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만을 위해 각성한 청염의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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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룩
작품등록일 :
2024.05.0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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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4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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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4화

DUMMY

‘성스러운 검이 자기가 본 검 중에서 가장 멋진 검이라고?’


황당한 왕의 말을 듣자마자 내 입술은 실소를 터뜨릴 것처럼 씰룩였다가 굳었다.


명백한 도발인 것이 분명하다.


‘두 눈을 멀쩡하게 뜨고도 내 성검을 진심으로 멋지다고 칭찬할 리가 없다.’


아무리 성스러운 검이 내 검이라지만, 빈말로도 근사해 보인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성검은 하찮게 생겼다. 오죽하면 괴물까지 내 성검을 비웃었겠는가?


‘이런 돌덩어리라도 나만 욕할 수 있다고.’


나는 왕을 응시한 채 새로운 투쟁에 맞설 각오로 가시덤불이 사라진 길에 발을 내렸다.


‘네 번째 승리의 관문은 마지막 관문이니까 왕은 검은 기사보다도 강할 수 있다.’


과연 무한의 비극성의 왕은 얼마나 강할까? ‘절망을 삼킨 악마’처럼 엄청난 능력이 있을 수도 있다.


내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왕에게 점점 다가갔지만, 왕은 마치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왕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찮은 검과 시시한 검의 주인이라서 싸울 생각이 들지 않나?”

“······.”


나는 왕좌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우뚝 멈추고 왕을 올려다보면서 물어보았다.


“그래도 싸워줘야겠는데? 말했잖아. 당신 뒤에 있는 문에 중요한 볼일이 있다고.”


내가 성스러운 검을 치켜들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왕을 가리켜도 녀석은 무반응이었다.


“사람이 말하면 대답을 좀 하라고.”


싸울 생각이 들지 않으면 그런 생각이 들도록 해주면 된다.


나는 계단에 성큼 발을 올렸다. 이대로 계단을 발판으로 삼아 박차고, 모든 계단을 단번에 뛰어넘어서 왕의 목부터 노릴 것이다.


“키야아아악!”


난데없이 어둠의 구렁과 같은 맨 아래에서 들려오는 포효에 나의 다리가 멈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울부짖는 고음은 왕좌의 길을 불안전한 다리처럼 일시적으로 흔들리게 만들었다.


‘왕만 있는 게 아니었어.’


내가 소리의 출처를 파악하기 위해서 다리를 내리는 동시에 내 몸을 천막보다도 쉽게 가릴 정도의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서 위를 확인했다.


‘벌써 왔나.’


나의 머리 위에 있는 간헐적으로 떨리는 거대한 회색 손이 보였다. 녀석의 손과 이어진 팔은 보이지만, 얼굴이나 다른 신체 부위는 보이지 않았다.


나를 붙잡아가고 싶은 것인지 거인의 것처럼 큰 메마른 손이 불쑥 다가왔다.


나는 나를 잡을 수 없게 녀석의 손가락들을 모조리 잘라낼 준비를 했다.


“초면에 스킨십은 사양할-”


-푹.


“캬아악!”


성스러운 검이 닿기도 전에 곧게 펴진 길쭉한 가시덤불이 커다란 손의 중앙을 관통했다. 허공을 가르며 길게 쭉 뻗은 가시덤불에 찔린 괴물의 손은 화살에 뚫린 한낱 소동물처럼 힘없어 보였다.


“돌아가라. 너의 먹이 따위가 아닌 짐의 소중한 귀인이다.”


왕의 말과 함께 가시덤불이 빠지면서 손에서 검은 피가 소나기처럼 아래로 후두둑 쏟아져 나왔다.


나는 놀란 눈으로 어떠한 반항도 없이 밑으로 쑥 사라지는 손을 지켜보았다.


“왜 나를 도와준 거지? 지금 도와준 것과는 별개로 어차피 내가 문에는 갈 수 없도록 막을 생각이겠지만.”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가 문으로 가길 소망한다면 짐은 그대를 위해 길을 비킬 뿐이다.”


