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흠···.”
샤를로테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휘관들을 쳐다보았다.
‘왜 이런 자들이 내 기사를 무시하는 거지?’
감히.
본인들의 무능으로 변방에 좌천된 자들 따위가.
애초에 저자들이 늘어놓는 변명들도 같잖기 그지없었다.
‘뭐? 병사들을 위해 주둔지 이탈을 허용해?’
부족한 예산은 상급 기관에 추가 예산을 요청하거나, 예산에 맞게 부대의 편제를 조정할 것을 허락받으면 될 일.
저자가 취한 행위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리는 모두 누리려는 탐욕스러운 행태였다.
‘어쩌면 예산도 본인이 중간에 떼먹었을지도 모르지.’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왼편에 앉은 지휘관들을 노려보았다.
하나 같이 긴장감 없이 태만한 표정들.
‘마음에 안 들어.’
“샤를로테 님?”
“파리스, 요새의 병력들을 통제할 수 있어?”
“···알론소 경이 도와준다면 가능합니다.”
“샤, 샤를로테 님?”
당황한 알미나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녀는 그를 무시했다.
“알론소 경, 그리고 ···휴이 경?”
두 극위 기사는 그녀의 부름에 절도 있는 경례로 답했다.
“파리스를 도와 요새의 병력들을 정비하세요. 그리고 그중에서 무장이 괜찮은 자들을 추려 출정할 준비를 마쳐놓도록 하고요.”
““명을 받듭니다.””
“라르모, 넌 알카이드 가의 인원들을 통솔해.”
“명을 받듭니다.”
요새의 지휘관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알미나르 경?”
“···이러실 순 없습니다. 아무리 알카이드의 직계라도 이건 명백한 월권···.”
“입 닥쳐.”
서늘한 목소리가 하찮은 반항을 찍어 눌렀다.
“지금부터 이 요새의 지휘권은 내가 통솔한다.”
“···.”
요새의 지휘관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았다.
“이번 소동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통제에 따른다면, 상급 도시로의 진급을 약속하지.”
‘그게 어디일지는 장담 못 하지만.’
그녀가 미래를 약속하자, 웅성거리던 요새의 지휘관들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렇지.’
저열한 소인배들 같으니.
그녀는 턱을 치켜들며 아래에 위치한 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들에게 전령을 보내세요.”
중간에서 얼굴 좀 보자고.
그녀의 명령에 모든 지휘관들이 고개를 숙였다.
* * *
“요새에서 전령을 보냈다라···.”
“굳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목을 베어서 저들에게 보내시죠.”
황소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사내가 책상을 내려치며 말했다.
“안 돼. 사자 백께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요새를 함락시키라고 하시지 않았나.”
상석에 앉은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중앙 놈들은 겁쟁이입니다!”
그러자 상대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전령의 목을 보자마자 덜덜 떨면서 항복할 그런 한심한 놈들을 상대로 무슨 신중론입니까!”
“오히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지도 모르지. 굳이 상대를 자극할 필요는 없다.”
“테오클로스 백!”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
상석에 앉은 사내가 소식을 전한 병사를 돌아보았다.
“전령을 들게 해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 등에 전령의 깃발을 매단 기사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자네는 누군가?”
“사드르 가문의 라비오라고 합니다.”
굳은 표정의 전령이 긴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일로 찾아왔지?”
“샤를로테 님의 전언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전령의 말에 천막 안이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샤를로테?”
“요새를 맡고 있는 지휘관의 이름이 저랬던가?”
“요새의 지휘관은 남자가 아니었나?”
“조용!”
상석에 앉은 사내가 책상을 내리치며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기사를 전령으로 부리는 자라···. 신관이라도 되는가?’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지휘관들을 쓸어 보고는 전령을 쳐다보았다.
“그분께서 누구신지 알 수 있겠나?”
상대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자신감을 되찾은 전령이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분께서는 알카이드의 직계이시며, 북부의 만행을 꾸짖고 연합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친히···.”
쾅!
“건방진 놈이로구나.”
황소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사내가 전령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그 잘난 주둥이로 지껄여 봐라.”
