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대한 유산

'미스 손탁이 왜 이곳에···.. 젠장. 임페리얼 호텔에 묵고 있나 보군.’
시부사와는 처음으로 자신이 외국인에게 무조건 뿌렸던 초대장을 후회했다. 대체 무슨 장난을 치려고 이곳에 온 걸까?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손탁을 바라보았다.
“파티가 매우 성대합니다. 실내 장식도 멋지고요.”
손탁은 그런 시부사와의 눈초리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일본 국기와 미국 국기 등 여러 나라 국기들로 벽면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칭찬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조선의 국기는 보이지 않았다.
“과찬이십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영광이군요.”
시부사와는 겉으로 미소를 유지한 채 예의 있게 손탁을 대했다.
“주최자 셔서 말씀드리는 건데, 오늘 파트너가 안 오셨거든, 저한테 춤을 신청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손님들이 춤추기를 고대하고 있거든요.”
손탁이 센스 있게 시부사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부사와는 그제야 깜짝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많은 외국인들이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게졌다. 그는 주최자가 춤을 먼저 춰야 한다는 에티켓을 모르고 있던 것이다.
시부사와가 눈치를 채고 손탁에게 춤을 청하자, 손탁은 그에 화답하여 시부사와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음악이 시작되었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서로 손을 잡고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시부사와가 자신과 손을 잡고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춤을 추고 있는 손탁에게 얼른 감사의 표시를 했다. 그는 손탁이 도움을 준 것을 크게 고마워했다. 그 바람에 경계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감사합니다. 역시 조선의 황실 전례관이십니다. 덕분에 무도회가 성공적이게 될 것 같습니다.”
“천만에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시부사와 씨를 만나고 싶었는데 우연히 제가 묵는 호텔에 초대장이 와있더군요.”
손탁이 시부사와의 발에 밟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의 팔을 가볍게 잡고 한 바퀴를 돌았다. 음악이 끝나고 시부사와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손탁은 그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말을 더 걸었다.
“호텔에 있던 제 친구들을 소개해도 될까요?”
시부사와는 곁눈질로 손탁을 살폈다. 대체 그녀의 계책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어긋났다. 그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떡이자 손탁이 재빨리 자신의 친구들에 손짓을 했다. 시부사와가 보니 자신의 아들이 웬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키라 나나코입니다.”
나나코 라고 불리는 여성이 서양 예법에 따라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일어섰다. 아들의 표정은 긴장을 해서인지 표정이 딱딱해 보였다. 하지만 나나코를 보는 눈빛은 따스했기 때문에 시부사와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제 아들의 파트너가 대체 누구일까 했는데, 바로 나나코 양이었군요.”
“어머, 제 파트너의 아버지이시군요. 오면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혹시 성이 아키라라고 하셨습니까? 조부님이 아키라 공작이신가요? 생각해 보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제분들이 모두 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조국으로 돌아오셨나 보군요.”
“네. 제 오빠와 함께 왔어요. 지금은 미스 손탁의 파트너지요.”
사로는 자신의 오빠를 은행장에게 소개했다.
이 파티장에서 그는 큰 키에 빛나는 얼굴을 가진 젊은이로 등장하자마자 뭇 여성들의 눈빛을 한눈에 받았다.
시부사와는 나나코와 유우신이 대체 미스 손탁과 무슨 관계인지 궁금했다.
‘저들이 정말 나나코와 유우신은 맞는 것인가? 파티가 끝나자마자 조사를 해야겠군.’
“파티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미스 손탁과 무슨 관계이십니까?”
“저는 독일에 있는 글라이스 루츠 법률 사무소에서 일합니다. 그곳에서 미스 손탁의 법률 대리인을 맡고 있습니다.”
휘가 사전에 준비된 말을 하자 시부사와가 끄덕였다.
“미스 손탁의 일로 일본으로 가야 했는데 마침 여동생이 일본에 가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마침 조부모님도 편찮으시고 말이죠. 그래서 겸사 겸사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덕분에 멋진 파티에도 참여하게 되었네요.”
“그렇군요. 파티 잘 즐기시길 바랍니다. ”
시부사와가 그들과 인사하고 다른 손님들하고도 인사를 하러 발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손탁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다시 말을 걸었다.
“저는 이 무도회가 끝난 후, 독일로 돌아가려고 해요.”
손탁이 말하자, 시부사와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그는 돌아서려던 발을 다시 제자리로 갖다 놓았다.
“아니 왜요? 조선에 호텔이 있지 않습니까?”
