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서 나타난 남자

연오랑이 준 우태의 옥은 순간 이동 장치였다. 아마 연오랑은 사로가 이것을 얼마나 원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순간 이동 장치가 있어서 원한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이동하는 시간이 아까워 순간 이동이란 것이 좀 있었으면 하고 상상만 했던 것이다.
연오랑은 그저 그들이 하루빨리 일본 땅을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태의 옥을 주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일본은 다시 올 수가 없겠군. 우태의 옥까지 줬는데 다시 일본에 오면 바로 죽이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현대에서 최사로 였을 때 일본 여행이나 해둘 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사로에겐 과거를 바꾸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사로는 애써 휘와 이랑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럼 이제 가볼까요?”
사로는 휘와 이랑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랑이 사로에게 걸어준 옥과 이랑의 귀고리가 함께 공중에 떴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그들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팟 하고 공중에서 사라졌다.
임페리얼 호텔의 메이드가 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방문을 잠시 열어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청소를 시작했다.
사로가 눈을 떠보니 블라디보스토크역 앞이었다.
사람들이 사로의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이 갑자기 나타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땅에 발이 닿자 휘는 너무 놀란 듯 휘청거렸지만, 이랑은 무심하게 자신의 옷을 한번 툭툭 털어냈다.
‘상상만으로 원하는 장소에 갈 수 있다니 이거 너무 멋지다! 고마워요 연오랑!’
연오랑은 몰랐을 것이다. 이게 얼마나 사로에게 필요했는지를.
이랑과 둘이라면 이랑이 잡고 날면 그만이지만, 휘까지 있어서 쉽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렇게 여행을 하면 휘가 너무도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6일이나 걸린 적이 있어서 사로는 이 목걸이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이런 도깨비같은 일이 다 있다니······”
휘가 정신을 겨우 가다듬으며 말하자 사로와 이랑이 동시에 소리쳤다.
“도깨비 아니라니까!”
***
설한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작은 시장에서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과일과 채소를 파는 상인들의 천막에 숨어서 사과 하나를 집어 들어 우걱우걱 씹으면서 그는 생각했다.
‘황제의 밀서를 빨리 통감께 전해야 하는데 말이야. 빌어먹을 깡패 같은 놈들 때문에 발길이 묶이다니.’
지나가는 트럭을 타고 독립군들에게서 떠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밀사들을 헤이그에 보내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폐위가 될만한 일이지. 나는 그 공로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되는 거고!’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배를 타려고 항구로 가봤지만 배표를 살 수 없었다. 배 승무원이 표를 팔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기차를 타고 중국 쪽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기차표도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그는 밀항을 시도하려 했지만 돈을 얼마를 준다고 해도 그를 밀항시켜주는 배는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조선까지 걸어가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취해야했다.
‘분명 누군가가 나를 일부러 이곳에서 못 나가게 하는 것이다. 독립군들 짓이 분명해.’
그는 사과를 우적우적 씹으며 사과씨를 퉤하고 바닥에 뱉어냈다. 일확천금이 눈에 보이는데 그것을 당장 잡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조선에 있는 통감부에 연락을 취하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오늘 이 시장에서 통감부의 비밀경찰을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통감부에 이 밀서만 넘기면 다 끝나! 이 새끼들아! 핫핫핫”
어찌 된 일인지 자꾸 웃음이 나왔다. 편지를 갈취 한 뒤, 자신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이준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설상이시오?”
그때 베레모를 깊게 눌러쓰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가 뒤에서 설한규를 불렀다.
설한규는 너무 기뻐 뒤돌아 뛰어가 그를 안고 싶었다. 드디어 오늘 이 지긋지긋한 러시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렇소. 통감부에서 보냈소?”
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시장 한 골목 어귀로 걷기 시작했다.
“오늘 만날 수 없을까 두려웠소. 며칠 동안 이 러시아에서 갇혀지냈단 말이오.”
“물건은?”
“아 그 밀서 말이군. 잠시만. 그전에 내게 약조해야 할 것이 있소. 첫째, 나를 이곳에서 조선으로 가게 한다. 둘째, 이 증거를 본 뒤엔 나에게 다시 주시오. 내 말이 맞았으니 내가 직접 통감에게 가서 전하겠소.”
“물건부터 보여줘.”
“아 참, 사람 급하시기는. 이 증거는 통감이 가장 기뻐할 것이오. 그런데 이 영광을 당신이 차지하게 할 수는 없지 않소? 내가 목숨 걸고 지켰으니 말이오. 그래서 그러는 거요. 약조를 하시오. 그럼 보여드리리다.”
“물건이 없다면 됐다. 괜히 왔군.”
남자가 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가려 하자 설한규는 사색이 되어 그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왜, 왜 이러시오. 알았소. 물건을 보여주겠으니까 이곳에 나를 놔두고 가지 마시오.”
설한규가 의심쩍은 눈초리로 조심히 품속에서 황제의 밀서를 꺼냈다.
“거기 보면, 황제의 국새가 찍혀있소. 틀림없는 조선 왕의 배신이오.”
남자는 밀서를 확인하고는 밀서를 고이 접었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이자를 잡아라!”
설한규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양 골목에서 총으로 무장한 독립군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 X팔!”
설한규는 빠져나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많은 군인의 수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을 속인 남자를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 남자는 안중근이었다. 설한규는 분한 마음에 이미 잡혔지만 몸을 비틀며 반항하였다.
“놔라 이놈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가 설 남작의 아들이다!”
“남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설한규는 웬 익숙한 여자의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너, 너는?”
눈앞에 나타난 건 자신의 옛 정혼자 최연이었다.
“끌고 가요.”
