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도시

인간이었던 것들을 베어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진짜 더럽게 많네.’
벌써 몇이나 베어냈는지 알 수 없었다.
일일이 세기엔 너무 많았으니까.
다만 그들을 베어내는 것에 별다른 감정이 없어지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파리스는 하루 종일 휘둘러댄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질척한 피와 끈적한 기름으로 뒤덮인 칼날.
만신창이가 된 검에서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절삭력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였다.
‘···조금은 아낄 걸 그랬나?’
마력을 아끼기 위해 최대한 육체의 힘과 무기의 날카로움만으로 싸워온 결과였지만, 검이 엉망이 된 모습을 보자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괜히 검을 휘둘러 털어지지 않을 것들을 털어냈다.
‘그래도 확실히 아까보다 가까워졌다.’
심장을 자극하는 기묘한 파동의 근원지가 이제는 얼추 가늠이 될 정도였다.
‘다행히 심장에 있는 것도 얌전하고.’
파동이 올 때마다 요동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
우웅!
그 순간 붉은빛의 파도가 노도처럼 들이쳤다.
“큭.”
묵직한 둔통을 느낀 파리스는 심장 어림을 움켜쥔 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들이친 붉은 파도와 함께 심장이 격렬히 요동치고, 청색마력이 요동치는 심장을 강하게 압박했다.
‘젠···장.’
터질 듯이 두근대는 심장과 그것을 둘러싼 청색마력.
그 둘 사이에 낀 파리스는 이를 악문 채로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그러나 이번엔 심장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청색마력 역시 그런 심장에 대응하여 압박의 수위를 높여갔다.
그렇게 충돌하는 힘들이 경쟁하듯이 서로의 한계를 높여가며 극에 다다른 순간.
그의 머리 위로 하얀색의 고리가 강렬하게 빛나며, 그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찍어 눌렀다.
폭력적일 정도로 압도적인 빛.
서로를 자극하며 날뛰던 힘들이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로 빛에 짓눌려 잠잠해졌다.
“···긴고아.”
납치범이 건넨 선물
자신이 다루는 힘의 근원
이 육체를 온전히 장악하게 해준 물건
그리고
‘···내게 걸린 목줄.’
이제 와서 그것에 대해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단순히 감정이 상했다고 내칠 수 없는 그런 물건이었다.
아니, 어쩌면 앞으로의 행보에서는 더더욱 그것에 의존해야 할지도 몰랐다.
파리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방에서 들리는 짐승들의 울부짖음이 더욱 사납고 격렬해졌다.
‘파동의 주기가 짧아지고 있어.’
더 강해지고 있고.
그는 이게 매우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상의 진화.’
우상이 스스로 더 강력한 우상으로 변이하는 현상.
흉물병을 더 멀리, 더 빠르게 퍼트리고, 흉물들을 더 강하고, 더 끈질긴 존재로 강화시킨다.
종국에는···.
‘도시마저 집어삼키고, 그 도시는 흉물을 토해내는 공장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우상들이 초기에 제거되지 못한다면, 갈수록 손을 쓰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그리고 우상이 최종단계에 이르면, 도시를 봉쇄하고 도시 전체를 소각해 버리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소설의 후반부에서나 나오는 내용이야.’
오랜 전쟁으로 도시들의 행정력과 군사력이 고갈되면서 벌어진 일이니까.
‘역시 너무 빨라.’
소설에 비해서도 너무 빨리, 너무 최악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가 나름대로 준비해 둔 계획들이 모두 쓸모가 없어질 정도로.
문득 주인공의 시체를 가져갔던 사내의 말이 떠올랐다.
‘이 세계가 자기 소유물인 것처럼 주무르는 자들이라···.’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조차 보이지 않는 새까만 하늘은 어둠의 베일 너머로 자신들의 빛을 감추고 있었다.
‘···일단 생각은 나중에.’
지금은 해야 할 일을 하자.