“그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다녀오려고요. 사실 은행장님께만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희 큰 고모께서 돌아가시면서 제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답니다. 그 유산을 받으러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법률 대리인도 만났고요. ”
“아! 축하드립니다. 돌아가신 분은 유감이지만. 잠깐, 축하할 일이 맞죠?”
“네. 돌아가신 고모님과의 친분은 그렇게 깊지 않았어요. 저한테 좋은 일이죠. 그래서 말인데, 그 유산을 전부 저는 다이이치 은행에 맡기려 한답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에는 은행이 부실하잖아요. 유산이 5천 마르크나 되는지라. 괜찮으시다면 잠깐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시부사와는 무도회장에 있는 괘종시계를 잠시 바라봤다.
태프트 장군이 올 시간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는 조선의 황실 전례관으로 활동했던 미스 손탁이 조선을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간다니 흥미로웠다.
유산을 받으면 조선에 있는 그녀가 쓸 수 있게 은행에 맡겨야 할 텐데 손탁이 말한 것처럼 조선에는 그만큼의 금액을 맡을 수 있는 은행은 없었다.
바로 자신이 조선이 은행을 세우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5천 마르크라······’
시부사와는 머리 회전이 빠른 은행원으로서 머릿속으로 셈을 하고 있었다.
유산을 전부 다이이치 은행에 맡기겠다니 다이이치 은행으로서는 큰 금액을 맡기는 고객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 돈 계산에 손탁을 의심하던 눈을 거두어버렸다.
“좋아요. 오늘 중요한 손님이 있는데 꽤 늦으시는 것 같군요. 오시기 전에 잠시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시부사와는 그 순간 모든 신령들이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은행에 막대한 예금을 넣는 외국인과 미국 장관이 한꺼번에 자신의 무도회에 참석하다니. 다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
시부사와가 손탁과 휘를 데리고 사라지자, 사로는 도쿠지 앞에서 수줍은 미소로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제가 춤 신청을 하게 하실 건 아니죠?”
춤 신청은 남자만이 할 수 있었다.
사로의 지적에 얼굴이 새빨게진 도쿠지는 사로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의 한 가운데로 끌었다.
춤을 추는 그녀는 정말 붉은 꽃처럼 보였다.
도쿠지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서양 춤을 배우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독일에서 왔다는 나나코는 일본에 있는 다른 여자들과 다른 면이 있었다. 조용하고, 수동적인 여자들과 다르게 그녀는 자신감이 넘치고 싱그러웠다.
그동안 유럽인들을 동경하던 도쿠지로서는 그녀의 모습이 새롭게 다가왔다.
“오빠는 따분한 일을 하러 갔네요. 시부사와 상이 없었으면 심심했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그런데 어떻게 미스 손탁의 파트너가 되셨던 거예요?”
“임페리얼 호텔 사장과 미스 손탁은 서로 아는 사이더군요. 아버지가 임페리얼 호텔의 모든 외국인에게 초대장을 보내셨거든요. 보통 그곳은 지체 높은 분들이나 사업가가 오니까요.”
“그런데요?”
“미스 손탁이 호텔 사장을 통해 저희 집으로 서신을 보냈어요. 자신은 파트너가 없으니, 주최자의 아들이 파트너를 해주지 않겠냐고 말이죠.”
“그래서 오게 된 것이군요.”
“예. 대신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과 파트너를 할 수 있을지 몰랐지만요.”
“고맙습니다. 저와 오빠가 일본에 빨리 도착하는 바람에 파트너가 바뀌었네요.”
그말을 끝으로 음악이 끝나자 사로는 춤의 끝인사로 살짝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다른 음악이 시작되자, 사로를 보고 다른 신사들이 몰려들었다. 그녀에게 춤 신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도쿠지는 그 모습을 보고 아쉬움을 느꼈다. 그는 파트너가 바뀌어서 더 좋았다는 말을 그녀에게 차마 전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여성들과 춤을 추지 않은 채 다른 신사와 춤을 추고 있는 사로를 강렬하게 쳐다보았다.
한편, 손탁과 휘는 시부사와와 로쿠 메이칸에 마련된 작은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막대한 돈을 예치한다는 말에 시부사와 은행장은 할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돈을 운용만 할 수 있다면 다이이치 은행의 미국 진출은 꿈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응접실에 온 손탁은 로쿠 메이칸이 이렇게 멋진 건물일지 몰랐다며 계속 딴 소리를 했다.
시부사와는 그녀의 행동에 안달이 나서 엉덩이가 들썩들썩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조선에 좀 더 머무실 생각이십니까? 독일로 아예 가시는 건 아니시고요?”
“네. 이제 저는 독일에 있는 살아있는 친척이라고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유산 문제만 해결되면 계속 조선에 머무를 생각이에요. 그래서 다이이치 은행에 맡기려는 거고요.”
