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용군 소집

“주군, 괜찮으십니까?”
파리스는 창백한 낯빛을 한 샤를로테를 보며 물었다.
“···괜찮아.”
초점을 잃고 몽롱해진 눈동자와 힘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녀도 이젠 한계로군.’
그는 그녀가 거의 한계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쉴 새 없이 말을 달렸다.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말들을 쉬게 할 때를 제외하고는 멈춘 적이 없었다.
‘이미 많이 늦었다. 자칫하면 북부가 먼저 요새에 닿겠어.’
사람들을 소집하고 부대를 편성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에 본래의 계획보다 빠르게 이동할 필요가 생겼고, 그 결과 그들은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가 기사로 이루어진 부대원들에게도 이런 강행군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파리스 그 자신은 별다른 느낌이 없었으나, 대부분의 부대원들이 극심한 피로를 호소하는 중이었다.
‘저 까불이도 맛이 갔군,’
틈만 나면 자신을 보며 으르렁대던 리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로베르의 품에 안겨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예정보다 빠르게 숙영을 준비하겠습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안도와 기쁨이 새어 나왔다.
그는 곧바로 속도를 늦추어 바로 뒤편에서 따라오는 기사의 옆으로 이동했다.
“알론소 경.”
“아, 파리스 경. 무슨 일인가?”
곧바로 힘차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하군.’
그는 머리가 회색으로 바래버린 나이에도 정정한 기력을 뽐내는 노기사를 보며 감탄했다.
“힘들진 않으십니까?”
“힘들어? 겨우 이 정도 가지고 힘들다고 징징대면 기사라고 할 수 있겠나!”
노기사의 일갈에 주변에서 말을 달리던 기사들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쯧쯧
“요즘 것들은 마력에만 의존해서 신체 단련을 게을리한단 말이지.”
정작 마력이 신체에 안 좋은 것도 망각하고 말이야.
알론소는 그런 기사들을 보며 혀를 찼다.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훌륭하구만. 아주 기본이 잘 잡혀있어.”
내게 딸이 있었다면, 자네에게 소개해 줬을 텐데.
그는 껄껄 웃는 노기사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 그래도 나이가 젊지 않습니까. 그 나이까지 정정하신 알론소 경께서 훨씬 대단하십니다.”
“기사에게 나이가 무에 중요하겠나. 전장에서 칼이 나이를 가려서 날아오던가.”
알론소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본론이 뭔가?”
“이제 슬슬 숙영을 하려 합니다.”
“흠···.”
그의 말에 노기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좀 더 이동해서 자리를 펴면 좋을 걸세. 곧 강이 나오거든.”
“강 인근에서 숙영지를 펴는 것으로 전파하겠습니다.”
그는 곧바로 말을 몰아 다른 기사에게 이동했다.
“휴이 경.”
“파리스 경, 벌써 쉬려고 하는가?”
휴이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이 이상 부대원들을 몰아치면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질 겁니다.”
“···나약하기 그지없군.”
그에게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내 휘하의 기사들만 먼저 가면 안 되겠나?”
파리스가 뒤를 돌아보자,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는 기사들이 보였다.
‘복수자들이라고 하던가?’
수도에 일어났던 참사에서 가족을 잃은 자들.
벌써 무리를 이룬 그들은 자신들을 복수자라고 칭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들 중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휴이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골치가 아프군.’
규모를 불리기 위해 되는 대로 받아들였더니, 벌써 자기들끼리 파벌을 이루는 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휴이 경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북부라는 거대한 적에게 무작정 들이박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이미 예정보다 시일이 지체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북부가 이미 목표 지점을 통과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건가?”
“그걸 만회하기 위해 무리를 하면서 달리는 중인 겁니다.”
파리스는 단호한 목소리로 상대의 반론을 받아쳤다.
“이 이상으로 속도를 높이면 비전투손실만 커질 뿐,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를 수도 없다는 건 당신도 잘 알 텐데요.”
