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황녀의 은밀한 밤

“정말 민망해 죽겠네.”
방에서 19금 로맨스 소설을 음성인식으로 집필하는 단테의 목소리가 온종일 들렸다.
“그녀의 몸을 뒤로 하여 납작한 배부터 XX까지 손을 올렸다옹. 떨리는 그녀의 XX을 두 손··· 아니. 두 손으로 잡으면 둘 다 바닥에 엎어지겠구나옹.”
“······.”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옹. 입술로 목을 감싸자 찌릿한 서로의 진동을 느꼈다옹. 손가락으로.”
19금 로맨스 소설은 그냥 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야설과는 명백히 다르다.
판타지 소설에서 판타지 요소의 핵심이 개연성이라면 스킨십의 핵심도 개연성이어야 한다.
여기서 개연성이란 판타지 소설의 개연성과 그 맥을 달리한다.
판타지 소설에서 개연성이 있다면 현실에 있을 리 없는 현상이나 특별한 아이템이 나타나도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19금 로맨스에서 개연성이 있다는 것은 뭐랄까.
‘그 장면’이 나오기 직전까지 몸의 피가 한곳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다가···.
‘그 장면’이 나올 때, 그 모여있던 피가 ‘왈칵’ 높은 담장을 넘는 기분이랄까.
결국 그 짜릿한 기분을 필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19금 로맨스 소설에서는 개연성이다.
그래서 작가들 사이에서는 19금 소설을 쓸 수 있는 혈통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독자의 피를 유능한 양치기 개처럼 한 곳에 몰다가 적절한 때 큰 댐 밖으로 방류해 버리는···.
소위 지려버리는 필력을 가진 작가를 19금의 혈통이라고 한다.
노력으로 가능한 것인지, 실제 성생활과 관련된 것인지 알려진 바는 없다.
19금 로맨스 소설을 쓸 수 있는 선택을 받은 순수 혈통 작가, 그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샤넬 클래식 숄더백에 고급스러운 정장 재킷을 입고 엘리베이터에서 공손하게 인사하는 당신의 이웃.
그 사람이 그 혈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태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듣자 하니 단테도 아니다.
“옷을 한 겹, 한 겹 벗길 때마다 숨이 가빠진다옹. 어깨를 따라 흘러내리는 가운을 기다리지 못하고 거칠게 내려버렸다옹. 그러자 가운에 가려져 있던 그것이···.”
태리는 생전 처음으로 헤드셋을 샀다.
혼자 살기 때문에 없어도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던 물건이었는데···.
저걸 듣고 있는 것보다 헤드셋을 끼고 유튜브의 ‘5분만 들어보세요. 금전을 불러오는 음파. 돈이 굴러들어옵니다.’ 소리를 듣고 있는 게 더 나았다.
그렇게 단테의 19금 소설의 무료 연재를 시작하는 날이 왔다.
“너무 떨린다옹. 이렇게 바로 올려도 되다니옹.”
“지금은 떨지 않아도 돼. 어차피 10화까지는 매일 1, 2화만 올리다가 10화 지나면 10개를 한꺼번에 올릴 거야. 그때 떨려도 돼.”
“왜 그래야 하지옹.”
“오늘의 베스트에 오르기 위해서야. 어차피 서브 미션이 실시간 베스트 1위를 한 번만 찍으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해야 독자들이 10화를 연참한 소설을 골라 보기 때문에 그때 실시간 베스트를 찍을 확률이 높아져.”
“그런 게 있구나옹. 완전 설렌다옹.”
‘아니야. 기대하지 마. 설레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제목과 필명은 정했어?”
“필명은 ‘베아트리체’, 제목은옹···.”
“아직 안 정한 거야?”
“태리, 네가 지어줬으면 좋겠다옹.”
태리는 조금의 생각할 시간도 갖지 않고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고귀한 황녀의 은밀한 밤’으로 해.”
“태리옹.”
“너무 좋아?”
“내가 읽었던 소설의 제목과 비슷하니, 다른 제목을 정해줘라옹.”
“비슷한 게 있어?”
하여간에 깐깐한 고양이다.
