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왕자 일본의 왕

“넌 누구냐?”
일본 경찰들이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보고 놀라 소리쳤다.
“상관없어! 모두 죽이고 저 가방을 넘겨. 저 돈은 다이이치것이다 줄 수 없어!”
도쿠지가 소리를 지르자, 경찰들은 그들에게 총을 쏘려 자세를 잡았다. 갑자기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땅이 흔들렸다.
“지, 지진인가?”
경찰들이 땅을 보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다들 뭐 하는 거야? 총부터 쏴!”
도쿠지가 말하자 그중 한 명이 총을 쏘았다. 총알은 사로에게 맞지 않고 스쳐 지나가 벽에 박혔다.
땅이 더 심하게 움직였다. 파도가 치듯 움직이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이랑은 도쿠지와 일본 경찰들이 당황하는 틈을 타 사로와 휘를 잡고 하늘 위로 솟구쳤다.
경찰 눈에는 갑자기 세 사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일 터였다.
사로는 구름 속을 지나가는 새들을 보았다. 자신이 새처럼 날고 있다고 생각하자 하늘의 광경이 매우 아름다웠지만 흠칫 소름이 돋았다.
휘는 더 가관이었다. 그는 팔 다리를 파닥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려주시오! 제발 내려주시오!”
그들은 그대로 날아 도쿄 외곽의 작은 숲에 다다랐다.
이랑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사로는 이랑의 상태가 평소와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디 아파요?”
그 순간 이랑이 사로의 품속에서 고꾸라졌다.
“이랑!”
이랑은 하늘이 빙글빙글 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 속에서 사로가 색종이처럼 고이 접어져 없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의 사로 얼굴 한 조각을 잡으러 그가 손을 뻗어보았지만, 공허한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
“이 자가 신선이라는 것이냐?”
휘가 조심스럽게 사로에게 물었다.
“네. 오라버니의 막역지우였는데 생각이 안 나세요?”
사로는 주변의 이슬을 모아 만든 천 수건으로 이랑의 식은땀을 닦았다.
그들은 도쿄 인근 산에 있는 동굴에 자리를 잡고 산짐승을 피하고 있었다.
휘가 모아온 나뭇가지에 부싯돌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장작이 더 필요할 듯해 그는 주변의 나무들을 물색하며 사로에게 말했다.
“난 생각이 안 나. 네가 이 신선이 내 기억을 지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낯이 굉장히 익구나. 뭔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듯해.”
“오래전부터 익숙하고 알고 있는 듯한 자연스러움. 그것이 신선의 능력이라고 했어요.”
“근데 이 사람은 왜 갑자기 쓰러졌지?”
“모르겠어요.”
사로는 잠들어 있는 이랑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의사도 아니고, 더군다나 신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앞으로 어찌할 생각이냐?”
“원래는 내일 헐버트 씨와 태프트 장관을 만나고 협상을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이랑이 이대로 내일 깨어나지 않으면 태프트 장관과 만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큰일이군.”
“지금은 이랑이 깨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미국과의 협상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사로는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조선과 비슷하지만 어딘가는 다른 달짝지근한 냄새의 바람이었다.
갑자기 사로는 자신이 정말 낯선 곳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낯선 나라, 낯선 숲, 낯선 냄새. 그곳에서 오빠 휘와 이랑이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오라버니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사로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말하자, 휘가 사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네가 여기 나와 함께 있어줘서 다행이라고.”
그때 사로의 눈에 땅이 들썩거리는 것이 보였다.
“방, 방금 뭐였죠? 봤어요?”
“무엇을 말이냐?”
“땅이 움직였어요. 방금.”
사로가 일어나 경계하자, 휘도 벌떡일어났다.
“이랑을 보호해야해요. 일단 동굴 깊숙이 들어가요.”
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늘어진 이랑을 들쳐 맸다. 그는 사로가 말한 것을 보지 못하였지만, 마음속 깊이 그녀의 말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랑을 다른 곳보다 위치가 높은 판판한 돌이 있는 곳으로 옮기자, 또다시 땅이 울렁였다.
