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사명

“···마침내 구원자님께서 준비가 되신 모양이야.”
로브를 깊게 눌러쓴 자가 붉은 안광을 흘리며 말했다.
“여기도 준비가 다 됐다.”
그 말과 함께 창백한 피부의 사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누더기 우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군.”
그들은 어두운 창고 안에 우뚝 서 있는 붉은색의 흉측한 조형물을 바라보았다.
피부를 벗겨낸 붉은 살점 덩어리들을 뭉쳐 놓은 것 같은 형상.
그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심장처럼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박동하며, 붉은빛의 무언가를 울컥거리며 쏟아내고 있었다.
“지금 시대에는 이것을 막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겠지. 그 지긋지긋한 밤나비 놈들도 이런 것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를 거야.”
창백한 피부의 사내가 음산하게 웃었다.
“뭐, 시간을 뛰어넘은 물건이니 말이지. 다만, 신자들이 지나치게 희생된 게 아쉽긴 하군.”
“그것은 구원을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
그렇게 말한 사내는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졌다.
“그 끝에 구원이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드러난 사내의 몸은 기괴하리만치 창백하고 깡말라 있었다.
그 메마르고 창백한 피부 위로는 칼로 새긴 듯한 기이한 문신들이 가득했는데, 그 문신들은 그들의 눈앞에서 맥동하는 우상과 같은 속도로 맥동하며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내는 바닥에 진득하게 고인 붉은빛 액체를 철퍽거리며 밟고 나아가, 이내 우상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나 역시 도래할 구원을 위한 발판에 불과하니.”
“···멈춰있던 해방의 기수가 다시 움직이리라.”
그들의 말과 함께 우상의 박동이 급격하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번 계획은 해방의 시작을 알리는 봉화가 되겠지.”
“숭고한 희생에 경의를.”
로브를 눌러쓴 자가 사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인류에게 구원을.”
창백한 남자는 우상을 껴안았다.
* * *
“말씀하신 생도는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건가요?”
렌 교수는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자신을 응시하는 자색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 같습니다.”
“도시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자색 눈동자를 지닌 미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돼요. 다른 조건들은 무시할 수 있다고 해도, 계명자의 수급을 중앙이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이상, 북부는 장기전을 끌고 갈 여력이 없을 텐데···.”
“북부도 사태를 그리 길게 끌 생각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장벽 너머의 위협이 감소했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 시간을 끈다면 양면 전선을 강요받게 될 거란 걸 그들도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사자 백께서 그걸 두고 보실 리가 없다.’
“아마 북부는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한 후에 협상에 나설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까지 부를 생각은 없었습니다, 카이린 경.”
“어머, 의무대 소속이라고 무시하시는 거예요?”
그녀가 마음이 상한 듯이 그를 흘겨보았다.
“이래 봬도 전투조 대장도 겸하고 있는 엄연한 극위 기사라구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조직이 전체적으로 인력 부족에 시달려서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니 아쉽겠지만 저로 만족···.”
“그, 그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교수는 손을 내저으며 허둥댔다.
“대장 한 명쯤은 본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결코 당신을 무시하려고 했던 게 아니···.”
“알아요.”
그녀는 허둥대는 교수의 모습을 보며 살포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본부는 하이만 대장님께서 지키고 계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이만 경께서요?”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 분께서는 총대장님의 명으로 남부에 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최근에 새로운 명령이 내려온 모양이에요. 그래서 급하게 복귀하셨답니다.”
‘애초에 총대장님께서 왜 그렇게 남부에 집착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만 경께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그들 사이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벌써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났어. 이제 우리끼리라도 움직여야 한다.”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던 사내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하늘에는 벌써 주황빛이 번져가고 있었고, 거리에 있는 가게들은 문을 닫거나 문밖에 등불들을 걸어두고 있었다.
“계획은 있는 거겠지?”
“···그래, 북부 생도들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해 미리 얘기를 해둔 것이 있다.”
