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이 오기 전에

비.
비가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벌써 몇 시간째 저러고 있는 건지.’
묘지기는 한 묘비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이 묘지를 관리한 지 수십 년이 지났건만, 저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학교에 딸린 이 작은 공동묘지에 사람이 묻히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따로 가묘가 있었고, 생도와 교직원들 대부분이 귀족이었으니까.
그래서 이곳은 주로 집안 대대로 학교에 고용되는 평민들이나, 학교가 기르는 가축들 중 특별하게 허가된 일부가 매장되는 곳이었다.
‘귀족이 이곳에 묻히는 건 정말 드문 일인데 말이지.’
평민이나 가축과 함께 묻히고 싶은 귀족이 어디 있겠는가?
무슨 복잡한 사연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단단히 기구한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연 없는 무덤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결국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축이든,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 아니겠나.
묘지기는 그저 저 남자가 문 닫기 전에는 곱게 나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무래도 귀족으로 보이는 자에게 말을 붙이기는 부담스러웠으니까.
묘지기는 끌끌 혀를 차며, 묘지에서 수거한 썩은 꽃들을 들고 자리를 떴다.
그렇게 묘지기마저 떠난 묘지에서 한 남자가 작은 묘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성한 나무들로 인한 짙은 그늘, 묘비들 위로 가득 낀 이끼. 군데군데 자리 잡은 웅덩이.
‘···묫자리가 영 안 좋네.’
이 작은 공동묘지는 묘지기만이 간간이 드나드는 음습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파리스는 눈을 가리는 빗물을 닦아냈다.
다소 깨끗해진 시야에 하나의 묘비가 보였다.
그 초라한 묘비에는 한때 이 사관학교의 교수였던 이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레니스 아티나
‘미들 네임도 못 쓸 정도로 작은 묘비라.’
애초에 귀족용이 아니니 당연한가?
그 앞에는 비를 맞고 축 늘어진 두 송이의 꽃 외에는 어떤 애도도 없었다.
이 초라한 모습이 교수가 처해있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북부에서도, 중앙에서도 버림받은 기사.
북부는 교수가 중앙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그를 증오했고,
중앙은 교수가 수도에 참사를 일으킨 북부인과 같은 핏줄이라는 점 때문에 싫어했다.
‘관계가 좋은 편이었던 생도들도 위문하길 꺼려할 정도로 말이지.’
정작 교수가 수도의 시민들을 지키다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적과 나, 네 편과 내 편으로 모든 것이 나뉘는 이분법적인 상황이 그걸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그들에게 중요한 건 교수가 적들과 같은 핏줄을 가졌다는 것뿐.
‘···살아는 계신 건가.’
공식적으로 교수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었으나, 만신창이가 된 교수의 육체는 밤나비에서 수습해 갔다.
아마 그들의 본단으로 데려간 듯하지만, 그 이후의 상황은 그도 알지 못했다.
자신은 아직 그들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으니까.
‘이제 와서 살아난다고 해도 그런 몸으로 남은 생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럼에도 파리스는 그가 살기를 바랐다.
그처럼 올곧은 사람이 이처럼 허무하게 가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지 않나.
“···엉망이군.”
옅은 입김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계획대로 된 게 없었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고, 북부 생도들이 탈출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해방자가 수도를 테러하는 것에도 대처하지 못했다.
그나마 살려낸 헬렌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집으로 귀향해 버렸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총체적인 실패.
자신은 실패했다.
묵직하게 젖은 옷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계속 손을 대는 게 맞을까?’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이 세계에 더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까?
안일했던 자신과 허술했던 계획.
핑계를 대기엔 너무나도 큰 실패였고,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이제는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아니 손을 대는 것이 옳은지조차 자신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얹혀진 것들이 너무나 무거웠고, 자신에게 다가올 일들이 너무나 겁이 났다.
그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멍하니 스승의 묘비를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뭐라고 하셨을까?’
기사답게 행동해라? 인간을 지켜라? 최악을 대비해라?
머릿속을 떠돌던 여러 생각들은 이내 하나의 목소리로 수렴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하셨겠지.”
지나간 과거, 모호한 대의보다는 지금 살아 숨 쉬는 이들에 집중하셨던 분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작금의 상황은 파국적이었다.
북부는 오래전부터 중앙에 칼을 갈아왔고, 수도에 테러를 당한 중앙은 북부에 대해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 했다.
‘아직 나이브한 생각을 가진 이들도 많겠지만···.’
이미 전쟁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내전을 막을 수 없게 된 것이 확실해진 이상, 연합의 손실을 최소화해야만 했다.
‘계획을 바꾼다.’
기존에 계획했던 소극적인 개입만으로는 부족했다.
미래에 닥쳐올 재앙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일된 연합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해.’
최악은 막아야 했다.
자신의 손에 인간의 피를 묻히더라도.
‘지금 연합은 크게 세 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어.’
실전을 바탕으로 훈련된 정예병과 준수한 기사 전력을 가진 북부
연합에서 가장 큰 경제력과 인구를 갖추었으며, 가장 많은 계명자를 보유한 중앙
남부 산맥의 자원을 바탕으로 강력한 산업적 기반을 갖추었으며, 비밀스러운 연구를 통해 전력을 갖추는 중인 남부
‘어차피 내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
북부에 가봤자 별다른 기반도 없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양아치의 과거도 찜찜하고.’
남부는 애초에 적대세력인 해방자들과 손을 잡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중앙이다.’
풍부한 물산과 강대한 힘을 갖춘 세력.
그 어느 세력보다 연합의 통합에 가장 근접한 세력이기도 했다.