이번에는 휘도 느꼈는지 단단히 긴장된 얼굴로 사방을 돌아보았다. 한 무더기의 돌들이 동굴 천장에서 쏟아졌다.
이 와중에도 이랑은 죽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이랑 쪽에는 돌들이 떨어지지 않아서 사로는 안심했다.
쿵
“들었느냐?”
“네. 무슨 소리죠?”
쿵
무엇이 가까이 오는 소리였다.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리고 있었다. 쿵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위에서는 돌 부스러기들이 떨어졌다.
휘는 앞으로 나서 사로와 이랑을 등지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섰다. 무엇이 오던지, 여동생과 신선을 지킬 요량이었다.
마침내 그 소리는 모습을 드러내었다. 키가 3미터나 되고 빛나는 갑옷을 입은 괴물이었다.
“괴, 괴물······’
휘는 거구의 사내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괴물은 석돌보다 1 미터 이상은 더 커 보였다 .
사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쥐고 선재 동자를 찾았다.
“선, 선재 동자!”
“부르셨습······?”
선재 동자는 목걸이에서 나오려다 말고 괴물을 마주 보자 덜덜 떨었다. 그래도 사로와 휘를 보더니 그는 용기를 내어 나왔다.
“제, 제가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꼭 두 분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사로는 떨고 있는 선재 동자를 보며 이대로 저 괴물과 맞선다면 선재 동자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선재 동자는 작은 빛으로 공격 자세를 취했다.
‘나 때문에 선재 동자가 어떤 고생들을 했는데 이대로 다치게 할 수 없어.’
“선재 동자! 목걸이 안으로 들어가! 이건 명령이야!”
“아뇨. 저는 애기씨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습니다. 제가 막을 터이니 물러나 주세요!”
사로는 선재 동자가 괴물에게 날아오르려는 것을 두 팔을 벌려 막았다.
“안돼!”
그때 괴물의 입이 느리게 움직였다. 느리지만 크고 분명한 어조였다.
“사로국의 말이군. 그대들은 사로국에서 왔는가? ”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아? 사로국이라니?’
사로국은 신라의 옛 이름이다. 사로의 이름이 바로 그 사로국이라는 이름으로부터 나왔다. 사로는 어리둥절했으나, 괴물이 매우 위협적이었으므로 재빨리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네. 저는 사로국의 후손입니다.”
그 말을 듣자 괴물은 보통 사람의 크기로 줄어들었다. 휘와 사로는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한 사내가 괴물이 있었던 곳에 서있었다. 괴물이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훤칠한 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그는 고대 일본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사로는 잔뜩 긴장하였으나 더는 경계하지 않고 그가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는 사로와 휘를 지나쳐 그대로 이랑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사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재빠르게 이랑에게 다가가는 그를 제지하였다.
두려움보다는 이랑을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만지지 마십시오! 대체 누구십니까? 누구길래 이곳에 왔습니까?”
그는 이랑을 만지려던 손을 멈추고 사로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사로국의 후손이여. 비키거라.”
그의 온몸에서 불꽃 같은 빛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빛이 쏘는 그 열기에 사로는 숨이 턱 막혔다. 사로는 쉬어지지 않은 숨으로 간신히 입을 떼었다.
“비······ 비킬 수 없습니다. 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아메노히보코. 일본의 왕이자, 신라의 왕자 연오다.”
연오랑. 해와 달의 정령 중 해의 정령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연오랑이 부인과 바다에 떠밀려온 바위를 타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전설이 쓰여 있었다.
학계에서는 연오랑이 막연히 신라의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신라의 왕자라고 밝히다니 사로는 새로운 사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말 이 사람이 연오랑이라면 이랑을 해치지 않을 거야.’
사로는 급히 몸을 돌려 그 빛을 피하고 숨을 다시 되찾았다.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가 동물에 퍼졌다. 휘는 재빨리 사로의 숨을 다시 돌리려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아메노히보코, 아니 연오랑은 이랑에게 손을 뻗었다.