“···어차피 늦으면 싸워볼 기회도 없을 것 아닌가.”
“저희는 늦지 않을 겁니다.”
그는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며 단언했다.
“절대로.”
그 단호한 태도에 휴이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그들은 강이 보이는 곳에서 숙영지를 차렸다.
“아구구.”
“웬 할머니 같은 소리···. 억!”
“레이디한테 할머니라니!”
매너하고는.
로베르는 정강이를 부여잡은 채 낑낑댔다.
“흥!”
‘좀 좋게 봐주려고 해도.’
낑낑거리는 로베르를 보며 코웃음을 친 리나는 가장 크고 화려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샤를로테 니ㅁ···. 어멋!”
“리, 리나. 자, 잠깐···.”
잔뜩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 샤, 샤···.”
리나는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샤를로테 님?”
왜 샤를로테 님이 저자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있는 거지?
‘샤를로테 님께는 정혼자가···.’
이게 그 유명한 불륜이라는 건가?
당황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책에서 나오던 그 모습이긴 했다.
‘아무리 최근에 애인을 따로 두는 게 유행한다고 해도···.’
아찔한 느낌에 그녀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리나, 제발 진정해.”
그 와중에도 키스를 받은 파리스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저, 저 파렴치한이 최근에 샤를로테 님을 한 번 구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그녀가 그 얄미운 모습을 참지 못하고 일갈을 날리려던 순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어느새 정신을 수습한 샤를로테가 침착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세례를 내린 거란다.”
“···세례요?”
“그래, 별의 은혜를 나누어 준 거야.”
샤를로테는 조금 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 * *
“주군, 파리스입니다.”
천막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샤를로테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무시하며 몸을 곧게 세웠다.
주인 된 자는 항상 위엄이 있어야 했으니까.
천을 걷는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크네.’
그가 들어서자 천막이 꽉 찬 듯이 비좁게 느껴졌다.
“무슨 일로 들렀지?”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허리 아파.’
물론 속마음은 달랐지만.
수일 간 맹렬히 말을 탔더니, 허벅지와 골반, 허리에 이르는 부위가 욱신거려 죽을 것 같았다.
‘아까도 말에서 내릴 때, 파리스가 허리를 잡아주지 않았으면···.’
그 상황을 상기하자 새삼스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구도가 굉장히 남사스러웠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저 손.’
정신을 놓고 저 크고 거친 손에 몸을 맡기고 있었지.
‘오히려 안심했던 것 같기도···.’
“주군?”
의아한 눈빛이 그녀를 바라봤다.
“흠흠!”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애써 위엄을 덧씌워 썼다.
“안부나 물으려고 온 건 아닐 텐데?”
“···청할 것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청할 것?”
그는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선명한 붉은 눈으로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세례를 내려주십시오.”
“세례를?”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례는 신관이 별에게 받은 힘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
세례를 받은 자는 일시적으로 별의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파리스가 그녀의 대전사가 될 확률이 높은 이상, 말하지 않아도 해주려고는 했지만···.
‘왜 이렇게 급한 거지?’
그는 요새가 가까워질수록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서 벌어질 일을 두려워하듯이.
‘뭘 걱정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무릎 꿇은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해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 그런데 굳이 지금 받아야 할 이유가 있나?”
“혹시 신체적 접촉이 꺼려지시는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정 불편하시면 괜찮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탁!
“불편한 게 아니야.”
그녀가 단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결코 너를 꺼리지 않는다.”
물론 그에 대한 유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인 사감으로 아랫사람을 다루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었으니까.
“원한다면 세례를 내려주겠어.”
“···감사합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었는데도 키가 크네.’
자신도 여자치곤 큰 편인데, 그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듯했다.
“···세례의 위험성은 알고 있지?”
“잘못하면 마력이 변이되어 심상이 망가질 수 있다는 건 압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 건 미숙한 신관들이나 하는 실수니까.”
