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사명

운명의 시간은 빠르게 다가왔다.
‘사건은 오늘 저녁부터 내일 새벽 사이에 일어난다.’
소설대로라면.
파리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무기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확신할 수는 없어.’
이미 소설의 내용과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고, 북부 생도들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북부 생도들에게는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었다.
‘내일부터는 축소되었던 행정들이 본격적으로 정상화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수도를 떠나있던 칠공가문의 가주들이 복귀했다.
그들의 존재는 북부가 어떤 준비를 했든 간에 그 모든 것을 무용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설마 북부에서 고위 기사를 파견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만일 상황이 거기까지 악화된다면, 어차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쪽지를 꺼냈다.
‘극위급이 둘에, 정위급만 여덟이라.’
촉박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의 동원력이었다.
‘···하긴 이 정도 행동력은 있어야, 주인공의 적이라고 할 만하지.’
소설에서 밤나비는 지독한 악역에 가까웠다.
그들의 목적은 흉물의 힘을 사용하는 자들에 대한 추적과 척살.
그 힘을 각성한 주인공이 그들의 살생부에 올라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으니까.
주인공은 밤나비에게 쫓기며 수많은 인연을 잃었고, 밤나비 역시 주인공을 쫓으며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의무가 증오가 되고, 증오가 복수가 되는 연쇄.
그들 사이에는 지독한 피의 악연이 있었다.
‘연합 입장에서는 백혈구 같은 존재지만, 주인공 입장에서는 악당과 다름없었지.’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니었다.
연합의 안정을 바라는 자신의 입장에서 밤나비는 든든한 아군에 가까웠으니.
‘그 정보력과 무력은 충분히 이용해 먹을 가치가 있다.’
그들의 집요함과 유능함은 이미 소설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하지만 우선 눈앞에 있는 일부터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최대한 몸 상태를 끌어올린다.’
가볍게 칼을 뽑아 들어 익숙하게 휘둘렀다.
손에 붙는 감촉과 적당한 무게감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몸이 자연스럽게 검식을 펼쳐내고, 유려한 검무가 갈구하는 춤이 되어 끝없이 이어졌다.
지구에서는 몸으로 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었지만, 여기서는 검을 다루는 일 하나만큼은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막힘없이 이어지는 절묘한 감각,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한 직관.’
마치 필터라도 덧씌운 듯이, 검의 궤적이 환상처럼 눈앞에 드리웠다.
천재라는 자들은 이런 감각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걸까.
파리스는 새삼스럽게 축복 상점의 사기성에 감탄했다.
‘도대체 어떤 원리로 이런 일들이 가능한 거지?’
인간의 몸에 재능을 각인하고, 기간이 지나면 회수한다.
분명 마력적인 각인과 어떤 관련이 있어 보였지만, 어떻게 마력으로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원리를 알아낼 수만 있다면, 공짜로 재능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복잡한 상념 속에서도 몸은 충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재능의 길을 따라서 그려진 검광이 하나의 띠와 같은 형상을 이루며 주변을 감쌌다.
순수하게 검과 육체만으로 연성해 낸 은빛의 띠가 사방으로 나부낀다.
그는 은빛의 그림자 속에서 어떤 형상을 보았다.
고요한 어둠을 비추는 창백한 푸른빛.
어두운 하늘은 창백하게 빛나고, 잔잔한 수면은 그 모습을 탐욕스럽게 담아냈다.
마치 쌍둥이처럼 똑 닮은 두 개의 세계.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대지인지.
교차하는 푸른빛은 경계의 수평선에서 기괴하게 꺾인다.
그는 흐려진 세계의 경계에서 선을 잡으려 했다.
조금만 더 휘두른다면, 그 너머에 닿을 수만 있다면···.
···.
돌연 검이 멈추었다.
‘흐릿해.’
심상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지독하게 거친 노이즈.
가장 밝아야 할 곳에서는 알 수 없는 공허함만이 느껴졌다.
마치 어둠이 빛을 흘리는 것처럼.
그 역설적인 감각이 검식이 품은 모순을 알리고 있었다.
저 빛은 과거의 잔재에 불과하단 걸.
이 길의 끝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상점에 불량품을 비치해 놓다니, 이거 사기 아니냐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최악의 선택이 되어버렸다.
“젠장.”
긴고아도, 검식도, 빙의도.
납치범과 관련된 것은 하나 같이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처음부터 사기꾼이었어.’
도와준다던 시스템은 자신을 옭아매는 목줄이었고, 가장 비싼 상품은 골칫덩어리 불량품이었으며, 애초에 빙의마저 자신의 동의 없이 행한 독단이었다.
그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검을 회수했을 때,
‘···누구지?’
멀리서부터 이곳을 향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승님?
‘아냐, 스승님이라기엔 발소리가 너무 가벼워.’
여자인가?
‘···여기까지 찾아올 여자가 있었나?’
작은 떨림에 불과했던 소리가 선명하게 가까워졌다.
“헬렌?”
창문 너머로 익숙한 갈색 머리의 소녀가 보였다.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여 사방으로 뻗친 머리
먼지를 뒤집어쓴 탓에 뿌옇게 변한 생도복
검게 더러워진 단화와 짝짝이로 신은 양말
‘···메네르를 찾고 있는 건가?’
“선배님!”
