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성현은 임무창을 띄웠다.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시청의 잔당을 모두 쓸어버리자 떠오른 2번 임무 완료 버튼.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하의 박사를 발견하자 떠오른 1번 임무 완료 버튼까지.
성현은 차례로 두 버튼을 눌렸다.
[섬멸 임무 완료]
[보상]
[10000 크레딧, 전용 장비 지급, 공헌도 2000, 하급 에테르 코어]
연방 전역에서 통용되는 화폐인 크레딧과 연방군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헌도, 그리고 에테르 총량을 늘려주는 에테르 코어.
연방군이 되며 개설된 계좌로 자동 입금된 크레딧과 시스템상의 공헌도 창에 적립된 공헌도와 달리, 물질적 보상인 코어와 전용 장비는 지급 방식이 달랐다.
“호오.”
성현은 눈앞에서 무지갯빛과 함께 등장한 둥근 에테르 코어를 받으며 감탄했다.
투명하지만, 무언가 일렁이는 것이 담긴 구슬.
성현은 처음으로 받은 코어를 들고 신기한 듯 들여다보았다.
일반적으로 다른 군인들이 에테르를 성장시키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였다.
일종의 ‘영약’을 섭취하거나 직접 에테르를 응집하거나 또는,
‘이 에테르 코어를 사용하거나.’
그러나 임무의 보상으로 직접 코어를 받거나 공헌도로 구입하거나 이 둘 모두 기본적으로 간부가 되어야 하기에 병사들은 영약이나 수련을 통해 에테르를 늘려야 했다.
물론 영약의 경우는 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에 대체로 수련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당연히 예외는 존재했고, 생명체를 집어삼키거나, 심지어 열기 같은 에너지부터 철 같은 무기물까지 모두 양분으로 사용하는 성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못 쓰는 건 아니니까.’
이번이 첫 임무인 성현은 처음으로 받아보는 코어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가면 이마의 계급장 부분에 가져다 데었다.
“오오!”
그러자 구체가 스르르 녹아내리며 그 안의 에테르가 ‘중사’ 계급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중사라고 자꾸 강요하지 마십쇼.”
“응? 하사 따리가 하는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
성현은 당장이라도 그를 뚫어버릴 것처럼 오러를 피워 올리는 진소영 하사의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검을 쥔 그녀의 손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더 이상 놀리면 정말 하극상이 벌어질 것 같았다.
“후···.”
심호흡으로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힌 진소영 하사는 계급장에 에테르가 늘어난 것을 확인하고 신기해하는 성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중사’ 님이 구출한 박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중사’ 님이 임무를 실패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자그마치 ‘중사; 인데.”
“아···. 미안해. 그만해줘.”
슬쩍 머리를 긁적인 성현은 이내 고개를 돌려 지하의 한쪽 벽면으로 향했다.
“?”
시청 지하에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수많은 감옥들 중 성현의 시선이 향한 곳만이 붉은 모래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안에 계셔.”
“???”
의문이 가득 담긴 그녀의 눈에 성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님이 사고 방식이 괴상하다고 말하긴 했는데.’
직접 만나 본 박사는 성현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성현은 조금 전 그가 인사를 건넸을 때를 떠올렸다.
[왜 이제 오는 거야! 내가 여기 얼마나 오래 갇혔는데! 지겨워 죽는 줄 알았잖아! 내 실험, 내 연구! 전부 다 챙겨 왔겠지? 그리고 그 흑마법사! 그 빌어먹을 놈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당하게 자기 할 말만 쏟아내는 모습에 질린 성현은 <열사폭균>에 강렬한 의지를 담아 감옥의 철창을 메꾸고 있었다.
덕분에 조용해진 지하의 복도.
잠시 안으로 감각을 뻗었던 성현은 다시 인상을 찌푸리며 감각을 끊었다.
“박사님이 아직 정정하시네.”
“???”
