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관계

“공사관은 엄연히 미국 땅이오! 어찌 일본 낭인이 쳐들어올 수 있소? 미국은 이 상황을 그냥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오! 일본이 미국 땅을 침략한 것과 같으니 전쟁도 불사하겠소.”
회담 장소에서 태프트 장군이 오자마자 길길이 날뛰자, 사이온지 총리와 하키로 일본 대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시부사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놀란 표정으로 태프트를 바라봤다. 이제 태프트의 사과를 바랄 수도 없게 되었다.
태프트가 겪은 일이 더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진, 진정하시고 내 말을 들어보시오.”
사이온지 총리가 태프트를 진정시켰다.
“공사관에 쳐들어왔다던 그 낭인들은 일본에서 큰 죄를 물을 것이오. 이런 일로 두 나라 관계가 악화되어 전쟁을 일으킨다면, 서로 득 될 것이 없을 것이오.”
그 말에 태프트는 진정하는 듯이 보였다.
“그들을 어찌 죄를 물을 것인지, 내 지켜볼 것이오. 뭐 그들이 공사관에 쳐들어온 이유도 잘 알고 있소. 어제 내 아내가 시부사와 은행장에게 한 짓 때문이겠지. 그건 내가 사과드리리다.”
사과를 할 줄 몰랐던 태프트가 시부사와에게 사과하자, 시부사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닙니다. 제 불찰로 그런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시부사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바닥에 깊숙이 숙였다. 일본에서는 그것이 사과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태프트 장관은 던지듯이 사과의 말을 건넸지만, 시부사와의 사죄는 보는 사람조차 굴욕감과 수치심을 유발했다.
태프트 장관은 그것이 맘에 들었던지 다음 말을 이었다. 이제 헐버트가 말한 대로 협상을 진행해야 할 터였다.
“오늘 아침 일본 신문에 나온 것처럼 샌프란스시코에서 일이 있었소. 일본 학생들을 분리 시킨 것은 대통령이 뜻이 아니라 지역 사람들의 뜻이오. 알겠지만, 미국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투표로 움직이는 나라요. 국민을 절대 무시할 수 없지.”
“네 압니다. “
“그 일로 사실 일본에 온 것이오. 샌프란시스코에서 더 이상 일본인을 차별하게 둘 수는 없지 않소?”
“예. 그렇지요. 그 일로 일본제국의 신민이 모두 슬퍼하였습니다.”
사이온지 총리가 태프트의 죄책감을 자극하도록 일부러 감정에 호소하였다. 하지만, 태프트는 이 대화의 흐름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흑룡회가 공사관으로 오는 순간부터 주도권은 미국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샌프란시스코 일은 내가 돌아가서 해결을 하리다. 약조하지요. 다만, 미국도 원하는 것이 있소.”
“무, 무엇입니까?”
사이온지 총리는 부쩍 긴장한 듯 보였다. 대체 무슨 협상을 하려고 이러는 것인가?
사이온지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던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일은 샌프란시스코 일이고. 신문에서 이미 봤겠지만, 그와 별개로 일본인이 미국인을 살인한 사건이 있었소. 이 일로 인해 일본인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이 매우 안 좋소. 지금 일본인들이 미국으로 이민 온다면, 두 나라 간의 감정은 더더욱 악화될 것이오. 설마 미국에서 일본 학생들을 따로 학교를 만들어 줬다고 해서, 일본인이 미국인을 살해한 사건보다 크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태프트가 이렇게 말하자, 그곳에 모인 고관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사이온지는 태프트가 일본에서 잘 못한 일을 빌미로 일본이 더 우위에 있는 협상을 할 생각이었지만, 오늘 태프트의 피습 사건이 더 커 협상이 진행이 되지 않았다.
“일본인이 미국에 이민 오는 것을 전면 제한하오. 그거에 대한 조약을 써줘야겠소.”
태프트는 그 자리에서 못을 박듯 말했다.
헐버트는 소수의 일본인만 오게 하라고 했으나, 이렇게 대화의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는 밀어붙여야 했다.
일본의 고관들이 그 말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태프트는 음흉하게 웃었다.
‘차기 대선 후보로는 내가 되겠어.’
한편, 이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존재가 있었다.
바로 선재 동자였다. 선재 동자는 그대로 날아가 사로에게 소식을 전했다.
사로는 야폰치크에게 명했다.
“신문 기사 1면에 나올 소식들이 많이 있네? 태프트 장군이 미국으로 떠난 후, 기사를 내도록 해. 제목은 <일본인은 이제 미국 땅을 밟을 수 없다> 가 좋겠어.”
야폰치크는 사로의 명을 받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이 자극적인 기사들은 일본 전역을 미국에 대한 분노로 퍼져나가게 될 것이었다.
일본과 미국은 더 이상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사로가 아는 한 일본인들은 당하고만 있지 않는 나라였다.
1941년 이렇게 미국이 외교적으로 일본을 압박했을 때도 그들의 선택은 진주만 공격이라는 전쟁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보다 충돌을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자원 획득을 시도하려고 했다.
***
선재 동자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사로 앞에 나타났다.
“선재 동자. 어디 갔다 온 거야?”
사로가 묻자, 선재 동자는 기쁜 듯이 사로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랑님이 오셨어요. 여기 이용익의 서류들이 있어요.”
선재 동자는 어느새 이랑을 이랑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의지할 존재여서 그럴까?
“이랑 씨가? 이랑 씨는 지금 어디 있어? 왜 같이 안 왔는데?”
사로가 두리번거리며 이랑을 찾았다. 하지만 이랑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일이 있다고 먼저 은행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그래?”