***
200화에 가깝게 연재되고 있는 ‘천국에서 돌아온 악인헌터’는 순항 중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에 특별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 얼마 전에 은퇴한 골프선수와 결혼할 뻔한 사기꾼 피해자들의 눈물을 보고 너무 가슴 아팠어요. 그 사기꾼도 다뤄주세요.
- 9살 나영이를 성폭행하고 12년 만에 출소한 조성헌을 단죄해주세요.
‘얼마든지’
‘천국에서 돌아온 악인헌터’의 댓글에는 실제 사건의 범죄자를 처단해 달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주로 중대한 악행을 저질렀어도 심신미약 등으로 감형받아 이미 출소해서 새 인생을 사는 범죄자들이 대상이었다.
태리는 밤을 새워 댓글들의 사건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회차를 거듭하며 차곡차곡 그들을 단죄해 나갔다.
그 시원한 장면에 독자들은 환호했다.
- 저렇게 잔인한 형벌이 우리는 필요했다.
- 작가님을 판사로 임명합니다.
- 작가님과 동시대에 사는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리의 작전이 주효하여 드디어 조회수는 상승세를 지속했다.
그리고 특히 주인공이 조금이라도 불행할 것 같으면 천사들이 허둥거리며 긴급회의를 여는 장면도 독자들이 좋아했다.
누군가 나의 행복을 위해 저렇게 처절하게 애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 같았다.
시놉시스의 큰 줄거리를 따라가되, 세부적인 에피소드는 모두 독자들이 좋아하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철저하게 독자의 웃음을, 즐거움을, 통쾌함을 계산하여 전개한 덕에.
지금은 조회수가 무려 200만이란 말이다.
그런데 대체 저놈의 고양이는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르고, 200만이라는 숫자에 적잖이 실망하다니.
단테는 지금 성적이 매우 실망스럽지만 19금 로맨스 소설로 반드시 태리의 고양이 단테님과의 계약을 이행 완료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200만이 뭐냐옹. 200만이옹! 여기 온 지 벌써 6개월이다옹! 우리에게 시간이 없단 말이다옹. 걱정마라옹. 태리옹. 내 19금 로맨스 소설이면 금방 1억 뷰를 채울 수 있을 거다옹.”
태리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야한 소설을 쓰고 있어서 그런가.
단테는 새벽에 창밖을 보고 우엥 우엥 울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태리가 19금 로맨스 장르의 집필을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때가 된 건가.’
태리는 안타까웠다. 산책하러 나가지 않았다면 덜 했을까.
베아트리체가 남긴 페로몬 흔적을 맡은 단테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될 수 있다면 이 문제는 피하고 싶었다.
고양이기 이전에 대문호였다. 위대한 시인이자 근대를 연 지식인이다.
그에게 그런 굴욕을 줘도 괜찮은 것일까.
***
“형. 무슨 일 있어요?”
준식은 병철의 작업실에서 자신의 유튜브 영상을 편집하고 있다가 병철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별일 아니야. 편집 언제 끝나?”
“좀 있으면 끝나요. 형, 오늘 방송하려면 아직 한참 시간 남았죠? 같이 밥 먹어요.”
“그래. 요즘 구독자는 좀 늘었어?”
“헐. 제 영상 안 봐요? 형에게 맡길만한 사건도 제보가 오던데. 많이 늘었죠. 취미로 하는 것 치고는.”
웹툰 작가인 준식은 공포 사연을 애니메이션과 함께 소개하는 유튜브 영상을 아주 가끔 올린다.
처음에는 그냥 영안에 눈을 뜨게 된 사연을 유튜브에 올린 것 뿐인데, 그 영상이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다.
그 뒤로, 종종 공포 사연을 제보받거나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들어 올리고 있다.
“웹툰 작가가 유튜브도 하면 너무 바쁘겠는데.”
“그러게요. 시간이 없긴 한데요. 사연을 받으면 좋은 영감을 얻기도 하고, 아시다시피 제가 영안이 뜨여있어서 이렇게라도 풀면 좋더라고요. 그리고 그 덕에 형이랑 이렇게 친해졌잖아요.”
준식은 병철의 오랜 팬이었다.
자기가 정말 영안을 가진 게 맞는지, 조현병 증세는 아닌지 궁금했고 병철에게 검증을 요청했다.
그리고 함께 방송하다가 무당인 진원과 같은 영가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준식은 자신이 진짜 영안자인 걸 깨달았다.
