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사명

파리스가 잠시 주춤한 틈을 노려 주인공이 날카로운 찌르기를 날렸다.
으득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억지로 비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하는 칼날.
그러나 그 간격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칼날을 감싼 붉은 예기가 길게 늘어났다.
촥!
검이 스쳐 간 왼팔에서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상처를 따라 피가 길게 튀어 오른다.
“메네르! 그만둬!”
헬렌이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치며 주인공을 말렸으나, 오히려 그것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주인공이 한층 더 강한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날뛰기 시작했으니까.
“헬렌, 녀석을 자극하지 마!”
파리스는 급하게 소리치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붉은색의 칼날을 받아냈다.
츠즈즈즈
서로 다른 색깔의 마력들이 맞물리며 나는 기묘한 소리.
‘묵직하다.’
붉은색을 잔뜩 머금은 칼날은 마치 거인이 휘두르는 것과 같은 묵직한 충격력으로 그를 짓누르려 했다.
‘힘만큼은 상당하군.’
다만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탓인지, 그 속에서 섬세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마력을 전신으로 퍼트리며, 붉은색의 칼날을 흘려냈다.
‘···그리고 저 붉은색의 힘.’
주인공을 휘감은 붉은 기운들이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송곳처럼 날카로운 찌르기를 날려 왔다.
그는 주인공의 검을 튕겨내며, 청색마력을 담은 손으로 찔러오는 붉은색의 기운을 부숴버렸다.
물론 그냥 흘려내거나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뒤에 헬렌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저번처럼 쉽게 제압하기는 어려워.’
지켜야 할 사람도 있고.
짧은 사이에 튕겨 나간 검을 수습한 주인공은 다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직 힘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검을 감싼 적색의 칼날이 선명한 형상을 이루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힘은 살짝만 밀어줘도···.’
그 힘을 주체 못하고 처박히기 마련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는 찔러오는 검을 내리쳐 그대로 땅으로 처박아 버렸다.
그 순간 기세를 이기지 못한 주인공의 신체가 앞으로 돌출되었고, 그는 돌출된 주인공의 얼굴을 어깨로 들이박아서 날려버렸다.
주인공은 어느 허름한 건물의 벽에 처박히며, 무너져 내리는 벽돌 더미에 파묻혔다.
하지만 파리스는 표정을 굳힌 채로 주인공이 파묻힌 벽돌 더미를 바라보았다.
‘데미지는 들어갔지만, 이 정도의 공격에 쓰러질 리가 없어.’
소설에서도 적색마력의 사용자가 단순한 타격으로 무력화된다는 묘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터져 나온 붉은 기운들과 함께 벽돌들이 폭발하듯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자욱한 먼지와 박살난 벽돌의 잔해.
그 속에서 전신에 붉은 기운을 두른 주인공이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역시.’
파리스는 녀석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에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꺼내야 한다.’
날이 새도록 녀석과 뒹굴 생각이 없었으니.
그는 자신의 내면에 각인된 심상을 불러일으켰다.
떨어지는 물방울과 함께 파문이 퍼져나가고.
칼날을 감싼 안개는 이내 물방울이 되어 맺혔다,
물방울은 이내 잔잔한 시내가 되었고,
시내는 거센 강물이 되어 칼날을 휘감았다.
그는 칼날의 궤적을 따라 몰아치는 물결을 휘둘러 너울을 일으켰다.
들이닥치는 너울에 붉은색의 기운은 그 빛을 잃었고, 주인공의 칼날은 그 속도를 잃었다.
“으아아아아!”
그러나 주인공은 자신을 향해 들이치는 물결에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공은 더욱 강렬한 기세로 붉은 기운을 검에 집중했다.
‘완전히 미쳐버렸나?’
폭증하는 붉은빛이 검에 집중됨에 따라 무방비로 노출된 녀석의 몸이 푸른빛의 마력에 의해 난자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녀석은 자기 몸이 깎여나가고 있음에도 그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녀석의 눈은 오로지 그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고, 녀석의 몸은 그를 향해 발을 떼고 있었다.
오직 파리스, 그를 죽이기 위해서.
으득
메네르는 이를 악물었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 ‘그’가 있었으니까.
자신으로부터 헬렌을 강탈한 악인이자, 시공간을 초월한 악몽을 선사한 근원.
세계가 반복되어도 결코 변하지 않을 악惡.