그녀의 한 마디에 그의 입에는 재갈이 물리고 얼굴에는 검은 천이 씌워졌다.
그는 눈을 가려진 채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질질 끌려갔다.
한편, 야폰치크의 부하들이 다른 골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로 님. 말씀하신 대로 물리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러시아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잘했어.”
사로는 그들에게 작은 다이아몬드를 주었다. 야폰 치크의 부하들은 사로에게 인사를 한 후,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사로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
“일본에 갔다고 들었는데 벌써 해결이 된 겁니까? 어찌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습니까?”
석돌이 놀라워하며 말했다. 최연 애기씨와 휘도련님은 알면 알수록 기인 같은 남매였다.
휘가 뭔가 말하고 싶어 했으나, 그의 여동생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자 입을 다물었다.
“저, 그게······아닐세.”
“아무튼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입니다. 이준 대감은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고 기별이 왔습니다.”
“그런가?”
“예. 애기씨. 이준 대감이 밀서를 빼앗기고 얼마나 원통해 했는지요. 다행히 밀서도 되찾았으니, 러시아 왕국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우실 것입니다.”
“다행이구먼. 밀사들은 이제 어떻게 한다던가?”
“엇? 애기씨께서 이준 대감 말고 다른 밀사들이 있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사로는 속으로 뜨끔하였으나, 석돌에게 재빨리 생각나는 대로 말하였다.
“나도 밀사이지 않나? 황제께서 이준 대감 말고도 이상설 대감이 천거된 것은 알고 있네.”
“아. 그렇습니까? 저는 이곳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이준 대감은 이상설 대감과 만나셔서 함께 수도로 떠나셨습니다. 그곳에서 러시아 공사 이범진 대감을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헤이그 특사는 이준, 이상설, 그리고 이위종이다.
아마 이준과 이상설은 이범진과 함께 하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의 아들 이위종과 함께 러시아 궁전으로 가겠지.
그들은 전생과 달리 환대 받을 것이다. 국빈으로 대접받고 함께 회의하고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외교관으로서 당당히 입성할 것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사로는 감동이었다.
“우리는 이제 미국에서 해야 할 일이 있네. 평화회의에 당당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한 나라만 우리 편을 들어서는 안 되네. 같은 편은 많을수록 좋지.”
“네. 가져오신 돈과 밀서는 저희가 잘 밀사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헤이그의 밀사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태극기부터 걸었다고 했다.
그들은 이위종과 합류하고 러시아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사로가 가져온 황제의 내탕금을 그들에게 로비하기도 적법할 일이었다.
특히 러시아의 넬리도프 백작은 헤이그 회의의 의장이었다. 밀사들은 러시아에서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사로가 러시아 황제의 마음을 얻어 일을 쉽게 만들어놨으니, 그 일은 이제 밀사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부탁함세.”
석돌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마자 안중근과 이용익이 사로 일행이 있는 방에 들어왔다.
“최현, 아니 최연인가? 자네가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네.”
안중근이 감탄을 하고 말하자 사로의 얼굴이 붉어졌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인의 말은 신뢰하시기 힘들 것 같아 남장을 했습니다.”
“아니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데 여자면 어떻고 남자면 어떤가? 괘념치 말게. 그나저나 설한규 저 작자를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자네의 약혼자였다고 들었네.”
“이미 끊긴 인연이나, 제 소꿉친구의 오빠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함부로 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밀서는 우리 손에 들어왔으니 그의 역할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그럴까? 이토 히로부미가 눈치를 챘네.”
안중근이 신문 뭉치를 사로에게 내밀었다. 베델이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 신문이었다.
“베델이 연재되는 소설에 암호가 있다고 우리에게도 알려주었네.”
사로는 재빨리 신문을 들쳐보았다. 설차윤이 쓴 소설이었다.
<개들은 결국에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는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상상함직했다. 개들은 침을 흘렸다. 곧 주인의 집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
개는 일본을 의미했다. 개가 냄새를 맡았다는 것은 지금 황제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냈다는 뜻이다.
곧 주인의 집으로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은 황제 폐하가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설한규가 러시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으니, 설한규의 말로 이토 히로부미가 알게 된 것이 아닐 거예요.”
“그럼 혹시 우리가 일본에 갔을 때, 도쿠지가 이용익이라는 말을 듣고 상부에 이 정보를 올린 것이 아니냐?”
휘가 심각한 얼굴로 사로를 돌아보았다.
사로가 생각하기에도 일본이 눈치를 챌만한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시부사와는 우리가 없어지자 이용익이 누군지 조사했을 거예요. 생각 보다 정보가 빠르네요. 고작 엊그제 일인데 말이에요.”
“하지만 증거는 없어. 황제가 외교관을 비밀리에 보냈다는 증거가 말이다. 증거를 찾지 못하면 이토 히로부미는 황제를 놓아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폐하를 지켜야 해요. 의친왕께 폐하 곁을 떠나지 말라고 해주세요. 이곳 일은 우리에게 맡겨달라고요.”
“그건 내가 전하겠소.”
안중근이 나서며 말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말대로 이토는 증거가 없이 황제를 몰아세우기 힘들 거예요. 그래도 만약 무엇이든 꼬투리를 잡아서 황제 폐하를 끌어내려면 끌어낼 수는 있겠죠······ 잠깐만. 내게 아주 좋은 생각이 있어요.”
사로의 눈이 한순간에 이채롭게 빛났다.
“폐하를 쉽게 지킬 수 있겠어요. 우리에겐 설한규가 있거든요.”
안중근과 이용익은 그 말에 매우 궁금해했으나 이랑과 휘는 사로가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걸까 노심초사해졌다.
- 작가의말
사로는 아이디어 뱅크!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