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카이드의 기수

강력한 벼락의 폭풍과 함께 붕괴된 적의 전열은 아군의 난입을 견뎌낼 조직력이 없었다.
파리스는 ‘왕의 왕좌’를 활성화하며, 미니맵을 확인했다.
‘아군’으로 인식한 자들에 의해 밝아진 전장의 안개 너머로 보다 자세한 전황이 보였다.
‘적의 기병들은 아군의 기병들이 견제하고 있는 건가?’
붉고 푸른 점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이건 아마 휴이 경과 휘하의 기사들이겠고···.’
아군의 진영에서 급하게 물러나고 있는 푸른 점들이 보였다.
‘이건 신관들일 테고.’
아마 마력을 소모한 신관들이 후퇴하고 있는 듯했다.
‘신관이라···.’
전장에서의 신관들은 그의 예상을 초월한 화력을 보여줬다.
단 한 방의 공격에 적들의 전열이 붕괴되었으며, 적들은 그 항거할 수 없는 폭력에 전의를 상실했다.
화약 무기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인간이 밖의 재앙을 버텨낼 수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무력이었다.
‘알론소 경은 어디···.’
미니맵을 살피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미니맵 위로 그들을 향해 제2파의 공세가 새빨갛게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재집결.”
“재집결!”
그의 뒤를 따르던 무관이 소리를 지르자, 흩어져 있던 병사들이 느릿하게 모여들었다.
‘‘왕의 이름으로!’를 활성화해야 하나?’
마력이 부담되어 비활성화했더니, 확실히 병력의 통제력이 떨어졌다.
“파리스 경, 적들이 다시 몰려오네.”
기사 한 명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보고 있습니다.”
“···부대를 물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대로 저희가 물러나면, 아군의 기병들과 밖에 있는 병력 모두가 고립됩니다.”
“밖에 있는 병력?”
그러나 파리스는 기사의 궁금증을 풀어 주지 않았다.
“병사들이 총기들을 회수하도록 통제해 주시겠습니까.”
“···알겠네.”
병사들은 진격해 오는 적들에게 맞서기 위해 급하게 죽은 적들의 총기를 노획했다.
다행인 점이라면, 동일한 제식 장비를 사용하기에 곧바로 노획한 총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총기의 부족은 앞으로의 수성전에서도 고질적인 문제가 될 거야.’
단순히 총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랜 평화 속에 방치된 무기고, 차갑게 식은 대장간, 비어버린 화약고.
알론소와 함께 둘러본 요새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기본적인 수성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래도 희망이 없는 건 아냐.’
오늘 목격했던 신관의 힘은 충분히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었다.
요새의 성벽과 신관의 권능, 자신의 능력이 합쳐진다면,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북부군의 섬멸이 아니니까.’
중앙의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그들의 승리였다.
“사격전을 지휘하는 것을 허가한다.”
“명을 받듭니다.”
무관들이 나서서 병사들을 재촉하자, 병사들이 길게 대열을 이루었다.
장총을 든 병사들이 평행선을 이루어 서로를 마주 보고, 지시에 따라 장전을 시작했다.
서로를 향해 겨누어진 총구, 긴장감이 흐르는 그 사이를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스쳐 갔다.
“쏴!”
화약의 폭발과 함께 붉은 화염이 피어오르고, 희고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게 퍼진다.
“장전!”
이후로도 기계적으로 이어지는 장전과 격발.
서로를 향해 거리를 좁히며 이루어지는 공방에서 유리한 것은 북부군이었다.
장전부터 조준, 격발까지 이루어지는 속도도 월등히 빨랐고, 포병의 지원 사격은 아군의 대열을 끊임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그러나
“쏴!”
병사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와 ‘무모함’을 공유한 병사들은 공포를 거의 느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런 방식은 병력의 소모가 너무 커.’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하는 병사들은 분명 강력했지만, 문제는 지나치게 높은 사상률이었다.
‘상대가 보통의 병사들만 돼도 이 정돈 아니었을 텐데.’
연합 최고의 정예병인 북부군은 상대의 무모한 공격에 마치 기계처럼 대처했다.
‘하지만 이제 마지막이다.’
“돌격!”
그들의 대열이 충분히 가까워지자, 대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창병들이 뛰쳐나오며 벽을 이룬다.
그와 동시에 양측의 기사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
“더러운 배신자들!”
“배신은 너네가 먼저 했겠지!”
“명예도 모르는 자들 같으니, 같은 귀족들을 죽여?”
서로를 향해 질러대는 악다구니 속, 전장의 한편에 양측의 지휘관들이 대치했다.
“그렇게 싸울 생각인가?”
북부의 극위 기사, 부테르가 거센 격류를 검에 두르며 말했다.
상대처럼 한 손에 거대한 군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는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굳이 너를 상대로 두 손을 쓸 필욘 없을 것 같군,”
그러나 검은 머리의 상대는 태연한 표정으로 군기를 흔들 뿐이었다.
“모욕적이군.”
그러나 부테르는 쉽게 상대에게 달려들 수 없었다.
‘저 날개···.’
마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한 듯이 아름다운 날개가 상대의 등 뒤에 펼쳐져 있었다.
분명 같은 극위 기사임에도 마력을 뿜어내는 것에 급급한 자신의 그것과는 비교를 불허했다.
‘하지만 상대 역시 많은 마력을 소모했을 거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부테르는 좀처럼 발을 뗄 수 없었다.
곧바로 파고들기에는 빈틈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입으로만 싸울 생각인가?”
“···.”
“북부의 기사는 명예를 모르나 보군.”
쓸데없는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극위 기사의 전투는 심상의 전투.’
정신이 흔들렸다간 칼끝도 무뎌지기 마련이었다.