메네르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운명이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순간을 안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이 기회를 준 자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맹세한다.
반드시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살점이 깎여나가고, 귀가 잘려 나가며, 눈알이 터져나갔다.
전신이 엉망이 되어감에도 메네르는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잃어가는 건 그에겐 너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메네르, 안 돼!”
파리스는 등 뒤에서 들리는 절규와 같은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진짜 쉬운 게 하나도 없군.’
주인공을 베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주인공을 베어낸다면, 녀석이 재기불능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아무리 주인공이더라도, 팔과 다리가 잘리고도 멀쩡히 살아갈 수는 없을 테니.
그리고 주인공이 그렇게 스러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한 사람의 인생을 자신의 손으로 끝장낸다는 죄책감은 둘째치더라도, 납치범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듯한 이 상황이 굉장히 꺼림직했으니까.
부족한 시간과 폭주하는 주인공,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뒤에 자리한 흑막.
과연 흑막의 의도대로 행동하는 것이 맞는지, 그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확신할 수 없는 일에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을 믿자.’
자신은 이미 선택을 했다.
연합보다 주인공을 챙기기로.
그렇다고 아예 연합에 신경을 안 쓴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스승과 밤나비가 북부 생도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수도에 와 있었으니까.
스승이라면 자신이 없어도 밤나비의 전력과 함께 어떻게든 해줄 것이었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렇게 믿어야 해.’
그리고 사명의 페널티는···.
‘···어디 죽여보라고 해.’
자신이 죽으면 지가 손해지 내가 손핸가?
자신은 그자의 필요에 의해 납치된 것이지, 원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렵지 않아.’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붉은 칼날을 바라보았다.
이성적인 꺼림직함과는 달리,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공포는 없었다.
‘이것도 특성 탓이겠지.’
그는 검의 손잡이를 으스러트릴 듯이 강하게 움켜쥐었다.
도도하게 흐르는 물결을 거두어들이자, 적색의 칼날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이닥쳤다.
파리스는 칼날에 최소한의 물결을 코팅하듯이 두른 채로 상대의 난잡한 검격을 받아냈다.
‘녀석이 제정신이 아니라서 다행이군.’
주인공이 다루는 힘은 거대했으나,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엉망이었다.
아니, 다루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에 휘둘리고 있었다.
‘날뛰는 짐승은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이 아니야.’
그랬다간 짐승이 크게 다칠 우려가 있었으니.
상대가 광분하여 날뛰는 것을 흘려내면서 힘이 빠지도록 유도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날뛰는 황소를 다루는 투우사처럼.
그는 일부러 허점을 보여줘 상대를 자극하고, 무기의 긴 리치를 이용해 상대를 베어냈다.
주인공은 곧바로 상처를 재생하려 했으나, 푸른빛의 마력이 상처에 남아 회복을 방해했다.
달려드는 붉은 짐승과 베어내는 푸른 칼날
푸른 칼날이 짐승의 몸을 찢고, 짐승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흐른다.
“크아아아!”
피투성이가 된 주인공은 포효를 내지르며, 눈앞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상대에게 난폭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정련되지 못한 검격은 흐르는 물결 위를 방황했고, 사나운 붉은 기운은 잔잔한 푸른 궤적에 잠겨 침묵했다.
마음대로 이어지지 않는 공격과 벌어지는 상처들.
약이 오른 주인공이 사납게 울부짖자 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불어나며 단번에 상처를 재생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파리스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영원히 회복할 수는 없어.’
무한해 보이는 저 붉은 힘에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폭발하듯이 터져 나오다가 급격하게 사그라드는 것이 저 마력의 특징이었으니까.
주인공처럼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어 힘의 조절이 미숙한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리고 굳이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여전히 사나운 주인공의 기세와 다르게 재생 속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느려지고 있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주인공을 수월하게 제압할···.’
“큭.”
그 순간 머리로부터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이 익숙한 통증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페널티였다.
말을 듣지 않는 건방진 개를 향한.
‘분명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는데?’
그러나 머리에서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고통을 착각으로 여기는 것은 무리였다.
‘이제 머릿속의 생각마저 통제한다는 건가?’
“···X발.”
문득 짜증이 솟구쳤다.
맥락도 없이 자신에게 지랄하는 주인공도,
도망가지도 않고 하염없이 주인공만을 바라보는 헬렌도,
긴고아라는 목줄을 채워 자신을 쥐고 흔들려는 납치범도,
···이 순간에도 망설이고 있는 자신에게도.