헬렌이 급하게 훈련관의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편지, 편지가 날아왔어요.”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진정해요.”
그는 공포와 염려가 뒤섞여 있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주인공과 관련된 일인가?’
주인공은 그와의 싸움 이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헬렌이 그를 찾으러 나섰지만, 학교 측의 협조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주인공의 일은 북부 생도들을 막은 후에 생각하려고 했는데···.’
주인공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시기가 좋지 않았다.
파리스는 훈련관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젠장.’
곧 교수와 밤나비 단원들을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을 무시할 수도 없어.’
그는 상황이 제대로 꼬여가고 있음을 느꼈다.
“일단 편지에 대해 설명해 줄래요?”
“···방에, 메네르의 방에 찾아갔을 때, 이런 편지가 놓여있었어요.”
그녀가 간신히 숨을 가다듬으며 한 장의 편지를 건넸다.
파리스는 접혀진 편지지를 펼쳐서 그 내용을 확인했다.
“···기사 생도 파리스를 대동하고, 32번 구역에 있는 시계탑으로 와라?”
그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나를 부른다고? 어째서?’
어떤 납치범이 일행과 동행할 것을 요구한단 말인가?
그것도 자신을 콕 집어서.
‘양아치에게 원한이 있는 자인가?’
하지만 이 세계선에서 자신과 주인공은 어떠한 인연도 없었다.
기껏해야 달밤에 추격전 좀 벌이다가, 주먹질 좀 나눈 사이?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그 누구도 자신과 주인공과의 관련성을 찾아낼 수 없었다.
‘소설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이상에야.’
“선배님, 제발 같이 가주세요. 잘못하면 메네르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몰라요.”
헬렌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간절히 애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파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연합과 주인공에 하나를 고르라고?’
그는 직감적으로 이 선택이 중대한 분기점이라는 걸 깨달았다.
최악으로 갈 것인지, 더 최악으로 갈 것인지에 대한.
‘···나는 어떡해야 하지?’
* * *
긴 시간을 악몽으로부터 도망쳤다.
어둠 속은 고독하고 무서웠지만, 그는 빛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자신은 빛 아래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너무 많은 피가, 너무 많은 고통이, 너무 많은 불행이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붙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자신과 함께 웃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이제 자신의 손에 남은 것은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붉은 피였다.
새빨간 핏속에서 끊임없이 속살거리는 목소리들을 들었다.
그것들은 자신을 저주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들이 자신을 동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그 속에 다정함은 없었지만.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이대로 간다면 지금의 자신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그러나 자신은 그것을 손으로 붙잡을 힘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모래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기에, 더 이상 손쓸 방법도 없었다.
자신은 미쳐가는 중이었고, 스스로가 그것을 방관하고 있었다.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마치 이미 한 번 겪었던 일들인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워서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과거와 미래, 그 시간선을 가늠할 수 없는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돌이킬 수 없는 대죄를 저질렀다는 걸.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전신을 휘돌고 있는 이 적색의 힘이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자신이 겪었던 모든 비극들 역시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어린 청년이 견디기엔 너무 가혹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광기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광기는 마치 어머니의 양수처럼 자신을 감싸안았으며, 그는 그곳에서 안온함을 느꼈다.
태아처럼 몸을 웅크렸다.
이대로 세상이 끝났으면···.
안온함 속에서 그는 어떤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한 여인의 향기.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여인,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았던 여인.
이 모든 광기의 시작점.
···끝내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했던 사랑.
그녀가 남긴 상처는 너무나도 깊어서 회복할 수 없었고, 그는 평생에 걸쳐서 그것을 안고 가야만 했다.
아니, 상처가 아니라 사랑이 너무 깊었다.
그는 다른 여인과 함께 할 때도, 자신의 아이가 첫걸음마를 뗄 때도, 그 모든 것이 그녀와 함께했기를 바랐다.
그녀가 그의 모든 것이었기에 그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향기를 따라갔다.
어두운 숲길을 걸었고, 어두운 하수도를 걸었고, 어두운 소로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서 자신의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눈에 자신의 마음을 가져간, 순수한 눈망울을 가진 그녀를.
그녀는 아직 피를 흘리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그를 저주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그녀를 향해 뛰어갔다.
중간중간에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들이 있었지만, 가차 없이 찢어버렸다.
헬렌, 나 여기 있어! 나를 봐줘!
왜 그렇게 파랗게 질렸어?
뭐가 너를 무섭게 하는 거야?
왜 내게서 물러서는 거야?
···그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야?
이번에도 나를 버리려는 거야?
이번에도 그 남자에게 가겠다고?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그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이번에도 그 남자에게 안겨있는 그녀를.
참을 수 없는 증오, 원망, 절망, 고통, 슬픔,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번에도 안 되는 거야?
나로는 너에게 닿을 수 없는 거야?
어째서 넌 나를 바라봐주지 않는 거지?
이번에도 너를 죽일 수밖에 없는 거야?
폭발하는 감정들이 기폭제가 되어 막대한 적색의 폭풍이 터져 나왔다.
악몽의 끝자락에서 경험했던 전능감의 파편이 온몸을 휘감는다.
온통 붉은 색으로 가득 차버린 세상 속에서 누군가가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저 둘을 떼어놓아야 했다.
···죽여서라도.
그는 온 힘을 다해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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