다만 중앙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지나치게 분열되어 있어.’
현재 중앙의 정치는 이권을 다투는 도시와 귀족 가문들로 인해 극히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 다툼은 단순히 외부의 적이 생겨났다고 해서 통합될 수준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것을 통합해야 할 칠공가문들이 선봉에서 그 갈등을 이끌고 있었으니까.
소설에서도 중앙은 끝까지 통합된 지도부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그 결과 수도가 허무하게 함락당하게 된다.
‘서로 눈치만 보다가 수도를 내주다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으나, 이는 연합이 가진 정치적 한계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연합’이란 말 그대로 도시들의 수평적 결합이란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었으니.
연합이 도시와 귀족 가문들 간의 아슬아슬한 정치적 타협 속에서 유지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지금의 상태가 연합이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는 최적의 형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장기고 나발이고, 어느 정도의 강제적인 봉합은 필요해.’
코앞에 닥쳐온 위기 속에서 장기적인 존속을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그런 그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다.
연합파와 연방파
중앙집권적인 정부를 만들려는 알카이드와 도시의 자치를 강조하는 페크다
‘두 진영 모두 일리가 있지만, 비상시에는 그에 걸맞은 수단이 필요한 법.’
결국 작금의 연합에게 중요한 것은 더 강력한 통제일 테니까.
‘그래, 결국 연합은 더 강하게 뭉쳐야 해.’
억지로라도.
* * *
‘짜증나···.’
최근 들어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랫것들은 은연중에 자신을 무시하고, 직계 회의에서는 소외당했다.
특히 최근 사태에서 아랫것들이 자신이 아닌 다른 직계에게 몰려간 일은 정말 최악의 굴욕이었다.
특히 그 건방진 것이 비웃는 얼굴이란···.
‘감히···.’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슴으로부터 뭉근한 열기가 치고 올라와 머리를 뜨겁게 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혔다.
‘괜찮아. 나중에 다 갚아주면 돼.’
내가 극위의 힘만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되면···.
“하아···.”
하지만 새어 나오는 한숨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가문의 전통적인 행사에서 소외당한 것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으니까.
“괜찮으세요?”
그녀를 바라보는 리나의 표정에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
‘···내가 몹쓸 짓을 했네.’
윗사람이 불안해하면, 아랫사람은 더욱 불안해하는 법인데.
“괜찮아. 그냥 생각할 게 있었어.”
그녀는 가문에서 배웠던 내용을 속으로 되뇌며, 리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피곤하시면 오늘은 이만 들어가시겠어요?”
“아냐, 오늘은 마르를 만나기로 했거든.”
그리고 이대로 교실을 떠나면···.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교실은 크게 두 무리로 나누어져 있었다.
자기들끼리 흩어져서 떠들어대는 대다수의 생도들과 구석에 고립된 채로 침울하게 앉아 있는 자신과 추종자들.
자신마저 떠난다면 추종자들은 더욱 움츠러들 것이 뻔했다.
‘원래 한가운데가 내 자리였는데···.’
결투 이후로 모든 게 변했다.
명예로운 패배조차 자질의 부족을 의심받기 마련인데, 한낱 사생아에게 패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아무리 가문에서 그것을 숨기려고 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진실이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애써 숨기는 것 보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 아니겠느냐.’
‘로베르가 졌다더라.’
‘로베르는 물론이고, 그걸 수습하려던 그 직계도 졌다더라.’
‘아니, 다 달려들었는데도 졌다더라.’
소문에 소문이 더해갈수록 그녀의 권위는 하락했고, 추종자들은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그녀와 추종자들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뻔뻔하게 거짓말을 할 수도 있지만···.’
진실을 영원히 묻어버릴 힘이 없는 이상,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것이 불러올 역풍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니, 결국 내가 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야.’
내가 이겼더라면.
좀 더 빨리 극위를 각성했더라면.
애초에 로베르가 쓸데없이 용사 놀이를 하지 않았더라면.
···그 발정난 X자식이 그토록 강하지만 않았더라면.
‘모든 게 다 그놈 때문이야.’
왜 사생아 주제에 그렇게 강하고 난리야.
자신처럼 별께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니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며, 금욕적으로 수련만 하는 것도 아니면서.
도무지 강해질 개연성이 없잖은가.
흉물의 힘을 사용한 듯한 수상한 정황이 있었지만, 결국 그것조차도 패배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었다.
어떤 종류의 패배든 그것은 권위의 하락을 가져올 뿐이었으니까.
‘도대체 왜!’
꽉 깨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고, 리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모든 게 저놈 때문이야.’
저 축축하고 음습한 자식.
강물에 빠진 것처럼 홀딱 젖어서는.
그냥 빠져서 죽어버리지.
왜 또 키는 쓸데없이 크고.
얼굴은 왜 저렇게 수척한데?
눈빛은 또 왜 저렇게 애···.
‘···응?’
자신의 앞까지 걸어온 사내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침묵에 잠긴 교실.
물을 뚝뚝 흘린 채로 침묵 속을 가로질러온 사내는 그녀의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네, 네놈이 여길 무슨 염치로···!”
리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치고, 추종자들이 그녀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사내는 주변의 번잡함은 무시한 채로 오직 그녀만을 응시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피를 머금은 듯한 새빨간 눈동자가 결투에서의 끔찍했던 기억을 억지로 불러냈다.
“네놈이 왜···?”
“···.”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리나가 칼자루에 손을 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왔냐고 묻지 않···!”
털썩
“?!”
“샤를로테 님을 뵙습니다.”
그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기함하며 그녀와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그녀 역시 멍한 표정으로 사내의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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