은 없으니, 오라버니는 그 잘생긴 얼굴로 참석만 해주시면 됩니다.”
“지금 내, 내가 잘, 잘생겼다고 지금 말한 것이냐?”
“네. 오라버니. 지금 이렇게 거짓꼴을 하고 있어도 계속 여성들이 오라버니 쪽만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을 못 느끼셨습니까?”
“으응?”
휘가 주변을 향해 고개를 돌려 휙 돌아보자, 몇몇 여성들이 휘가 재미있는 말도 안 했는데 까르르 웃고 지나갔다.
‘그래, 저 얼굴이 유머지. 아주 재미있어.’
사로는 휘가 계속 고개를 휙휙 돌리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일단 양장점으로 가면 맞춤은 아니겠지만, 남는 드레스나 턱시도가 있을 것이다.
사실 옷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만나려면 일단 로쿠메이칸의 초대장이 있어야했다.
일본에서도 1%의 높은 지위인 사람만 받을 수 있다는 황금 티켓 말이다.
***
양장점에 도착한 휘와 사로는 때아닌 문전 박대를 당해야 했다.
“아이고. 여기가 무슨 옷 나와라 뚝딱하면 만들어지는 곳인 줄 아십니까? 없어요. 안 그래도 무도회 가실 손님들은 벌써 한 달 전부터 옷을 짓습니다. 귀족분들이 맞기는 한 겁니까?”
양장점 주인이 사로와 휘의 옷차림을 보고 혀를 끌끌 찼다.
도쿄 시내의 다른 양장점을 가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큰일인걸. 초대장도 없는데, 입고 갈 옷도 없으니까. 다른 방법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만나봐야겠어.”
휘가 무거운 표정을 하며 말했다.
“일단 거기서 일하는 하녀라도 포섭해야 해요. 로쿠메이칸은 그냥 무도회가 아니에요. 그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국제적 외교 회의와 비슷하거든요.”
사로가 작은 소리로 휘에게 속삭였다. 그때 양장점의 여러 옷 사이로 금발머리가 삐죽 보였다.
선재 동자가 사로에게 얼른 주의를 주었다.
“사로 낭자님. 조심하세요. 지금 어떤 여자가 낭자님과 휘 도령을 주시하고 있어요.”
사로가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 어떤 금발 외국인 여인이 넓게 펼쳐진 치맛자락과 부채를 들고 사로 일행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사로와 눈이 마주치자 그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로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혹시 조선인이세요?”
한국어로 또박또박 발음하는 것을 보고 사로와 휘는 매우 놀랐다.
“여기 있다 보니 조선말이 들려서······”
“아! 네! 그런데 누구?”
사로는 눈을 깜박였다. 일본 도쿄 한복판에 조선어를 하는 외국인이라니!
“누, 누구세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안녕하세요. 저는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이라고 해요.”
“손탁?”
“네. 혹시 손탁빈관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손탁 빈관이라면······”
1902년 덕수궁 옆에 손탁호텔이 세워졌다.
이 호텔은 프라이빗 호텔로 외국 귀빈들을 초대하여 파티하는 곳이었다.
고종은 그녀를 매우 총애하여 파티의 실내장식과 요리 그리고 외국 손님 접대를 맡겼었다.
그 빈관의 여주인이 바로 손탁이다.
“아무튼 여기서 조선인을 보다니 동향인을 본 것처럼 반갑네요. 시간이 되신 다면 차나 한잔하실까요?”
“네. 좋습니다.”
사로는 양장점에서 나와 손탁을 따라가면서 매우 즐거워졌다.
‘일본에서 만난 이가 황실 전례관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지?”
손탁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우아한 손놀림으로 마시면서 사로와 휘에게 물었다.
“일본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이신가요?”
“아니요. 저희는 일본에서 할 일이 있어서 왔어요.”
“그렇군요. 저도요. 저도 이곳에서 할 일이 있어서 왔답니다.”
그들은 말없이 차를 마셨다. 서로를 탐색하는 중인 것이다.
손탁은 휘와 사로를 커피를 마시면서 눈에 담았다.
그것은 사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선재 동자가 사로에 귀띔했다.
“저 사람의 가방에 초대장이 있어요. 장소가 로쿠메이칸인 걸 보아 우리가 내일 저녁에 가려는 곳과 일치해요.”
사로는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어떡하면 덜 뻔뻔하게 우리도 초대장을 달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덜 뻔뻔한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일을 해결하려면, 온갖 수단을 쓰더라도 개의치 말아야 한다.
“저, 저기”
“두 분 말이에요.”
사로와 손탁은 눈치를 보다가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먼저 이야기하세요.”
사로가 말하자, 손탁은 결심한 듯이 눈을 질끈 감고 이야기했다.
“저, 저와 무도회에 같이 가주시면 안 될까요?”
“네?”
“사실 조선에서만 파티를 열어봤지, 일본에서 파티에 초대받은 건 처음이에요. 그런데 꼭 파트너를 데리고 와야 한다고 해서요. 전 일 때문에 잠시 일본에 있는 것이라 일본
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근데 거리에서 두 분을 보니 둘 중에 한 명이 저와 파트너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손탁이 손을 벌벌 떨면서 이야기했다. 항상 남자 쪽에서 에스코트를 했기 때문에 그녀가 남자에게 부탁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파트너는 한 명만 필요한가요?”
손탁의 말에 사로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무도회에 휘가 갈 것인가. 자신이 갈 것인가 망설일 필요조차 없었다.
아까부터 손탁은 휘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외모로 밀렸나?’
사로는 슬펐지만 어찌 되었건 초대장을 받았다는 게 더 중요했다.
“네 일단은요. 사실 제 파트너로 일본인 한 명을 소개받았기는 했어요. 그런데 저는 일본어를 전혀 못하거든요!”
그녀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리곤 바로 변명했다.
“원래 5개 국어 하는데, 일본어만 못해요!”
“괜찮아요.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제 오라버니가 도와주실 수 있을 거예요.”
“오라버니? 엇! 혹시 여성분이세요? 어쩐지. 묘하게 선이 곱다고 생각했어요.”
“네. 아무래도 여성의 몸으로 다니기가 불편하니까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원래 파트너였던 일본인을 제 파트너로 함께 데려갈 수 있을까요? 저도 무도회에 가보고 싶어서요.”
“좋아요! 안 그래도 한 분만 데려가려고 해서 미안했는데, 잘 됐네요!”
손탁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런데, 그런 옷차림으론 곤란해요. 두 분 다.”
사로와 휘의 옷차림을 보는 손탁의 눈썹이 들어올려졌다가 내려갔다.
“제가 드레스와 턱시도가 몇 벌있으니, 제 숙소로 가요!”
그 말에 사로가 기분 좋게 그 말을 받았다.
‘여기 있었네. 내 요정 할머니가!’
-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공지드린대로 30화부터는 월, 수, 금으로 연재가 됩니다. 30화는 수요일에 올라옵니다. 오늘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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