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개

“왜 나지?”
“당신께 자비를 받았기에···.”
“헛소리!”
‘···예민하군.’
파리스는 그녀의 고운 아미가 잔뜩 찡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까지 싫어할 일인가?’
아니면 자신이 그토록 싫은 건가?
조사를 통해 알아봤던 그녀의 냉철하고 이성적인 성격과는 전혀 다른 모습.
명백히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일에 이런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확실히 결투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녀가 자신을 이토록 싫어할 이유는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으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하나.
“염치없음을 압니다. 하지만 당장 제가 기댈 곳이 당신의 자비밖에 없습니다.”
그저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
“···샤를로테 님.”
그녀의 옆에 있던 여자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잠시 그를 노려보던 샤를로테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아직도 네 진심을 믿을 수가 없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니, 넌 모른다.”
그녀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평생을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온 자가 타인을 이해한다고?”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애초에 네가 그렇게 될 일도 없었겠지.
그는 하늘빛 눈동자가 품은 단호한 빛을 바라보았다.
‘피곤하군.’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상대의 거부감이 컸다.
“···어떻게 하면 저를 믿으시겠습니까?”
“증명해라.”
그녀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샤를로테 님!”
옆에 있던 여자가 경악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리나, 조용.”
그녀는 손짓으로 자신의 시녀를 침묵시켰다.
‘성약수星藥水?’
그녀가 들고 있는 손가락 크기의 병에는 짙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늑대와 개의 서약을 아나?”
“···충성에 대한 언약이자 맹세라고 알고 있습니다.”
“네가 정말 내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맹세가 없겠지.”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굴욕을 주려는 생각인가?’
많고 많은 충성 맹세 중에 ‘늑대와 개의 서약’이라니···.
그녀의 대응은 확실히 감정적이었다.
‘게다가 저건 성약수야.’
신관이 저걸 내린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깊은 신뢰를 받고 있거나, 깊은 미움을 받고 있거나.
‘정말 어지간히 미움을 받고 있는 모양이야.’
그는 입가에 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할 건가?”
“···하겠습니다.”
결국 거절할 수 없는 자신을 알기에.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고 마셔야지.’
그녀는 목을 가다듬더니, 곧 그녀의 두 눈 가득 그를 담아냈다.
“밤하늘 아래, 저 능선 너머로.”
“···주인을 향해 달려오는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주인은 알 수 없다.”
“그 그림자가”
“자신을 해치려는 늑대인지,”
“자신이 키우는 개인지.”
“그림자여, 그대는 늑대인가?”
“저는 늑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개인가?”
샤를로테의 손에 들린 병이 밝게 빛을 발했다.
‘선택은 되돌릴 수 없어.’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는 당신의 개입니다.”
그는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고함을 품은 하늘빛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렇다면 개여, 그대는 마땅히 이 목줄을 맬지니.”
그녀가 밝게 빛을 내는 병을 그에게 내밀었다.
“미천한 개가 주인의 은혜를 받드옵니다.”
그는 병에 든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의 몸속으로 들어간 액체는 곧장 그의 머리를 향해 흘러 들어갔다.
“그것은 은혜이자, 속박이니.”
그녀의 눈에서 흘러나온 푸른빛이 그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곧 액체와 만난 그녀의 마력은 그의 마력기관에 알 수 없는 문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대의 마력은 마땅히 주인의 은혜를 입으며,”
그는 마력의 입자 하나하나가 더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별의 마력인가?’
별빛에서 흘러나온 부스러기가 아닌, 진짜배기 별빛.
그의 마력은 그것에 한없이 가까운 힘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대에게는 순종과 순명의 의무가 있기에,”
그 순간 그녀의 마력이 강대한 힘으로 그의 마력기관을 짓눌렀다.
‘큭!’
강렬한 두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견뎌냈다.
“그대, 내 번견이여.”
“···주인의 부름을 받습니다.”
“그대의 주인에게 서약을.”
그는 그녀가 침을 삼키는 것을 보았다.
‘이마와 손 중에서 고르라는 거군.’
자신의 이마에 그녀의 키스를 받을 것인가, 그녀의 손에 자신이 키스할 것인가.
‘뭐, 답은 이미 정해져 있나.’
저토록 자신을 싫어하는데, 어찌 그녀에게 이마 키스를 받겠는가.
“부디 그 고귀한 손을.”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가는 손.
