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성현의 본래 임무는 박사, 정확히는 병기 기술자 스코튼 박사를 회수하는 것이었다.
뜬금없는 영웅급 괴수의 등장으로 문제가 생겼고 결국 잠시 미뤄진 개척 작전.
그 덕분에 여유가 생긴 데다가, 그 괴수를 토벌하며 획득한 부산물인 갑주를 병기로 가공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현의 소속 부대인 화생방 특임대의 상위 부대, 연방의 제4군사령부에서 내려온 2번 임무로 상황이 모두 꼬여 버렸다.
난데없이 등장한 불법 각성 시술과 그에 관련된 임무까지.
성현의 입장에서는 복잡한 상황과 밑도 끝도 없는 임무 내용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임무의 관계자로 등장한 진소영 하사와 그 덕분에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한 성현은 자신에게 내려온 임무의 개요를 대강 눈치챌 수 있었다.
‘대장님이 말한 게 이런 건가?’
성현은 그라논 대위가 늘 말했던 ‘병기 취급’이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보 수집이나 침투 같은 복잡한 임무를 맡은 진소영 하사와 달리, 성현의 임무는 간단하기 그지없었다.
섬멸.
이미 그에 필요한 정보나 증거 같은 것은 진소영 하사의 손에 수집되었고 되고 있는 중이었고 이제 슬슬 응징이 필요한 시점에서 때마침 다른 임무로 행성에 들어온 성현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네.”
조용히 중얼거린 성현은 기절한 경비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털썩!
그대로 쓰러져버린 경비의 주변에는 이미 그보다 먼저 쓰러진 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봐, 바라틴.”
“예, 예! 적랑님.”
한쪽에 쭈그려 앉아 있던 오크 중 바라틴이 벌떡 일어섰다.
“넌 나가서 바쿠스한테 연락해.”
성현은 슬그머니 퍼진 균사체를 통해 느껴지는 기척들 쪽으로 몸을 틀었다.
시술소의 로비 뒤쪽의 복도 쪽으로 올라오는 수많은 기척.
“그냥 바로 시작하겠다고.”
“넵!”
성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몰려 나가는 오크들.
“···.”
잠시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성현은 작게 고개를 젓더니 이내 시선을 되돌렸다.
쾅!
그리고 누군가 로비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엥? 지금?”
누군가와 통화를 한 바쿠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그런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백수의 로비 직원, 아니 부단장 피오나.
“아니, 로아 쪽 연락인데, 갑자기 시작하라고 하네?”
“시작? 설마 지금 바로 작전 시작?”
“엉.”
“캬악! 그걸 왜 이제 말해요.”
인상을 찌푸린 피오나는 그대로 단말기를 통해 여기저기 문자를 발송하기 시작했다.
로아, 아니 이름 모를 연방 군인의 ‘요청’ 때문에 한동안 외부 활동을 멈추고 대기 중이던 용병단원들과,
“무슨 개소리죠? 얘네는 단장이 개지랄 하는 바람에 집단으로 백수가 된 애들이잖아요?”
“연락이나 해.”
독심술이라도 가졌는지 바쿠스의 생각에 태클을 거는 피오나의 말을 무시한 바쿠스는 바쁘게 연락 중인 피오나를 뒤로 하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흠···.”
그리고 조심스럽게 사무실의 책상을 쓸어보던 그는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전 범죄자였던 아비를 따라 이 행성에 들어온 이후, 쭉 이곳에서 살았던 그에게는 이곳이 고향이나 다름이 없었다.
‘장벽’을 세웠다는 시청의 지배 아래, 우주 곳곳에서 모인 온갖 범죄자들이 들끓는 도시.
외부에 노출되는 곳이기에 시청이 관리하는 그 ‘대로’를 제외하면 애초에 무법천지나 다름이 없는 곳이었다.
걸핏하면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물론이고, 절도, 마약, 인신매매, 살인 등 수많은 범죄가 벌어지는 디에스코는 그야말로 범죄의 도시.