손에서 눈이 부시다 못해 하얗게 보이는 빛이 나와 이랑을 둘러싸고 동시에 이랑이 위로 솟구쳐 공중에 들려졌다. 사로와 휘는 경이로운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선재 동자는 보지도 못하고 땅에 엎드린 채 몸을 떨었다.
사로는 누운 채로 공중에 뜬 이랑의 모습이 보았다. 이 사람은 이랑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신라의 왕자라고 하기 전에 일본의 왕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설마? 이랑에게 복수를? 그럴 수도 있었다.
이랑은 자신과 함께 일본에 대적하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그가 어느 쪽이든 사로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사로는 한때 연오랑이라고 불렸던 남자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연오랑은 사로의 경계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빛이 이랑을 감싸고 있었다. 연오랑이 손을 거두자 빛은 이랑을 돌바닥에 편히 눕힌 채 사라졌다. 이랑이 눈을 뜬 것을 보고 선재 동자가 이랑에게 달려들었다.
“이, 이랑님! 정신이 드십니까?”
이랑은 천천히 일어나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리고 곧 뜻밖의 인물을 본 듯 눈을 크게 떴다.
연오랑은 그런 이랑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겁고 느린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이곳을 떠나. 이랑. 이곳의 신들은 너를 곧 죽일 거야.”
“연오랑?”
이랑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이제 아픈 기색은 없어 보였다. 아니 전보다 더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그 모습에 사로는 안심했다. 하지만 연오랑이 앞에 있는 한 마음을 다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너와 이천 년전의 인연으로 이곳에 있어. 오래는 못 있어. 이곳을 떠나라. 이랑. 아까 낮에 소멸될 뻔했던 것을 잊지 말아라.”
“연오랑.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닐세.”
“나는 일본의 왕이자 일본의 신. 이곳에서 바로 너를 소멸시킬 수도 있어.”
“해봐. 당하고만 있지 않을 테니.”
이랑의 손에 불길이 일었다.
“바보 같군. 이곳은 신라가 아니야. 나는 너와 싸우고 싶지 않다.”
.연오랑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눈은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하얀 불길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오래된 친구인 이랑이여. 이 땅의 신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신을 믿고 따라 아무 신도 천계에 오르지 않았지. 너만 빼고 모두 천계에 오른 신라와는 달라. 이랑. 만약 이곳에서 우리의 후손을 해치면 이곳의 신들은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웃기는 소리! 내가 그들을 두려워할 것 같나? 그리고 지금은 내가 있는 곳은 신라도 아니야. 멍청아.”
“사로국이 어떠한 말로 변했든 마찬가지야. 이곳에 있다간 너는 곧 소멸될 것이다. 네가 있던 낭산으로 돌아가라. 이리여.”
그 말에 이랑의 눈이 푸른빛으로 변했다. 흡사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듯해 사로는 소름이 돋았다.
“잠시만요!”
듣고 있던 사로가 그들의 말에 끼어들었다.
“지금 일본의 신선, 아니 신들이 이곳에서 후손을 해친다면 이랑을 소멸시킬 거라고 했죠? 이 땅에서 아무도 해치지 않아요. 맹세해요.”
“사로국의 후손이여. 너의 맹세는 필요하지 않다. 모두 저 이리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이랑은 저를 도와주러 온거에요. 조상의 약조로 말이예요. 그리고 일본인을 해치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나라를, 땅을 지키러 온 거라고요. 그쪽 후손이 지금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고요!”
사로는 거의 절규하듯 소리쳤다. 억울했다.
너무나 억울하여 한이 맺힐 것 같았다. 일본은 나의 고향을 도륙 내고, 파헤치며 사람을 잡아가고, 벌레를 짓이기듯 나라 전체를 짓이기고 있는데, 자신은 그것을 지키고자 할 뿐인데 오히려 피해자 행세라니.
사로의 눈에 억울하고 한스러운 눈물이 차올랐다.
- 작가의말
억울한 건 참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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