성현이 모든 것이 모래에 파묻혔다는 말 이후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지르는 박사의 모습에 그가 건강하다는 것을 확신한 성현은 그에게 관심을 끄고 1번 임무 완료 버튼을 눌렀다.
[보상]
[2000 크레딧, 공헌도 100, 장비 가공권]
다른 보상은 섬멸에 비해 훨씬 적었지만 성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이 임무를 받은 이유는 세 번째 보상인 장비 가공권 때문이었기에.
‘그 가공을 해줄 박사가 저러고 있긴 하지만.’
“^&%^&$%^”
아직 시간이 조금 필요해 보였다.
멍하니 포트의 그림자에 옹기종기 모여 도시 쪽을 바라보고 있던 수인들.
“끝난 거 아닌가?”
도시와 그 일대가 모래 속에 묻혀 사라진 것을 바라보던 이들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장벽도 다 부서졌고.”
모래의 해일에 박살 난 장벽은 곳곳에 그 뼈대만이 모래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모습에 그들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디에스코의 상징이자, 영원할 것만 같았던 황금의 장벽이 무너졌다.
죄악으로 가득했던 도시와 함께.
“뭐, 잘됐지.”
바쿠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서 말했다.
“어차피 떠나지 못해 머물던 곳이야. 이제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니 우리도 새롭게 시작해야지.”
“어떻게? 어디서? 뭘 할 건데?”
“용병도시로 갈까? 거리도 가깝고 우리도 용병으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네.”
왠지 힘이 빠져 보이는 수인들에게 바쿠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하나 있는데.”
“응?”
쿠르릉!
성현과 진소영 하사, 그리고 박사가 모래 속에서 빠져나왔다.
“와, 도시가 아예 사라져 버렸네.”
주저앉아 감탄을 터트리며 붉은 모래를 문지르는 박사를 보며 성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 너무 피곤하네.’
박사는 성현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로웠다.
“수송선은 대체 언제 오는 거지?”
“아마 곧 올 겁니다.”
성현의 임무창에 임무 완료 버튼이 떠올랐으니 그 임무를 하사한 그라논 대위도 성현이 박사를 회수했다는 것을 확인했을 터였다.
‘대장님은 나보다 박사 성격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아, 저기 오네요.”
에비즈락의 대기권을 가르고 내려오는 익숙한 형태의 함선.
“화생방 특임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화생방 특임대에 소속된 지 얼마 안된 성현과 달리, 스코튼 박사는 종종 특임대에 방문한 적이 많았다.
“히익! 스코튼 박사 출현!”
위이잉!
“???”
그래서 그런지 그가 함선에 탑승하자, 그것을 발견한 빈센트 병장이 곧바로 비상벨을 눌렸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시끄러워! 저거 당장 안 꺼?!”
“으악!”
박사의 역정에 성현과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도망가는 빈센트 병장.
무언가 말하려던 성현은 그의 시선이 빈센트 병장의 촉수에 고정되는 것을 보고 알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에잉!”
그러다 익숙하다는 듯 걸음을 옮기는 박사를 뒤따르던 성현은 조금 전 헤어졌던 진소영 하사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수고했어.]
“···.”
잠시 기다리다가 답장이 없자, 성현은 곧바로 박사를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놀렸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수고 많았습니다. 이성현 하사, 아니 중사.”
“감사합니다.”
성현이 메시지를 보내는 그 짧은 사이 사라져 버린 박사를 찾던 성현은 이내 포기하고 복귀 보고를 하기 위해 그라논 대위를 찾았다.
“아니, 이젠 대위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느새 소령이 되어 있는 그라논 소령을 발견하고 감탄했다.
“그러는 이성현 중사도 이제 중사이지 않나요? 그리고 이게 다 이성현 중사 덕분입니다.”
“네?”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까마귀 방독면의 방호경 너머로 성현은 그의 눈이 웃고 있다고 느꼈다.
“그동안은 지휘관으로서 결격 사유가 있어 진급이 누락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현의 머릿속에 하나같이 폐급인 화생방 병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흠···.’