교수는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북부는 수도에 미리 공작원들을 잠입시켰다. 그들로 하여금 수도에 혼란을 일으킬 생각이겠지.”
“생도들의 탈출이 용이하도록 양동 작전을 펼친단 말이군.”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 최악은 생도들이 그 혼란을 틈타 곧바로 수도를 탈출하는 거다.”
“그래도 수도를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려면 탈출 루트가 제한되니, 오히려 막기가 용이하지 않을까요?”
카이린이 말했다.
“물론 그것도 타당한 의견입니다만, 그 경우에는 상대의 주요 전력들도 집중되어 우리의 피해가 커질 우려가 있습니다.”
“상대의 전력에 대한 정보가 있나?”
벽에 등을 기댄 사내가 물었다.
“아무리 북부라고 해도 수도에 많은 수의 기사 전력을 보내는 것은 무리다. 자칫 그들이 죽거나 인질이 된다면 북부의 입장에서도 큰 타격이 될 테니까. 아마도 극위 기사는 많아야 2명에서 3명, 정위 기사는 20명 전후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이 온전히 생도를 호위하는 임무에 투입될 수는 없겠지.”
“양동 작전을 지휘하고 탈출 과정 전체를 조율해야 할 인원들은 반드시 필요할 테니까.”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북부 생도들이 곧바로 탈출하려는 움직임을 취하지 않을 것 같다는 거다.”
“그들이 굳이 수도에서 미적거릴 이유가 있나요?”
카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최근 북부 생도들이 사관학교 외의 군사 구역에서 목격되었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짐작건대, 그들은 사관학교가 군사 구역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근처에 존재하는 군사시설물들에 대한 사보타주 및 자료 탈취를 계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중앙에서 군사 자료들을 탈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긴 하겠군.”
“그래, 그리고 우리는 놈들이 흩어지는 그 틈을 노릴 거다. 모든 이들을 잡을 필요는 없어.”
사내가 벽에서 등을 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외곽지역을 맡지.”
“율리안 경, 첩보조와 계속 연락을 유지하세요. 저번처럼 길 잃지 말고요.”
율리안이라고 불린 사내는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건물을 나섰다.
“화재에 대한 것도 준비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까지 대비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그래도 율리안 경이 늦게라도 합류해 준 게 다행입니다.”
카이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슬슬 나가 볼까요?
그녀가 먼저 일어나서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교수는 마지막으로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파리스,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거냐?’
* * *
‘젠장.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파리스는 미친개처럼 달려드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그는 맹세코 이 세계에 빙의한 이후로 조용한 삶을 지향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술도, 여자도, 다툼도 멀리하고 수련만 반복하는 삶이었단 말이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들도 있었지만, 그건 자신의 자의가 아니었으니 패스.
그도 이 육체가 쌓은 업보들이 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자신의 정신적인 결백함만큼은 티끌 하나 없이 순수하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를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칼날은 그런 결백함 따위에는 영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 칼끝에 서린 서늘한 예기와 공기를 찢어발기는 폭력적인 힘은 그를 물리적으로 다져놓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아니, 애초에 얘는 왜 흑화한 거야?’
내가 네 소꿉친구랑 손을 잡기를 했어? 단둘이서 식사라도 했어?
‘그냥 통성명하고 이야기를 나눈 게 다인데, 왜 내가 네 소꿉친구를 빼앗은 것처럼 반응해?’
방금 전에 자신이 헬렌의 허리를 잡은 것도, 이 자식이 갑자기 칼을 들고 달려드니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잡은 것이었다.
‘도대체 얘는 어느 부분에서 발작을 일으키는 거지?’
내가 이놈을 흑화 안 시키려고 얼마나 조심히 살았는데.
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인공이 자신에게 발작할 만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젠장, 이런 사이코패스 같은 게 주인공이라니, 이딴 녀석이 주인공인 소설이 어디 있어!’
주인공이라면 모름지기 타인을 위해 희생하고 세계를 위해 봉사할 정신 정도는 기본 소양으로 갖춰야···.