파리스는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장기전을 대비하여 마력을 아꼈지만, 이제는 한가하게 길을 돌아갈 때가 아니었다.
‘일직선으로 간다.’
그는 자신을 막는 벽을 부수고, 불길을 뛰어넘으며 파동의 근원지를 향해 질주했다.
중간에 무수한 장애물들이 있었지만, 그의 검은 문제가 되는 것들을 고깃덩이와 먼지로 되돌려 버렸다.
그렇게 막 골목에 접어든 그가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을 떼려던 그 순간.
살려주세요!
다급하게 구원을 청하는 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지금 내가 가도 저 사람의 생명을 장담할 수 없어.’
기껏 구해줬더니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아니, 거의 무조건적인 확률로 광기에 물들어버리리라.
‘더 많은 생명들을 위해서는 우상이 먼저다.’
합리적 정의와 비합리적 동정, 불특정 다수와 눈앞의 소수.
무엇을 택해야 할지는 자명했다.
“···.”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올곧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그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스승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소란은 더욱 커져간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파리스는 마침내 발을 뗐다.
‘우선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하자.’
눈앞의 사람도 구하지 못하는 자가 만인을 구하겠다고 설치는 건 지독한 모순일 테니까.
* * *
“이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람누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겔라드 경은?”
“···그분께서는 나방 날개 모양의 망토를 한 신원미상의 계명자에게 살···해당하셨습니다.”
그 침통한 목소리에 람누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떻게?”
“상대가 무척 강했습니다. 극위 기사이신 겔라드 경께서도 감당하기 벅차셨을 정도로.”
기사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로 울음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마지막은 명예로우셨는가?”
람누스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억누르며 물었다.
“예, 겔라드 경께서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아군의 후방을 지켜내셨습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람누스 님···.”
모로스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게 슬픔을 삭일 시간을 주고 싶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만 가셔야 합니다. 동이 터오고 있고, 곧 메그레츠 가의 가주가 귀환한다는 정보가 확인됐습니다.”
“···그래, 가야지.”
간신히 입을 연 람누스의 목소리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수고했네, 로어 경.”
“···죄송합니다.”
기사는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겔라드, 충성스러운 호몰로이스의 기사여.’
그 늙은 기사는 단순한 가신이 아니었다.
전대 가주를 비롯한 가문의 기사 대부분이 죽었던 전투에서도 살아남아, 영락한 가문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하던 기둥 그 자체였다.
동년배 기사들이 은퇴하는 중에도, 그 노쇠한 육신을 이끌고 묵묵히 가문을 위해 일해왔던 자였다.
그는 스승이었고, 충신이었으며, ···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호몰로이스 가에는 극위 기사 이상의 실력을 지닌 자가 전무하다.’
람누스는 슬픔 가운데에서도 가주로서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다가올 전란의 시대, 무력이 곧 가문의 생존과 직결되는 세상이 열릴 것이었다.
‘힘이 필요해.’
가문을 지켜낼 힘이.
그의 머릿속에 알카이드의 직계를 상대로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던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낱 사생아 따위가 연합에서 가장 고귀한 핏줄을 희롱하고, 패배시키는 모습은 그에게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조차 압도할 그 고귀한 핏줄을 무릎 꿇린 그 힘이 너무나 탐이 났다.
람누스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부족해.’
자신의 재능도, 자신에게 남은 시간도 너무나 부족했다.
‘···역시 계획에 참가하는 수밖에 없겠어.’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순간 한 여인의 얼굴이 스쳐 갔지만, 이미 세워진 결심은 이내 그 모습마저 덮어버렸다.
누군가가 그의 앞으로 말을 끌고 왔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말에 올랐다.
“···가자.”
‘명예로운 기사여, 부디 그 고단한 의무에서 해방되었길 바라오.’
당신께선 이미 모든 의무를 다하셨으니.
이만 편히 쉬시길.
···아버지.
그의 뒤를 따라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수백의 인마人馬가 빠르게 수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 * *
“제기랄···.”