그곳에서 노예로 잡혀 온 동족 하나를 풀어준 것을 계기로 수인들을 모아 용병대를 만들고, 다른 곳에 소속된 수인들도 끌어들여, 사실상 수인 향우회를 만들었던 바쿠스는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 놈 때문이지 뭐···.’
바쿠스는 갑자기 등장한 붉은 늑대 수인 소년, 로아를 떠올렸다.
이름은 물론이고, 생긴 것과 종족까지 싹 다 거짓말이라는, 연방의 군인이라는 것만 밝힌 그는 첫 만남에 바쿠스에게 제안이라는 이름의 협박을 가했다.
‘나는 이 도시를 ‘섬멸’할 겁니다. 그러니 그전에 무고한 이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것을 도와주세요.’
앳된 외모로 덤덤하게 도시의 ‘섬멸’을 언급한 그에게 바쿠스는 웃으며 이 도시에 무고한 자가 없다고 말했었다.
바쿠스 역시 용병 의뢰를 통해 손에 숱한 피를 묻혔고, 늘 의뢰 중개와 내정만을 담당하는 피오나도 어렸을 때, 바쿠스의 도움으로 그녀를 노예로 만든 이들을 살해한 적이 있었다.
한창 뛰어놀아야 하는 꼬맹이도 남의 것을 훔치거나 싸구려 마약과 몸을 팔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도시.
디에스코에 사는 놈들은 다 그런 놈들이었다.
무고하지 않은 이들.
그래서 바쿠스도 그렇게 말한 것이었는데, 그의 반응은 놀라웠다.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관심도 없고요.’
무슨 짓을 했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군인.
‘그저 시청의 그 ‘불법 각성 시술’과 관련되지 않은 이들이면 됩니다.’
군인은 무고의 기준을 각성 시술과의 관련성으로 잡고 있었다.
“미친놈.”
우주를 수호한다는 연방의 군인이라는 놈이 범죄자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직 시청에서 배포한 각성 시술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뭐, 연방 놈들이 그렇지.”
그도 그저 연방의 명으로 도시를 쓸어버리기 위해 온 군인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바쿠스는 이제 창문에서 고개를 돌리고 사무실을 나섰다.
만약을 대비해 미리 정리해 둔 상태였기에 더 챙길 것도 없었다.
“근데 각성 시술이 대체 언제 그렇게 퍼졌지?”
피오나의 연락을 받은 용병(백수)들이 모이는 것을 보며 단말기를 확인하던 바쿠스는 평소보다 확연히 줄어든 연락처 목록에 머리를 긁적였다.
혹여 실수라도 할까, 각성 시술에 관련된 이들을 모두 지웠더니 연락처가 상당히 비어 있었다.
직접적으로 시술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시술 재료를 유통하는 이들, 시술을 받은 이들, 시술을 주관하던 시청과 일하는 이들을 모두 제외하니 사실상 남는 이들이 얼마 없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시술에 관련된 듯한 모습에 바쿠스는 작게 혀를 내둘렀다.
바쿠스 역시 로투스와 관련되어 있는 시술에 대한 것은 들었지만, 그것에 이 정도로 많은 이들이 연루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없다며 ‘적랑’이라는 칭호가 생길 정도로 뒷골목을 뒤집어 놓은 로아가 아니었다면, 바쿠스도 다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괴물 새끼.”
로투스의 이전 보스였던 가로낙을 필두로 관련된 수많은 조직을 쑥대밭으로 만든 군인은 로아라는 이름으로 수인 행세를 했다.
“수인은 그런 거 못 한다고.”
기껏해야 인간형, 수인형, 짐승형 세 가지 형태로 변하는 것이 다인 수인과 달리, 그 군인은 몸에서 자라난 붉은 털을 자유자재로 조종했다.