···생각해 보니 이 소설, 주인공이 인간을 학살하는 엔딩이었지?
‘원래 이런 소설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속으로 한바탕 푸념을 쏟아낸 그는 다시 침착하게 이 사태의 원인을 짚어보기 시작했다.
‘시작은 악몽이다. 주인공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면서부터 상태가 이상해지기 시작했어.’
아직도 악몽만으로 사람이 이렇게 변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지만, 눈이 돌아간 주인공의 모습을 보니 그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확실했다.
‘···애초에 왜 주인공은 악몽을 꿨던 거지?’
도대체 무슨 내용의 악몽을 꾸길래, 사람이 이렇게 된 거야?
파리스는 자신의 얼굴을 향해 매섭게 휘둘러지는 칼날을 피하며, 우선 상대로부터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
스치듯이 칼날을 피하려는 순간, 상대방의 칼끝에서 붉은색의 칼날이 튀어나왔다.
‘···적색마력?’
다급하게 고개를 젖히자, 채찍처럼 늘어진 적색의 칼날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어째서?’
어째서 주인공이 흉물의 힘을 구사하는 거지?
정말로 흉물병이라도 걸렸나? 그래서 악몽을 꾼 거야?
아니, 여긴 청색탑의 보호 구역 안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해?
어째서 저처럼 농도 짙은 마력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뒤섞이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조금,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그는 주인공을 밀어내기 위해 큰 궤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주인공은 자신의 팔이 잘려도 상관없다는 듯이 몸을 들이밀었다.
“젠장!”
급하게 검을 거두며, 주인공의 검을 맞받아친다.
거친 쇳소리가 울리며 붉은빛과 푸른빛이 서로 얽혀 들어갔다.
그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주인공을 힘으로 밀어냈지만, 주인공은 마치 선불 맞은 황소처럼 저돌적으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득
지칠 줄도 모르고 끈덕지게 들러붙는 주인공을 보며 혈압이 급격히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니가 이것도 견디나 보자.’
그는 찔러오는 상대의 팔을 겨드랑이로 붙잡은 후에 그대로 박치기를 먹였다.
머리를 뒤흔드는 충격으로 시야가 흔들렸지만,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주인공이 휘청거리면서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모였다.
‘징그러운 자식.’
“저리 꺼져···!”
그는 휘청이는 주인공의 배에 발차기를 먹이며 뒤로 밀어냈다.
“후우.”
‘저건 분명 흉물의 힘이다.’
주인공의 신체와 검을 타고 흐르는 적색의 기류.
그것은 주인공을 보호하듯이 두터운 진홍빛 갑옷을 짜 올리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저걸 각성한 거야?’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했으나, 저것들은 결코 환각이 아니었다.
청색마력과 맞부딪치고도 맹렬하게 타오르는 저것이 허깨비일 리가 없으니까.
‘심상을 꺼내야 하나?’
그러면 봐주면서 상대할 수가 없는데.
답답한 마음으로 눈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주인공을 쳐다보았다.
‘···이 인간에게는 쉬운 길이 없구만.’
그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계속 신경 쓰이고.’
그의 뒤에서는 헬렌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어떻게든 제압을···.”
다리에 마력을 집중하며, 주인공을 향해 돌진하려던 찰나.
“큭!”
머리에 묵직한 압박감이 가해지며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졌다.
-주인공 죽이기 : +5pt
‘···꺼져.’
그는 손을 휘저으며 눈앞에 뜬 메시지창을 치우려 했다.
-주인공 죽이기
당신의 손으로 주인공을 죽이세요
당신의 손으로 주인공을 죽이세요
당신의 손으로 주인공을 죽이세요
당신의 손으로 주인공을 죽이세요
당신의 손으로 주인공을 죽이세요
···
그러나 그의 눈앞을 가득 채울 듯이 끝없이 생성되는 광기 어린 메시지는 그의 하찮은 반항을 가차 없이 분쇄해 버렸다.
‘젠장.’
···그것은, 납치범은 주인공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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