이번에 성현이 맡았던 섬멸 작전.
연방에서 민감하게 반응한 불법 각성 시술에 흑마법사까지 엮이며 수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렸다.
“오랜만에 발견된 흑마법사라 그런 것도 있습니다.”
근 10년 가까이 발견되지 않았던 흑마법사가, 그것도 불법 각성 시술을 통해 꼬리가 잡혔다.
“하지만 놓쳤습니다···.”
성현의 말에 그라논 소령이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흑마법사가 엮이면 기본적으로 위관급 이상이 투입됩니다. 하사였던 이성현 중사가 흑마법사를 쫓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잘한 겁니다.”
에테르를 오염시키는 흑마력은 그 특성상 이제 겨우 주특기의 틀을 잡은 부사관이 상대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성현 역시 도시 전체를 섬멸하기 위해 <열사폭균>을 잔뜩 증식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위험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성현은 자잘한 오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막대한 규모의 <열사폭균>을 부리고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흑마법사를 쫓아낼 수 있었다.
“제4군사령부에서도 그 점을 참작해, 그런 보상을 준 거겠죠.”
“아, 네.”
성현은 그라논 소령이 무엇을 말하는 지 눈치챘다.
‘전용 장비.’
2번 임무의 보상 리스트에 존재하는 그것은 에테르 코어와 달리 곧바로 전송되지 않았다.
[절차 대기]
“이성현 중사는 저와 같은 화생방 병과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사령부에서 제공할 화생방 병과 전용 장비는 모두 봉인 해제 절차를 거쳐야 하니까요.”
그동안 적합한 화생방 병이 없고 유출 시에 큰 사고로 번질 수 있어, 연방에서 대부분 봉인처리 했다는 장비들.
“조금 기대가 됩니다.”
기대에 부푼 성현을 바라보던 그라논 소령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용병 도시에는 왜 안 들렸죠?”
“아!”
성현은 그제야 예전에 그라논 소령이 말했던 ‘협력자’를 떠올렸다.
불법 각성 시술을 발견하고 갑자기 상급 부대에서 2번 임무를 내리는 바람에 성현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본래 예상과 다르게 곧바로 디에스코로 들어갔더군요.”
“아, 네···.”
‘정문을 가볍게 지나쳐서 생각도 못 했네.’
본래 도시의 출입을 도와주기로 했던 협력자의 도움도 없이 성현은 도시에 들어섰다.
“함께 임무에 투입되었던 하사의 보고에 따르면 흑마법사가 재료 수급을 늘리기 원해서 시청 측에서 출입제한을 대폭 완화, 아니 거의 없앴다고 하니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흑마법사의 출현이 오히려 성현을 도운 셈이었다.
‘이게 맞나?’
그라논 소령의 시선이 고개를 갸웃하는 성현의 뒤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보니 갑주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 그건.”
그의 질문에 성현은 함선에 타기 위해 포트와 그 안에 숨겨둔 갑주를 찾았을 때를 떠올렸다.
“박사님이 가져갔습니다.”
영웅급 괴수의 껍데기라는 것을 한눈에 눈치챈 스코튼 박사는 성현에게 그것에 대해 물었고, 성현은 박사에게 그를 찾은 이유를 말했다.
“박사님이 제가 대장님께 받은 장비 가공권을 받아 가셨습니다.”
원래 자신에게 쓸 것이 아니었냐고 뜯어간 박사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갑주를 챙겼다.
“그게 박사한테는 군인이 받는 임무와 비슷하게 적용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져간 것이고.”
그라논 소령이 가공권 같은 것을 사용하려면 본래 보상을 적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마 그래서 그냥 그렇게 가져간 걸 겁니다. 이성현 중사에게 고마워서.”
성현은 알고 보니 츤데레인 박사를 떠올리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박사는 생명공학 계통 병기의 권위자입니다. 그러니 아마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그러나 그라논 소령이 덧붙이는 말에 금방 미소로 바뀌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