그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주인공은 하이에나처럼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좀, ···꺼져!”
주인공의 검을 튕겨낸 그가 다시 한번 발차기를 먹이며 상대를 밀어냈지만, 주인공은 튕겨진 검조차 놓아버린 채로 이빨로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다.
“아.”
일그러진 얼굴, 붉게 물든 흰자, 성급하게 들이대는 송곳니.
한 마리의 악귀가 되어 들이대는 주인공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있던 선 하나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이 자식을 배려해야 하지?’
어차피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짐승 새끼일 뿐인데?
그는 이빨을 들이미는 녀석의 면상에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녀석은 얼굴이 돌아간 채로 그대로 날아갔으나, 지치지도 않고 다시 일어서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피에 절은 듯한 붉은 머리
피로 가득 찬 듯한 붉은 흰자
피처럼 넘실거리는 붉은 마력
피에 물든 붉은 이빨과 손톱
붉고, 붉으며, 또 붉고, 붉은, 온통 붉은빛으로 덧칠된 주인공.
지긋지긋했다.
이 모든 게.
파리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인공을 노려보며, 칼날을 곧게 세웠다.
‘이제는···.’
재기불능이 되든 말든.
“···원망하지 마라.”
파리스는 그대로 녀석이 뻗어오는 손톱을 피하며 왼손을 잘라버렸고, 그대로 자세를 낮추어 녀석의 아킬레스건을 그어버렸다.
녀석은 어떻게든 재생하여 다시 일어났지만, 이어서 날아온 무수한 참격에 수없이 베이며 피 분수를 뿜어냈다.
파리스는 끊임없이 녀석의 힘줄과 근육들을 베어냈다.
더 이상 재생할 수 없도록, 다시는 몸을 일으킬 수 없도록.
녀석의 몸에서는 믿을 수 없는 양의 피가 뿜어졌지만, 그럼에도 끝도 없이 베어냈다.
적색마력을 품은 이들이 이 정도로는 쓰러지지 않음을 알았기에.
그렇기에
‘그저 베어낸다.’
더 이상 쥐어짜 낼 피가 없을 때까지.
그래야만 저 붉은 것이 더 이상 늘어나지 못할 테니까.
폭주한 적색마력이 충분히 빠지고 나면, 내면에 억눌려 있던 청색마력이 자연스럽게 적색마력을 억제할지도 몰랐다.
‘물론 그것조차 내 희망 사항일 뿐이지만.’
그렇게 수없이 베이던 녀석이 더 이상 붉은 기운을 내뿜지 않게 됐을 즈음.
털썩
녀석은 자신의 피로 만들어진 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끝났나?”
찾아온 고요 속에서 그는 지끈거리는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여전히 정신을 압박하는 힘이 느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다.
“후우.”
그는 새어 나오는 깊은 한숨과 함께 쓰러진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주인공은 폭주했어.’
소설처럼.
그 원인을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일단 그를 숨겨야 해. 경비대에게 발각되었다간···.’
경비대뿐만이 아니었다.
흉물의 힘을 품은 자를 증오하는 이들은 많았고, 연합은 흉물과 관련된 것에 자비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문제가 남아있었다.
각성한 적색마력을 다스리는 문제가.
적색마력.
육체에 초월적인 힘을 내려주지만, 동시에 인간을 흉물로 변이시키는 원흉.
이중각성자인 주인공은 분명 흉물화에 더 강한 저항력을 갖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빠른 시일 내에 적절한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컸다.
적색마력에 내재된 흉성은 끊임없이 주인공을 흉물로 변이시키려 할 테니까.
소설처럼 우연한 도움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이상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장벽 너머의 짐승 부족에게라도 가야 하나?
파리스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하얗게 질린 헬렌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의 소꿉친구가 미쳐버린 데다가 잔혹하게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봤으니···.’
여린 심성의 그녀로서는 버티기 힘든 자극이었을 것이었다.
‘그래도 적어도 상황 설명은 해줘야겠지.’
그는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녀석이 너무 난폭···.”
“피하세요!”
그녀의 말과 동시에 뒤에서 덮쳐오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들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것을 막아냈다.
‘?!’
붉은빛의 손톱과 푸른빛의 칼날 사이에서 마력들이 거칠게 부딪쳤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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