왕의 예상하지 못한 답변을 들은 나는 일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정말 나를 막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왕은 나의 혼란을 읽은 것처럼 혈색이 없는 입을 열었다.


“네 번째 관문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짐을 이기거나 문을 개방하는 것. 기실 전자의 방법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무한의 비극성이 현자의 탑에 옮겨지기 전에도 몇백 년 동안 수많은 영웅은 짐과 칼리브스를 꺾지 못했다. 대륙의 위대한 전사들이 왕국의 저주를 풀기 위해 도전했으나 전부 헛수고였지.”


왕이 왕좌의 팔걸이에 손을 얹은 채 검지를 까닥이자 가시덤불이 전부 밑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짐의 나라는 평화로운 땅이었다. 저주가 뿌리 깊이 내리기 전까지는.”


왕의 목소리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차가우면서도 머나먼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지 완전히 숨길 수 없는 그리움이 엷게 묻어났다.


나는 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 번째 승리의 관문에서 만났던 갓난아기를 떠올렸다.


궁금했다.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저주의 시초라고 불렸는지, 왜 악인이 아닌 것 같은 검은 기사와 내 눈앞에 있는 왕에게도 저주가 깃든 것인지.


‘연구소의 그놈들은 백번을 저주받아도 마땅하지.’


나는 살아있는 악마들을 직접 보았기에 진정한 악인 정도야 구분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저주받은 이유가 있나?”


나의 물음을 들은 왕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미소라고 하기엔 딱딱했고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대는 짐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알 것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짐이 저주를 받게 된 이유는 그저 한 아이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극이 일어나기 전까지 저주의 대가를 알지 못하였다. 다만, 저주를 짐의 몸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에 가엾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했을 뿐.”


나는 왕의 얘기를 듣자마자 숨을 삼켰다.


“칼리브스와 기사단을 끌고 저주를 뿌리는 괴물을 정벌하러 멀리 떠났었지. 마침내 도착한 그 땅에는 갓난아기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짐의 최정예 마법사를 시켜 살펴보았으나, 아기로 둔갑한 괴물도 아니었다. 저주받은 갓난아기였지.”

“그래서 저주를 직접 짊어진 건가? 다른 기사들을 시키지 않고?”

“왕은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거늘, 어찌 짐의 사람을 저주의 그릇으로 쓰겠는가? 물론 칼리브스는 자신이 대신 하겠다고 꽤 고집을 부렸었지. 그 녀석의 충성심을 알기에, 의견을 굽히는 척하면서 저주를 바로 거두었다. 설령 짐이 영원히 눈을 감게 되어도 왕국에는 현명한 자들이 많으니.”


왕이 이번에는 명백한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곧 말을 이어가는 입술이 일그러졌다.


“저주를 거두고 나서, 그 아이가 원래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나라로 기사를 시켜 안전하게 보내주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연유를 모르나, 그 아이는 흑마법사의 증오를 산 아이였다는 것을. 아이에게 끔찍한 저주를 걸기 위하여 자신의 오른쪽 눈을 바친 미치광이였다.”

“완전히 미친놈이군. 보나마나 아이의 부모님을 향한 증오심을 무고한 아기한테 옮겼겠지.”


왕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이윽고 그 증오심은 아이의 저주를 푼 짐에게로 옮겨졌다. 아이를 다시 찾을 수 없게 된 흑마법사는 저주를 치료받고 있는 짐을 찾아왔다. 그리고 짐의 앞에서 자결했다. 저주를 바꾸면서 극대화하기 위해서였지.”

“허···.”


내가 언제나 미친 새끼라고 했던 소레스트 새끼는 흑마법사에 비하면 귀여운 편이었다.


“그리하여 저주는 그대가 비석에 보았을 내용처럼 변질되었다. 짐이 사랑하는 왕국에 저주는 번졌고 그와 함께 괴담과 같은 왕국의 소문들이 퍼지기 시작했지. 군대와 정의로운 용사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저주받은 왕국과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 찾아왔다.”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 건가?”