다이이치칸교 은행은 일본 은행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중앙은행으로써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손탁이 다이이치 은행에 예치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류를 좀 보고 싶은데요.”
“제가 유산을 받았다는 문서 말이시죠? 꼼꼼하시네요.”
“정확한 것이 좋으니까요.”
휘는 미리 준비했던 손탁의 문서를 꺼냈다. 휘는 몰랐겠지만, 손탁의 문서는 진짜였다.
그녀에게 정말로 막대한 유산을 남긴다는 유서와 사인이 들어 있었다.
시부사와는 손탁의 문서를 꼼꼼히 들여다보고는 위증의 흔적을 못 찾겠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더 이상 문서를 들여다보는 것을 그만하였다.
“이 정도면 됩니다. 서류 준비를 정말 잘해오셨군요. 이 금액을 다이이치 은행에 맡기신다니 이렇게 감사할 때가요.”
“저야말로 감사하죠. 혹시 예금금리를 좀 조율이 가능하실까요?”
“당연합니다. 다이이치 은행에 맡겨만 주신다면 최고 상품 금리로 해드리겠습니다.”
“은행장님이 이렇게 말이 잘 통한다니, 일본에 오길 잘했네요.”
“최고의 상품으로 모시겠습니다.”
손탁은 정말 맘에 든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독일에 가서 유산 상속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면, 호텔을 일본에 낼 수도 있겠어요. 여기 로쿠 메이칸을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요.”
“조선의 황실 전례관이 아니셨습니까? 조선과 관계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제 호텔이 조선에 있으니, 조선의 황실의 전례관도 맡은 거지요. 일본에 제 호텔이 있으면 여기서 또 할 일이 있지 않겠어요?”
손탁이 말하자, 시부사와는 흡족한 웃음을 내었다. 그는 손탁의 이 말에 경계심을 좀 더 낮추었다.
‘역시 외국인은 외국인이군.’
“저는 사돈이 러시아 공사관이라 조선에 오게 된 것뿐이랍니다. 사업가에게 국가가 뭐 그리 중요한 가요?”
손탁의 말에 시부사와가 격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공감의 표시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업을 하려고 해도 일단 조선에서 제 사업을 마무리는 하고 와야죠. 지금 제 변호사에게 은행장의 확인서를 써주시겠어요? 그것이 있으면 누가 언제든 제 돈을 출금할 수 있는 거죠?”
“그렇습니다. 제가 가서 확인서와 도장을 가져오겠습니다. 은행 계좌 신설도 하셔야죠. 추후 은행에 예치하시면, 예치증서도 변호사를 통해 보내드리겠습니다.”
시부사와가 서둘러 일어설 준비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응접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 왔군요. 제가 이곳에서 한 잔 하려고 와인을 준비했어요. 괜찮죠? 시부사와 은행장님? 함께 해주시겠어요?”
미리 손탁의 부탁을 받은 하녀 하나가 붉은 포도주가 들어 있는 병과 잔들을 가져왔다. 시부사와는 들었던 엉덩이를 다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 확인서와 도장을 가져오려면 은행장님이 직접 가셔야 하세요? 이렇게 좋은 와인이 있는걸요. 그건 아래 부하직원 시키세요.”
손탁이 포도주를 잔에 따르자, 시부사와의 엉덩이가 소파에 다시 붙었다.
“아드님이 나나코 양의 파트너죠?”
“네. 그런 것 같더군요.”
“그럼 아드님을 시키시는 게 어때요?”
손탁이 시부사와에게 잔을 준 다음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 그녀는 시부사와가 자신의 말의 덫에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은행장인 제가 갔다 와야 합니다. 도장과 확인서는 매우 중요하죠. 제 아들이 미숙하여 일을 그르칠까 염려되는군요.”
시부사와가 노련하게 덫을 빠져나간다. 아마 옭아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손아귀에 있는 모래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시부사와는 매우 영민한 사람이었다. 일반 농민에게서 태어난 그는 지금 자리에 있기까지 그의 예리한 시선과 눈치로 살아왔다.
그는 원래 귀족이 아니었지만,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 자리에 있었다.
손탁은 그에게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괜한 의심을 샀다가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그럼 다녀오세요. 저는 이곳에서 와인 한잔 하고 있을게요.”
시부사와는 정중하게 인사한 후,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이제 모든 것은 사로의 손에 달려있었다.
손탁의 역할은 이걸로 끝났다.
손탁은 그녀가 잘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작가의말
작가의 말은 너무나 어려워요.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도 어려워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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