‘작군.’
정확히는 그의 손과 비교해서 작은 것이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몸서리치는 듯한 떨림이 느껴졌다.
“저는 당신의 번견이자, 목양견, 사냥개일지니.”
그는 그녀의 입가가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부디 저의 충성을 받아주소서.”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툭.
“읏?!”
손등과 이마가 맞닿았다.
“어느 한쪽이 맹세를 거둘 때까지.”
“···어느 한쪽이 맹세를 거둘 때까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감히 제게 영원의 충성을 노래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으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충성을 잘 받았노라.”
그녀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대를 나의 기사로 임명한다.”
양어깨에 한 번, 머리 위로 한 번.
“충성에는 믿음을, 봉사에는 보상을.”
길었던 충성 서약과는 반대로 간략하기 그지없는 기사 서임.
“충심으로 주군을 모시겠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검을 바치며 고개를 숙였다.
“리나.”
그녀의 부름에 리나라고 불린 여자가 뒤편에서 무언가를 가져왔다.
“너의 주군으로서 주는 첫 번째 하사품이다.”
펄럭
그것은 화려한 은빛 자수가 수놓인 검은색의 코트였다.
‘기사용 방호코트.’
그는 그것을 받아든 후, 조심스럽게 걸쳐보았다.
마치 준비된 듯이 딱 맞는 사이즈.
‘이미 받아들일 생각이었잖아.’
자신의 덩치를 생각했을 때, 이건 미리 준비해 놓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본가의 공방에서 제작한 최고급품이다.”
나의 기사가 싸구려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없으니.
“나중에 검과 갑옷 역시 새롭게 맞춰주마.”
그녀가 사뭇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군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역시 노예를 하더라도 대감님 댁 노예를 해야 하는군.’
기사가 되자마자,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파리스.”
“예, 주군.”
“나는 내 기사가 꼴사나운 문신을 하고 다니는 꼴을 두고 볼 수가 없다.”
“깔끔하게 지우겠습니다.”
“약 또한 다시는 입에 대서는 안 된다.”
“제가 숨을 쉬는 한, 다시는 그것에 입을 대지 않겠습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찌 감히 주군의 명을 어기겠습니까.’
주군의 넓은 아량만큼 그의 충심 역시 빠르게 솟구치고 있었다.
“그리고 네게 성이 없으니, 성을 내려야 할 텐데···.”
그녀가 작게 침음성을 내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두드렸다.
“생각해 두신 바가 있으십니까?”
“···하임달, 아니 힘다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고대어로 경계에 선 자, 문지기라는 뜻이다.”
* * *
‘두 얼굴을 지닌 자라는 뜻이기도 하지.’
알 수 없는 본성을 지닌 그자에게 딱 맞는 성姓이었다.
‘내가 그자를 나의 기사로 들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멍한 눈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모든 것이 호화스러운 풍경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맞은편 자리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최근 정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 건방진 북부인들 말이군요.”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웃었다.
“안 그래도 조만간 의회에서 북부에 대한 응징을 논의할 겁니다.”
“···응징이 필요하긴 하죠.”
“현재 기사전부터 경제적인 제재까지, 다양한 방안들이 논의 중에 있습니다.”
기사전? 경제적인 제재?
‘생각보다 훨씬 유화적이네.’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집어 들며 생각했다.
“연합 의회는 군을 일으킬 생각은 없군요.”
“뭐, 페크다를 중심으로 그런 의견들이 나왔습니다만, 굳이 저희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필요는 없지요.”
“페크다도 급하겠네요.”
“자신들의 고집 때문에 수도를 비웠다가 이 사달이 났으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일 겁니다.”
그는 나이프를 들어 앞에 놓인 고깃덩어리를 썰기 시작했다.
“애초에 의회는 전면전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린 법이니까요.”
고기로부터 진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저럴 거면 생고기를 먹지.’
“다만, 민심을 생각해서 최소한의 행동은 취해야 한다는 공감대는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책임자만 처벌하고 끝날 것 같군요.”
“···그걸로 경고가 될까요?”
“북부 놈들이 무엇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뭐라도 얻어내려는 수작이겠지만, 그들의 생떼는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급한 건 그들이니까요.
“···.”
그녀도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북부를 완충지대로 둔 중앙의 입장에서 북부는 목줄이 걸린 개와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수도가 공격당했는데···.’