“파르테노 경, 자중하라!”
“테오클로스 백! 지금 저 말을 듣고도 참으란 말인가?”
“여긴 전장이다, 파르테노.”
테오클로스는 기세를 끌어올려 상대를 찍어 눌렀다.
“···큭!”
“더 이상의 항명은 묵과하지 않겠다.”
“···후회할 겁니다.”
이를 악문 파르테노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천막을 나가버렸다.
“후···.”
낮게 한숨을 내쉰 테오클로스는 전령을 바라보았다.
“그래, 알카이드의 직계께서 뭐라고 하시던가.”
“주, 중간에서 마,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일련의 소동을 보며 잔뜩 움츠려 있던 전령이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
“협상을 하자는 이야기인가?”
“자,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일단 알겠다. 밖에서 대기하라.”
그가 손을 휘젓자, 전령은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생각하나?”
“어차피 공격할 거, 굳이 저들의 말을 들어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까마귀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자의 말에 왼편에 앉은 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은?”
“···알카이드 가의 직계가 여기까지 온 이상, 적들의 의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알카이드의 가주도 아니고, 직계 한 명 나타난 것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군.”
“호들갑이 아니라, 신중한 거다.”
“흥! 네놈들의 가문은 중앙에서 가깝다 그거냐? 아, 네 어머니가 중앙 출신이던가?”
“이 빌어먹을 자식이 감히 어머니를 건드려?!”
“그만!”
그의 고함소리에 천막이 다시 조용해졌지만, 서로를 향한 살벌한 눈초리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단 적들의 의도를 파악하기로 하지. 전령에게 제안에 응한다는 답신을 보내라.”
“테오클로스 백!”
“그만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건 독단입니다!”
“북부의 가문들은 당신의 수하가 아니오!”
그러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자들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감히 테오클로스 백께 무슨 말버릇인가!”
“이것들이 존중을 해주니, 끝을 모르고 기어올라?!”
또다시 난장판으로 변해버린 회의장.
“흥!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게 존중인가?”
“테오클로스 백은 사자 백께 선봉대를 통솔할 권한을 받으신 분이다! 너희들은 명을 따를 의무가 있어!”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그 모습에 테오클로스의 인내는 한계에 달했다.
“모두 닥쳐!”
고위 기사의 기세까지 끌어올린 명령에 앉아 있던 지휘관들의 입이 강제로 닫혔지만, 그들은 끝까지 서로를 노려보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후우.”
테오클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강경파의 독주가 심해지고 있다.’
그나마 사자 백께서 자리하신 곳에서는 자제하는 척이라도 하지만, 그 외의 장소에서는 그 분노를 참지 않았다.
물론 자신 역시 북부인인 만큼 그들의 분노에 깊이 공감하지만, 이처럼 막무가내로 나서는 것은 좋지 않았다.
전쟁에서 감정을 앞세우는 것만큼 멍청한 짓거리는 없었으니까.
‘···이러니 사자 백께서 내게 선봉대의 지휘권을 맡기신 것이겠지.’
사자 백 역시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휘관의 자리에 최대한 많은 온건파를 앉히려고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강경파의 목줄을 쥐려고 했다.
‘하지만 이젠 한계다.’
애초에 온건파와 강경파 간의 균형이 맞질 않았다.
북부를 대표하는 칠백가문 중, 강경파는 넷, 온건파는 둘, 중립이 하나였으니까.
‘게다가 아티나 가문 역시 강경파로 기울고 있으니, 세력의 균형은 무너진 것과 다름없어.’
그나마 사자 백이 온건파의 손을 들어주었기에 간신히 그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황.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선은 상대의 의도를 알아내야 한다.’
알카이드가 무슨 의도로 저 요새에 병력을 파견했는지를 알아야, 이후의 행동을 정할 수 있었다.
* * *
양측의 군대가 요새 앞의 평원에서 대치했다.
“가시죠.”
“···그래.”
샤를로테는 파리스의 손을 잡고 말에서 내렸다.
그녀가 천막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백마가 새겨진 갑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네이스 가문의 가주, 테오클로스다.”