사로는 이랑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쉬웠지만, 휘와 함께 다이이치 은행으로 떠났다.
시부사와는 태프트와의 회담 장소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태프트가 나가고 난 뒤에도 한동안 그가 움직임이 없자, 같이 왔던 아들 도쿠지가 아버지의 팔을 이리저리 주물렀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정신을 차린 시부사와는 도쿠지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사이온지 총리에게 몸을 돌려 소리쳤다.
“총리님! 이게 맞는 겁니까? 아침까지도 우리 쪽에 유리할 줄 알았던 회담이 이렇게 뒤집어지다뇨!”
“그 낭인들이 공사관에 정말로 피습을 위해 들어갔는지 들어가지 않았는지 이제는 중요하지 않네. 중요한 건 태프트가 우리에게 원하는 걸 얻어냈다는 거지.미국이 계속 일본에 적대감을 보이는 이상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걸세. 미국 이민뿐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석유 무역까지 미국이 우위에 있다면 우리는 전쟁을 해서라도 우위로 올라서야 겠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네.”
“러시아와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군수 물자를 모으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조선이 있지 않나. 조선의 풀 한 포기라도 팔아서라도 군수 물자를 만들어내야지. 이토 히로부미에게 연락하게. 빨리 조선과 합병을 하고 조선 왕을 폐위시키라고 해. 시부사와 자네는 이제 조선으로 건너가 조선의 중앙은행을 맡게. 조선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을 돈으로 환산해야 하네.”
사이온지 총리가 시부사와에게 말하자 시부사와는 벌떡 일어나 착 서고 총리에게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했다.
“대 일본 제국에게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사이온지 총리와 하키로 대사가 회담 장소를 떠나자, 시부사와는 도쿠지에게 말했다.
“여기 은행을 이제 네가 맡도록 해라. 나는 이제 조선에 들어가 대일본제국에 충성해야 한다.”
“예 아버지.”
“어제 손탁이 은행에 거액의 돈을 맡긴다고 했다. 잘 운용하면 은행이 더 커질 수 있을 것이야.”
“그렇습니까?”
“어제 내가 너한테 예금증서와 은행장 확인서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걸 어떻게 했느냐? 그날 정신이 하도 없어서 물어보지를 못했구나. 그 서류는 어디 있느냐?”
‘그러고 보니 그렇게 빨리 서류를 달라고 재촉하던 손탁이 왜 서류를 가져가지 않았지?’
“예금증서는 나중에 달라고 하여 주지 않았고, 확인서만 주었습니다. 혹시 그 서류들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주었다니? 누구한테 말이냐? 누구를 위한 것이라니? 어찌 그런 말을 하느냐? 당연히 손탁의 서류들이지.”
“네? 아, 아버지 그게 정말입니까?”
“왜? 무슨 일이야?”
도쿠지는 재빨리 시부사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저는 아버지가 원하시는 서류의 주인이 손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누군가의 확인서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누구 확인서를 써줬어? 너 맘대로 지금 서명했다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내가 써준 확인서는 손탁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용익이라는 자였습니다.”
시부사와는 머리에 뭔가가 떨어져 맞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당했구나.’
“지금 당장 은행으로 달려가. 이용익이 누군지 알아봐라. 이용익 예치금액이 총 얼마였는지 알아봐. 만약 뭔가 잘못되었다면, 그 책임은 네가 질 것이다.”
도쿠지는 헐레벌떡 자리를 박차고 뛰어갔다.
중간에 너무 빨리 가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다리에 피가 흘렀지만 그 아픔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사로는 휘와 함께 다이이치 은행에 있었다. 은행 창구에서 직원에게 서류를 보여줬다.
“이용익의 위임장입니다. 돈은 모두 인출해 주세요.”
“이, 이걸 다요? 시간이 좀 걸립니다.”
“네. 상관없어요. 다 인출해 주세요.”
“고객님 저희 은행에 더 좋은 예금상품도 있습니다. 한 번 보시고 다시 생각해 보시겠어요?”
사로가 많은 돈을 모두 출금한다고 하자, 은행 직원이 그들을 한 번 만류했다.
“아뇨. 바로 해주세요.”
“바로 해달라고 했는데 왜 자꾸 다른 이야기를 하지? 서류도 다 줬잖아. 뭐 문제 있나?”
참다못한 휘가 강압적으로 말하자, 은행 직원은 겁에 질린 듯 손을 바삐 움직였다.
“아, 아닙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은행 직원은 서류를 적고, 도장을 찍더니, 돈을 세서 주기 시작했다. 돈 세는 것이 너무나 느려서 사로는 초조했다.
마침내 은행 직원이 큰 가방에 돈을 넣어주고 그들에게 90도로 인사했다.
“다이이치 은행을 또 찾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로와 휘는 일어섰다. 그들이 서둘러 은행을 나가려고 했을 때였다. 헐레벌떡 들어온 도쿠지와 사로의 눈이 마주쳤다.
“나나코 양! 이게 무슨 짓입니까?”
사로는 대답하지 않은 채 휘와 함께 서둘러 문을 빠져나갔다.
“저들을 잡아라! 도둑이다!”
도쿠지가 소리를 지르자 주변에 있던 경찰 바로 나가 사로와 휘를 포위했다.
휘가 재빨리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경찰의 총에 발차기를 날렸다. 총이 떨어지자, 다른 경찰이 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휘가 쓰러지자, 경찰들이 휘를 잡았다. 사로는 가방을 끌어안고 경찰들이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밀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도쿠지는 다리를 절뚝이며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가 좀 늦었나 보오.”
사로의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사로를 끌어안았다.
- 작가의말
주인공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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