자신은 그런 어설픈 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다만 별의 마력이 지닌 위험성은 완전히 제거할 수 없어. 그러니 자주 해줄 수는 없다는 걸 알아둬.”
그녀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자신의 손을 그의 머리 위에 올렸다.
의지를 일으키자, 그녀의 마력이 그의 마력기관으로 흘러 들어갔다.
‘역시 마력이 엄청나네.’
그녀는 자신의 마력을 도포하듯이 그의 마력 위로 흩뿌렸고,
견고한 마력의 입자들이 새로운 힘을 머금고 부풀어 올랐다.
‘모든 마력에 영향을 미치진 못하겠지만···.’
제법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여, 상당한 양의 마력을 변형시켰다.
파지직
무언가가 튀어 오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그대로 손을 뗐다.
그러자 마력들이 그녀에게로 돌아가려는 듯이 스파크를 튀기며 새어 나왔다.
그녀는 새어 나오려는 마력들을 억누르며, 그의 이마를 향해 키스했다.
‘이걸로 각인 완···.’
그리고 마침 그 순간에 리나가 들어오며, 그 장면을 목격해 버렸다.
“···그래서 내 결정으로 그에게 세례를 내린 거란다.”
샤를로테는 설명을 마무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요.”
리나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니, 리나?”
“아, 먹을 것 좀 챙겨서 왔어요. 저녁도 거의 안 드셨잖아요.”
리나가 손에 든 보따리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래, 고맙구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을 받으려 했다.
“아, 앉아계셔요. 제가 차려드릴게요.”
“으응? 그럴 필요까진···.”
그러나 리나는 이미 천막에 있는 화로에 솥을 걸고,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간단히 먹을 걸 챙겨 온 게 아니었어?’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파리스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 그리고 내일 오후쯤에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요새에?”
“예, 알론소 경이 강을 건넌 후에는 넓게 펼쳐진 평야라서 금방 목적지에 닿을 거라더군요.”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이동이 끝나는 거예요?”
열심히 솥 안의 내용물을 휘젓던 리나가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이렇게 말을 달리는 건 내일로 끝일 거다.”
그의 말을 들은 리나가 두 손을 불끈 쥐며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좋니?”
샤를로테가 그런 리나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럼요. 이동하는 내내 온몸이 아팠다구요.”
리나가 울상을 지으며 허리를 두드렸다
‘일정이 가혹하긴 했지···.’
샤를로테는 허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그걸 지금 말해주는 거죠?”
누구보다 주군께서 먼저 아셔야 할 내용인데?
리나가 돌연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았다.
“···이미 말했다.”
“에? 아니, 말을 안 했으니, 샤를로테 님께서도 모르시는···.”
“다만 들으실 준비가 안 되어 계셨을 뿐이다.”
파리스의 단호한 발언에 샤를로테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거의 마지막에 인사불성 상태로 말을 몰고 있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 배려심 없는 작자가···!’
멋대로 주인의 허물을 들춰내?
그녀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노려보자, 그는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
둘을 번갈아 보던 리나는 그제야 진실을 깨달았다는 듯이 탄성을 토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파리스 경의 손에···.”
“리나!”
얘는 왜 자꾸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만 할 거면 나가.”
그녀는 리나를 향해 엄포를 날렸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기색을 알아챈 리나는 콧방귀를 뀌면서 국자를 휘저었다.
“칫, 샤를로테 님도 파리스 경께 기대다시피 하셨으면서···.”
괜히 나한테 화풀이를 해.
흥흥.
리나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저게···.’
그 모습에 그녀의 이마 위로 혈관이 솟아올랐다.
“너어는 그렇게 말을 잘 타서 내내 로베르의 품에 안겨 왔나 보다?”
“샤, 샤를로테 님!!!”
두 사람은 파리스의 존재도 잊은 채로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파리스의 입가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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