‘상대 역시 나와 같은 유수 계열의 검식을 사용한다. 하지만 안개와 반사를 활용하는 교란계는 아니고, 아마 타격을 중시하는 정통파거나 검식에 치중하는 격검파.’
사용하는 검의 종류를 보니 격검파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나쁘지 않다. 수비를 우선한다면, 상대는 쉽게 나의 방어를 뚫을 수 없어.’
그리고 전장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버티기만 해도 그의 승리였다.
“···그렇게 급하면 자네가 들어오지 그런가? 왜, 내가 먼저 자네에게 달려들길 바라나?”
“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상대가 군기를 어깨에 걸친 채로 자세를 잡았다.
‘역시나 시간이 없는 건 상대다.’
부테르 역시 자세를 잡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군기를 펄럭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오만함을 깨부숴주지.”
가벼운 도발, 날카로운 칼날.
부테르는 상대의 공격을 쳐내며, 확신을 가졌다.
자신은 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과 함께 내면에 있는 심상을 불러냈다.
거센 물줄기가 와류가 되어 검에서 뛰쳐나갔다.
칼날의 예리함을 머금은 초승달 모양의 참격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초승달은 거센 와류에 튕겨 나갈 뿐이었다.
‘그대로 갈아주마.’
검을 따라 생성된 와류들이 용오름이 되어 상대를 향해 나아갔다.
상대는 발악하듯이 검을 휘둘러댔지만, 용오름들은 상대의 참격마저 흡수하며 더욱 거대해졌다.
“잘 가라, 오만한 기사여.”
용오름들이 겹치며, 무언가 갈리는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서지는 철과 육신, 튀어 오르는 피.
그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이거 의왼데.”
“?!”
“극위 기사도 속을 줄이야.”
그의 귓가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사실 나도 당황스러워.”
이렇게 쉽게 속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순간 세계가 균열이 일듯이 금이 갔고, 그 틈을 초승달 모양의 참격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까짓 거!”
그는 멀쩡한 상대의 모습에 당황했으나, 곧 검에 와류를 두른 채로 날아오는 참격을 막아낼 준비를 마쳤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을 죽···.”
서걱!
깔끔한 절단음과 함께 와류가 그대로 쪼개졌다.
‘어째서?’
아까도 간단하게 막아냈던 공격인데?
파지직!
‘벼락?’
설마···.
‘신관의 세례!’
이건 알카이드 놈들의 벼락이 틀림없···.
부테르는 세상이 빙그르르 도는 것을 느꼈다.
날아가는 그의 시야에 후방에서 나타난 중앙군에 의해 공격을 받는 북부군이 보인다.
‘매복인가?’
양측으로 협공을 북부군은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퇴, 각해···야.’
마지막 생각과 함께 그의 세계가 암전됐다.
굴러가는 머리를 바라보던 파리스가 고개를 돌려 다가오는 노기사를 맞이했다.
“알론소 경, 적절한 타이밍에 오셨습니다.”
“내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나?”
노기사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물었다.
“병력을 준비하신다는 분께서 모습을 보이시지 않으니, 뭔가를 준비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참 낙천적인 사내로구만.”
“동료를 믿는다고 해주시죠.”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슬슬 적들이 물러나는군요.”
“예상치 못한 펀치를 2연타나 얻어맞으면, 아무리 머저리라도 그다음은 조심하게 되는 법이지.”
그들의 대화처럼 북부군은 부대를 물리고 있었다.
‘이제야 좀 쉴 수 있겠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날개를 거둬들였다.
“흐, 흐아악!”
“아파, 아파···.”
“으윽.”
그가 마력을 거둠과 동시에 주변이 울음과 신음으로 가득 찼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건가?”
노기사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파리스는 태연한 표정으로 시치미를 뗐다.
“그냥 전투가 끝나니 후유증이 한 번에 몰려오나 보죠.”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던 알론소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요새로의 복귀를 서둘렀다.
“아, 휴이 경.”
“대단한 전투였소.”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휴이가 말에서 내리며 경례를 건넸다.
“휴이 경께서 적들의 기병을 견제해 주신 덕분이지요.”
파리스 역시 주먹을 심장 부위에 올리며 예를 표했다.
“아니,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은 없네.”
‘인간’은 말이지.
휴이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자네, 혹시 고위에 이르렀나?”
“제가 결정화된 것처럼 보이십니까?”
파리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는 않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기적을 부리는 건가?”
알론소가 중간에 끼어들며 물었다.
“역시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이내 휴이와 알론소가 그들끼리 쑥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병사들의 공포를 잊게 만드는 위엄.”
“범인은 결코 저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고위에 이른 자들도 저런 일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지.”
“마술일까요?”
“내 평생 저런 마술이 있다고 들은 적은 없네.”
‘이러다가 여기서 밤을 새겠군.’
파리스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만 복귀한다!”
그들은 부상자와 무기를 챙겨서 요새를 향해 걸어갔다.
“아군이다!”
“승리자들이 왔어!”
“성문을 열어라!”
성벽 위로 환호성이 들리며, 도개교가 내려왔다.
와아아아-!
사방에서 울리는 환호성.
병사들이 급조한 월계관을 던지며, 아군의 승리를 축복했다.
그들은 터져 나오는 환호 속에서 요새 내의 대로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거리를 돌아 내성의 앞까지 다다랐을 때.
‘샤를로테.’
아름다운 자신의 주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떨림?’
그는 그녀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감정이 무엇이든, 자신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그는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주군의 기사, 파리스.”
“주군께서 내리신 권한과 축복으로 적들에게 맞섰으니.”
“이 영광된 승리를 주군께 바칩니다.”
그녀의 앞에서 양손으로 군기를 바친다.
그 첫 번째 승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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