길어지고 뭉친 털이 날카롭게 벼려져 적을 도륙하는 것을 처음 봤을 때, 바쿠스는 어이라는 것이 출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가끔 이빨이나 발톱 따위를 쓰는 수인 호소인은 문자 그대로 뒷골목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분명 각성 시술 관련 조직이 하나둘 쓸려 나가는 중임에도 시청에서 아무런 대응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그 적랑이 군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별문제 없으려나?’
콰아아앙!
“아이, 제기랄!”
성현은 털 형태로 의태 중이던 <열사폭균>으로 막아낸 폭발의 충격을 최대한 흩어냈다.
<열사폭균>의 특성상 폭발의 열기는 완전히 흡수했지만, 충격 자체는 털을 이루는 정도의 질량으로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은 무리였다.
덕분에 잠시 흐트러졌던 신체는 이내 급속도로 본래 형상을 되찾았다.
“주, 죽어!”
“크아악!”
그리고 성현은 눈앞에서 괴성을 지르는 괴상망측한 것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미친 건가?”
조금 전 시술소의 지하에서 튀어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은 성현에게 폭발물을 쏘아냈던 화기를 필두로 수많은 병기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하나같이 개성(?)있는 외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몸에 걸친 전투복으로 가려지지 않는, 뒤틀리고 일그러진 몸.
오크로 보이는데 비늘이 돋아 있거나 엘프처럼 뾰족한 귀를 가진 샌드 리자드맨에 몸 곳곳에 이상한 촉수가 돋거나, 칼날 같은 뾰족한 뿔이 돋은 놈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뒤죽박죽 뒤섞인 몸뚱이와 그 속에서 느껴지는 에테르.
‘하긴 다 성공했을 리가 없지.’
성현은 저것들이 시술의 부작용 때문에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애초에 그릇이 녹아 있을 장기 전체를 추출하고 가공한 것으로 행한 시술에 문제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성현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그것들이 품은 에테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불쾌함이었다.
어둡고 질척질척한 무언가.
‘마치 오염된 것 같은···.’
“···시발.”
성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욕설.
그것을 마주친 것은 처음이지만 성현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본능적인 수준으로 전신의 세포 단위에서 느껴지는 혐오감과 적대감.
그리고,
띠링!
성현의 시스템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된 제4군사령부의 신속한 임무 변경.
[2. 말살]
[타락한 장성의 추종자들을 죽여라!]
양식 따윈 개나 줘버린 채, 단 한 줄에 선명하게 담긴 적나라한 적의.
[이성현 하사!]
임무가 변경된 것은 성현만이 아니었는지, 곧바로 날아오는 진소영 하사의 메시지.
[지금, 뭘 만난 거야? 임무창 내용이 심상치가 않은데???]
키에엑!
괴성을 지르며 다시 접근하는 실패작들의 모습에 성현은 에테르를 끌어올리며 서둘러 진소영 하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추종자의 흔적 발견. 시청과 타락한 장성의 연관성 확인.]
그리고 그사이 접근한 실패작이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것을 확인하고 성현은 그대로 몸을 날렸다.
타다당!
수많은 총구에서 쏟아지는 탄환이 몸을 관통했지만, 성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탄환이라는 것은 에테르를 다루는 연방의 군인이나 괴수에게는 큰 효과가 없는 데다가, 성현처럼 부정형의 육체를 가진 존재에게는 무의미 그 자체였다.
당연히 성현의 몸을 꿰뚫은 탄환의 흔적이 순식간에 메꿔지고 어느새 선두의 실패작 앞에 도달한 성현은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
쾅!
더 이상 털인 척할 생각도 없는지 손에 들러붙은 붉은 모래 덕분에 거대하게 변한 주먹이 실패작의 몸을 강타했고 반응도 하지 못한 실패작이 충돌음과 함께 그대로 날아갔다.
다른 실패작까지 휘말려 나가떨어졌지만, 성현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잠시 붉게 부풀어 오른 모래 주먹을 확인한 성현.
실패작과 충돌한 부분이 검게 물든 붉은 모래, <열사폭균>과 오염된 성현의 에테르-생체력.
가장 명확한 타락한 장성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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