“알카이드 가문의 샤를로테에요.”
샤를로테가 자리에 앉자, 양측의 기사들이 대치한 채로 살벌한 기세를 풍겨댔다.
“북부의 고위 기사께서 여기까지 행차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연합의 기사로서 내가 가지 못하는 곳이 있겠나?”
“군대를 이끌고 오시지 않았다면,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을 거예요.”
두 사람의 시선이 원탁의 중앙에서 치열하게 맞부딪쳤다.
“그럼, 알카이드의 직계께서는 여기까지 어인 일로 행차하셨나?”
“북부의 동향을 감시하고, 북부가 일으킨 사건에 대한 해명과 사과, 보상과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하기 위해 왔어요.”
“뭐라고?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조용!”
테오클로스가 손짓하자, 북부의 기사들이 대화에 끼어든 자를 끌고 나갔다.
“북부는 참 예의가 없군요.”
샤를로테는 그 모습을 보며 빈정거렸다.
“그런 고상한 걸 따진 놈들은 다 죽었거든.”
안락한 곳에 사는 누구들과는 달리 말이지.
테오클로스는 태연한 신색으로 대꾸했다.
“뭐, 북부에게 요구할 게 있다고?”
“당장 군대를 물리고, 책임자들이 중앙으로 출두···.”
“재미있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그 순간 어마어마한 압력이 그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윽!’
그녀는 버티려고 했으나, 점점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건방진 말을 하기에는 너무 무게감이 부족하지 않은가.”
“큭!”
“억!”
상대가 웃자,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기사들로부터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격이 맞질 않는단 말이지.”
협상을 할 거라면, 적어도 그 잘난 칠공가문의 가주는 오셨어야지.
‘···너무 무거워.’
고위 기사 앞에 나서는 건 너무 건방진 행동이었나?
‘아냐, 약하게 보였다간 그대로 잡아먹혔을 거야.’
짓눌리는 고통에 그녀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
이대로 나를 죽이려고 그러나?
‘아직 죽고 싶진 않은데.’
무릎을 꿇으면 살려줄까?
‘···그런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느니 죽겠어.’
하지만 그녀의 다짐을 비웃듯이 그녀를 짓누르는 압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아파.’
너무 아파.
‘아직, 아직은 죽을 수 없어.’
하지 못한 게 너무 많은데···.
리나랑 새로 들어선 백화점도 가보기로 했고,
같이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도 가기로 했고,
새롭게 태어난 동생 녀석의 얼굴도 봐야 하고,
자기 기사가 된 파리스의 검과 갑옷도 맞춰줘야 하고···.
···숙이면 편해질까?
아니, 나는 숙일 수···.
근데 너무 아파.
아프다고.
그녀의 큰 눈에서 투명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다면,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 난···.’
그녀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난 알카이드. 절대 무릎 꿇지 않아.’
생존을 향한 강렬한 갈망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고고한 자존심이 그녀를 버티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이대로 버틴다면 그대로 목이 꺾여 죽을 거란 걸.
‘절대로, 무릎을, 꿇···.’
살고 싶어.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린다.
‘제발 누가 도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과 함께, 그녀의 여린 목뼈가 한계를 맞이하려는 순간.
“괜찮습니다, 주군.”
거칠지만 따스한 손길이 그녀의 목을 받쳐 들었다.
“상대는 결코 주군을 해칠 수 없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을 달래는 다정한 붉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남자의 크고 거친 손이 자신의 볼에 흐르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이 손.’
한때는 자신을 희롱하고 아프게 했던 손이 지금은 다정하게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희롱과 위로.
욕정과 충성.
투박한 손 위로 겹칠 수 없는 감정들이 겹쳐간다.
이 손의 진의는 무엇일까?
‘뭐가 진심이야?’
안심하라는 듯이 토닥이는 손길에 그녀의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렸다.
남자는 자신을 보고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등을 돌렸다.
‘안 돼! 위험···.’
커진 눈망울 위로 펄럭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비현실적으로 선명하고,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푸른빛의 날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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