나는 비석의 내용을 떠올리면서 물었다. 만약 왕이 순순히 목을 내어줬다면 죽는다고 하여도 왕국의 끝나지 않는 저주를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저주의 영향은 깊어서 짐의 왕국에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짐의 죽음이 왕국의 비극을 끝낼 방법이라면 기꺼이 그랬을 터.”


왕이 검지를 세워 보였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두 가지가 아니다. 사실 한 가지일 뿐이지.”

“두 가지가 아니라고? 비석에는 분명 두 가지라고 적혀 있었어.”

“그것 또한 일종의 시험이다. 흑마법사는 자결하기 직전에 말했다. 짐처럼 멍청한 오지랖을 부리는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고, 그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다. 평생 오지 않을 구원을 영원히 갈망하고 고통스러워하라고 저주했었지.”


나는 왕의 이야기를 마저 듣기 위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대가 보았을 신전과 비석, 그리고 요람은 왕국에 처음 발을 들이는 자에게 보이는 저주의 심판대나 마찬가지다. 선택지를 주지만, 해답은 하나다. 요람에서 아이를 보았다고 했나?”

“봤어.”

“그 아이가 바로 짐이다.”

“이 타이밍에 갑자기 농담하는 거냐···?”

“하하. 흑마법사의 저주는 짐을 조롱하기 위해서 짐이 아이를 구했던 상황을 재현한다. 짐은 아이였을 때를 기억하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저주의 시초인 짐을 제거하는 순간 원한이라는 감정이 그대가 보는 지금의 짐을 탄생시키고, 사랑하는 왕을 죽인 원한 또한 짐의 백성들과 기사들을 이성을 잃은 괴물들로 만들지.”


왕의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저주에 대해서 전부 깨닫게 된 순간 소름이 끼쳤다.


할 수만 있다면 흑마법사 새끼를 다시 죽이고 싶을 정도다.


‘악독한 새끼. 일부러 더 비참하게 만들려고 왕이 베푼 선행을 저주를 푸는 유일한 방법으로 한 건가?


왕은 아이를 도왔지만, 비석의 내용을 전부 읽었다면 과거의 왕처럼 아이의 저주를 거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왕국을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 왕을 죽였겠지. 비극은 그렇게 무한히 반복되었을 테고.’


“짐을 죽였던 자들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고 싶지만, 부끄럽게도 조금은 미워했다. 그들의 선택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또다시 저주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안식을 맞을 기회를 놓쳤으니. 그 원망과 미움은 짐의 저주를 제어할 수 없게 하였고, 짐은 왕좌까지 도달한 이들을 무참하게 도륙했다.”


-철커덕.


왕이 마침내 왕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짐은 과거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무한의 비극성의 왕이다. 그렇기에 그대가 최초로 저주를 제거했어도 짐은 존재한다. 허나, 그대가 저주를 대신 짊어진 것 또한 과거. 그대가 칼리브스와 겨루는 동안, 그대의 선택으로 인하여 저주를 천천히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최초로 저주를 제거한 사람이라고···?”

“그대가 과거의 짐처럼 아이로부터 저주를 거두지 않았나? 그것이 저주를 거두는 방법이자, 승리의 층에서 진정으로 승리하여 살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왕이 오른팔을 뻗자, 왕좌의 뒤에 있는 문이 빛나면서 열렸다.


“진짜 승리가 무엇인지 아는가? 장수의 목을 베는 것? 난공불락의 요새를 무너뜨리는 것?”


[당신은 마지막 승리를 쟁취하였습니다.]


“아니다. 진정한 승리란 피를 보이지 않고 이기는 것. 자신의 권리가 중요하듯이 타인의 권리를 훼손하지 않고 이룩하는 승리다.”


나의 승리를 알리는 시스템의 창과 왕의 말을 듣고 가슴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뜨거운 희열을 느꼈다.


소레스트는 나를 막는 것에 실패했다.


'내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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