그 뒤로 준식은 공포 유튜브를 시작했고, 영상을 편집할 때 병철의 작업실을 종종 빌렸다.
저녁을 먹고도 병철의 방송까지 시간이 남아, 둘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하는 준식을 보고 병철이 물었다.
“이렇게 저녁에 커피 마셔도 괜찮아?”
“저는 상관없어요. 어차피 오늘 밤샘 작업해야 해서.”
“안녕하세요. 팬이에요. 방송 너무 재밌게 보고 있어요.”
20대 정도일까. 앳된 여성 둘이 상기된 얼굴로 병철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예. 감사합니다.”
“혹시 사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예. 물론이죠.”
고개를 끄덕인 병철이 사인을 하는 동안 그 여성들은 뭐가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다.
사인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도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모른다.
“아~. 형 인기 많네요. 참, 만나시던 분이랑은 계속 잘···?”
“헤어졌어.”
“왜요? 엄청 예쁘시고 성격도 좋아 보이던데.”
“······.”
“형도 그런 건가. 좀 허들이 높은 것 같아요.”
“그런가······ 너는? 넌 잘 지내, 여자친구랑? 그··· 회계사였나?”
“저야 잘 지내죠. 그나저나 계절이 겨울은 맞나보네. 여기저기 이별 소식도 많이 들리고”
“왜. 또 누가 헤어졌어?”
“그 저번에 제가 제보했던 제 친구요. 태리. 걔도 여자친구랑 헤어졌어요.”
“아, 사연자분. 인기 많을 것 같더라. 잘 생겼던데.”
“네. 인기 많아요. 그런데 별로 연애에 관심이 없어요. 걔 관심은 오로지 고양이랑 웹소설. 웹소설 작가거든요.”
“그렇구나. 그런데 부모님이 두 분 다 안 계신다고 들었는데 언제부터···.”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두 분 다 사고로 돌아가셔서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우리는 대학교에서 만났거든요. 그래도 좋은 후원자가 있어서 대학도 나오고 집도 있고, 태리는 운이 좋은 거지요.”
“음···.”
“그런 유년 시절을 겪어서 그런지, 옛날부터 연애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걔는 웹소설이 전부예요. 꿈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어요.”
“······.”
“그런데 걔 요즘 대박 터졌어요. 잘 돼서 다행이에요. 어, 형. 이제 가셔야겠어요. 방송.”
“아니야. 아직 괜찮은데.”
“빨리 가서 준비하셔야죠. 저는 이제 본업하러 갈게요.”
“정말 괜찮다니까.”
***
병철이 어두운 표정으로 작업실에 들어오자 진원이 방송 시작 준비를 했다.
진원도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형, 그 왜 재개발지역에 있던 집 말인데요. 제가 가봤는데도 소용이 없어요. 영가가 숨어서 전혀 보이지 않아요.”
병철이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다.
꼭 돕고 싶은 집이 있는데 잘 풀리지 않았다.
“그랬을 거야. 내가 소용없다고 했잖아. 거기 사연자님 점점 힘들어진다고 연락이 오던데. 어떻게 해야 하나···.”
“이번이야말로 진짜 그거···일까요?”
“악귀··· 일 수도 있겠어. 그게 아니면 일반인이 있을 때는 그렇게 심령 장비들이 난리를 치는데 무당이 갔다고 그렇게 숨어버릴 수가 있어?”
“사연자님이 너무 힘들어하기도 하고, 구독자들도 솔루션을 기다리고 있어서 포기하기도 좀 그래요. 형 혼자서 가는 거는 좀 그렇고······.”
“너 잘 아는 구마사제님께 부탁드려보는건 어때?”
“존재가 확인이 되어야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인데, 내가 확인을 할 수가 없으니까요.”
진원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누구랑 같이 가보는 건 어때요? 위험하니까 기가 센 사람으로. 일단 동선만이라도 파악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거기에 비방을 하던지···. 그 준식이라는 친구는 어때요?”
“걔도 반무당이라 숨을 거야.”
“그럼, ‘고양이의 집’ 사연자님은 어때요?”
태리를 언급하는 진원의 말에 병철의 눈이 번득였다.
“사연자님?”
이번 일에 가장 꼭 맞는 적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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