로버트는 기사가 된 후로 오늘만큼 무력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어딘가에서 시작된 불은 벌써 네 개의 구역을 완전히 집어삼켰고, 다른 구역들로 끝없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인간들은 불을 막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으나, 불은 도리어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마저 삼키며 커져갈 뿐이었다.
이토록 거대한 화마 앞에서 한낱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기사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불을 진화하려고 해봤으나, 경비대원들과 시민들 속에 숨어있는 암살자로 인해 오히려 목숨을 잃을 뻔했다.
어떻게든 암살자를 막아내고 다시 사람들을 모아 진화 작업을 이어가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기이한 파동이 그들을 휩쓸고 가더니 다수의 시민들이 역병과 함께 미쳐버렸다.
커져가는 불길, 미쳐가는 시민들,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 날뛰는 흉물.
그 모든 것들이 동시에 일어났으며, 그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못하고 악화되기만 했다.
‘이제는 남은 사람들도 없다.’
기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화마와 정체불명의 파동을 피해서 도망갔다.
혼자 남은 기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모든 것을 내려놓자 오히려 차분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놀랍도록 무덤덤한 감정으로 이 종말을 받아들였다.
‘그래, 종말이 왔는데 수도에서 갑자기 흉물병이 창궐한다거나, 흉물이 나타날 수도 있지.’
원래 종말에는 세상 모든 불합리가 일어나지 않았던가.
먼 옛날, 이 세상에 거대한 종말이 닥쳐와 사람들이 반도로 내몰렸을 때처럼.
‘아니, 이미 망해야 했던 세상을 그동안 억지로 붙들어왔는지도 모르지.’
이제야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불경한 생각과 함께 로버트는 멍하니 퍼져나가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저 거대한 불길은 도시의 모든 구획을 집어삼키고 나서야 끝이 나리라.
그렇게 넋을 놓고 타오르는 도시를 바라보던 그의 눈에 불길이 기이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응?”
‘갑자기 왜 불꽃이 땅으로?’
불꽃이 하늘로 솟는 것이 아니라, 땅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흡수되듯이.
그런 기이한 현상은 점점 속도를 붙여가더니, 이내 불길들은 마치 빨려 들어가듯이 어떤 한 지점으로 수렴되어 갔다.
“?!”
수렴의 끝에는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하나의 손이 있었다.
이 일대를 살라 먹던 광대한 불길들은 한 사내의 손 위에서 압축되어 거대한 공으로 변해있었다.
마치 태양을 지상에 강림시킨 것처럼 이글거리며 주변을 밝히는 거대한 공.
‘메그레츠 가!’
로버트는 그 모습을 본 순간 깨달았다.
수도를 떠났던 칠공가문의 가주들이 돌아왔다는 것을.
“아아, 그분들께서 돌아오셨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것은 종말의 끝을 고하는 구원의 강림이었다.
자욱했던 검은 연기가 바람에 실려 흩어지고, 밤의 어둠 너머로 찬란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 * *
쯧
“이래서 전통이고 나발이고 고위 신관 전원이 수도를 비우면 안 된다고 한 건데···.”
막시밀리안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는 자신의 손 위에 놓인 화염의 공을 흡수하며, 탐욕스러운 불길로 인해 검게 타버린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미 검게 탄화해 버린 집들과 시체들은 그의 속을 더 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페크다는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그 잘난 전통에만 매몰되어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들.
가장 거대한 세력을 가진 자들이 그토록 답답한 행보를 보이니, 어찌 연합이 발전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내 손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아진 공을 꽉 움켜쥐며 흡수해 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직도 화염에 삼켜진 수많은 거리가 보였다.
“수도가 타오르는 모습이 지평선 너머로도 보였거늘, 아직도 미적거리고 있는 건가?”
게으른 놈들.
하여간 배때기에 기름만 차서는 좀처럼 제대로 된 놈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복귀하자마자 바쁘겠군,”
그는 다시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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