그녀는 그의 칼질에 따라 고인 핏물을 보며 잔을 내려놓았다.
대부분의 귀족 가문들이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마 핵심 귀족들이 수도를 비운 상황이었던 데다가, 그 피해가 대화재가 발생했던 외곽지역에 집중됐던 탓이 클 터였다.
그들이 진짜로 피해를 입었다면, 누구보다 눈이 뒤집어서 달려들었을 테니까.
‘이게 연합의 한계야.’
그들의 이익은 국가의 안녕과 발전에 있지 않고, 각자의 도시와 가문에 있었다.
사익이 공익에 앞서니, 국가 전체를 위한 정책이 집행될 리가 없었다.
그러니 아군에게 수도가 공격당한 초유의 상황에서도, 이처럼 태평한 자세를 취하는 것일 터.
‘역시 연합은 더 강하게 뭉쳐야 해.’
“조만간 북부로 사절단이 파견될 겁니다.”
그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형님께 들으신 얘기인가요?”
그녀의 말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형님께서 메그레츠의 후계자이시긴 하지만, 저 역시 제 개인적인 정보망이 있습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 미미한 불쾌감이 스쳐 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유독 본인의 형에 대한 이야기에 예민하게 반응하네.’
형제간에 사이가 안 좋은가?
눈앞의 남자는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표정에 균열이 일곤 했다.
“기사 서임권을 누군가에게 썼다고 하시던데.”
그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하얀 손을 바라보았다.
‘의외였어.’
분명 변태 같은 짓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마 키스를 선택하고, 자신이 접근한 순간 강제로 입술을 훔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 더러운 입술을 자신의 손등에 비비거나.
설마 자신을 배려하여 이마만 댈 줄은···.
‘정말 다른 사람인가?’
그녀는 왠지 손등이 후끈거리는 느낌에 그것을 식탁 아래로 숨겼다.
“···최근에 제 밑으로 들어온 자에게 썼어요.”
“지나친 간섭 같아서 말씀드리고 싶진 않습니다만···.”
‘그럼, 말하지 말지.’
그녀는 자신의 행사에 간섭하려고 하는 상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말씀하세요.”
둘 중에서 아쉬운 처지에 있는 건 자신이었다.
직계로서 실권을 지닌 상대와 달리, 자신은 가문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었으니까.
“신관에게 주어진 기사 서임권은 몇 장 없을 텐데, 그렇게 쓰셔도 되는지···.”
그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저게 정말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까?
그가 자신을 음해할 이유는 없으니, 걱정해서 하는 말일 테지만···.
‘뭔가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그녀는 애써 불쾌한 기색을 감추며 잔을 집어 들었다.
“새로 들어온 기사가 ‘극위’에 이른 기사거든요.”
아무리 생도라도 당연히 그 정도 대우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는 아까보다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이겼다는 그 생도 말이군요.”
순간 그녀의 아미가 일그러졌다.
“그자라면 당신을 희롱했다고 들었는데.”
이거 정혼자로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탁!
“당신의 평판에는 해가 가지 않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것보단 당신의 안전을 염려한 겁니다.”
그는 그녀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여유로운 낯빛을 유지했다.
으득
그녀는 그 능글맞은 표정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
다 알고 있었으면서 자신을 떠보다니.
분명 처음에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지만, 자신이 추락한 이후부터 무언가가 미묘하게 변했다.
‘아니, 내가 변한 건가.’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눈앞의 남자를 보는 눈이 바뀌었으니까.
‘너, 정혼자에게 죽어.’
자신을 비웃던 그 붉은 눈동자가 각인처럼 머릿속에 박혀있었다.
누구보다 신원이 확실한 눈앞의 남자가 의심될 만큼.
시종일관 부드러운 태도도, 자신을 배려하는 행동도, 조심스러운 눈빛도.
남자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내가 예민할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녀 역시 반려가 될 사람을 벌써부터 의심하는 건 좋지 않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그 붉은 눈동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대론 안 돼.’
서로 반려가 될 사이에 이런 찜찜한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확실히 하자.’
그딴 헛소리를 믿어서가 아니라, 둘의 미래를 위해서.
가장 좋은 건 그 말을 했던 사내를 추궁하는 것이었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지금의 그에게서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다시 마르와 약속을 잡아야 하나?’
아무래도 조만간 다시 한번 친구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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