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호지르? 안 돼 그건 벌써 보여줄 수 없어. 레드? 암살자 챔피언을 미드에서 뽑으면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지? 다음엔 무엇을 밴할 줄 알고? 레우스로 눈을 뽑고 언노페로 허리를 자른다? 그럼 너희는 누구를 선택할 거지? 슈이? 렙틸러스? 이멜리아?'
구교환의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순간 밴에 남은 시간은 5초.
구교환은 55초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팀원 중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4초
레우스가 밴 당해 잠깐 놀랐을 뿐. 팀원은 구교환을 믿는다. 지금까지 증명했던 예선에서의 50판을 알고 있고, 우리의 전승 우승이 절대 운이 아닌 구교환의 열과 성을 다한 분석과 전략에 대한 고집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3초
'욜로!의 중심축은 바텀이다. 레우스를 밴한 이유가 뭘까? 탑에 대한 억제에는 어차피 자신이 없으니 확실하게 바텀에서 주도권을 가져온다? 그렇게 보기엔 레우스 말고도 버티는 픽은 얼마든지 있다. 애초에 버틸 것인지 강하게 압박할 것인지는 원딜 보단 서포터 챔피언 성향이 더욱 유의미하다는 것을 알 텐데?'
-2초
'도대체 뭐냐. 너희는 몇 수 앞까지 보고 있는 거냐···. 아니면···설마.'
- 언노페 Banned
"?"
구교환을 제외한 오인사격 팀원 전부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모니터를 아주 먼 발치에서 망원경으로 보고 있던 정승원 감독이 놀랐다.
"제 스스로 자기 허리를 끊었다고? 패닉이 온 건가?"
정승원 감독의 의문대로 아주 의아한 밴이지 아닐 수 없다.
욜로!멤버 중 언노페를 주력으로 사용하는 멤버는 아무도 없으니까.
-55초
상대에게 넘어간 벤 시간을 유심히 보고 있던 구교환은
-40초
조금씩 줄어드는 시간만큼 한껏 상기돼 있던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구교환의 언노페 밴은 일종의 도박수이자 테스트다.
도박수라 함은 전투의 기본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싸움인 심리전이기에, 손에 쥔 것이 아닌 손에 쥐지 않은 것에 비밀이 있다고 주력 픽인 언노페를 스스로 밴함으로써 상대에게 압박감을 준다.
주력 픽이라는 것은 그 챔피언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들이 꺼낼 전략은 언노페가 상대에게 쥐어졌을 때 효과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전략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25초
또한 언노페 밴이 테스트라 함은 혹시나 하는 마음. 상대가 첫 밴으로 가져간 레우스라는 카드가 고뇌 끝에 나온 술책이 아닌 그저 오인사격의 예선전 픽률 순대로 밴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테스트. 예선전에서 픽률 1위는 레우스 2위는 언노페 3위는...
- 용리 Banned
맞수가 나타나길 바랐던 구교환의 바람과 달리 상대는 허무하게도 예선전 픽률대로 밴하고 있었다.
"하아~ 아쉽네."
구교환의 바람대로 욜로!는 맞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이제 뭐 밴하지?"
"그러게? 뭐야 도대체? 언노페를 상대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언노페의 신출귀몰처럼 글로벌 궁극기가 있는 챔피언을 뽑아 볼까요? 아니면 기동성 좋은 챔피언이라든지. 그걸 견제하는 것 같은데?"
"글로벌 궁? 누가 셰인이나 바르햄 좀 다룰 줄 아나?"
"어··· 저 잘 못하긴 하는데...."
심리전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밴픽 시간이 늦어진 것과 더불어 용리를 밴하는 것으로 예선전 픽률 순서대로 밴하는 것을 확신한 구교환은 적의 혼란을 가중하기 위해 글로벌 궁이 있는 바르햄을 밴했다.
- 바르햄 Banned
"맞네! 바르햄 밴하는 거 보니까 글로벌 궁이나 기동력 좋은 챔피언 견제하네. 일단 잘 못해도 픽해. 그것만으로도 상대한테 압박감을 줄 테니까!"
이로써 욜로!는 이미 구교환의 손바닥에서 놀고 있었다. 욜로!팀에서 아무도 셰인을 잘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 구교환이기에 셰인과 바르햄 중 일부러 바르햄을 밴했다.
-데비 Banned 리산드리아 Banned
세 번의 밴이 끝나고 이어지는 세 번의 픽.
욜로!는 자신들이 보이지 않는 실로 조종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겁도 없이 셰인을 선 픽하는 순간. 오인사격은 셰인의 카운터나 다름없는 가위엔과 정글링이 아주 빠른 브레이브즈를 픽했다.
"어라?"
"아...아마 우리가 전략을 다 파악한 걸 보고 놀라서 그냥 익숙한 픽을 한 거야."
"근데 저도 셰인은 익숙하지 않은 픽인데···."
다음 욜로!의 픽은 60초 중 58초를 소비했다. 상대에게 놀라 익숙한 픽을 한 건 그들이었고, 그들의 익숙한 픽에 대한 카운터를 이미 준비해 둔 오인사격은 그들의 픽에 정확히 상성인 챔피언을 골라 브레탈에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
탑 최현준 : 살아 숨 쉬는 가위손 봉제 인형 가위엔 - 그림자 의사 셰인
정글 이동하 : 용감한 무덤지기 브레이브즈 - 농부 용사 '농사' 링 짜오밍
미드 구교환 : 달에서 내려온 우주 토끼 슈이 - 생명의 꽃 자이렐라
원딜 김수하 : 저격수 여왕 레이틀린 - 말괄량이 폭탄마 정크
서포터 정한진 : 혹한의 왕 브라이움 - 영혼의 거울 쓰레이 슈
정승원 감독은 벤픽이 끝나고 로딩 창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다 입구에서 커피를 챙겨오던 이해성 스카우트를 만났다.
"오? 벌써 끝났어요?"
"어. 끝났어."
이해성 스카우트는 커피를 든 손의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어렵게 시간를 확인했다.
"아직 10분도 안 됐는데?"
"말이 짧다?"
"아니! 너무 말이 안 되니까요. 왜요?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막상 실물로 보니까 별로예요? 그러니까 제가 결승만 보자고 말씀드렸잖아요. 어차피 결승도 못 가는 거면 아무 쓸모 없다니까."
정승원 감독은 이해성을 무섭게 째려봤다.
"선수한테 쓸모없다는 말 금지라고 했지."
"아··· 죄송함돠~."
정승원 감독은 이해성의 능구렁이 같은 반응에 머리를 콩! 쥐어박고는 커피를 확! 채갔다.
"아야! 아. 알았어요. 조심할게요."
"말버릇 되면 늦어. 미리 고쳐라. 나중에 선수들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고."
"눼···. 아, 아무튼 경기 어땠는데요? 생각보다 별로예요?"
"누구?"
"누구긴. 크레이드죠."
정승원 감독은 방금 나온 경기장 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데려와."
***
셰인을 가뜩이나 잘 다루지도 못하는데 극상성인 가위엔을 만나버리면서 시작하자마자 2렙에 솔킬을 따낸 탑.
게다가 정글링이 빠른 용감한 무덤지기 브레이브즈의 빠른 정글링 후 카운터 정글로 링 짜오밍을 밀어낸 뒤 순간이동으로 방금 라인에 복귀한 셰인에게 펼쳐진 탑 다이브에 3분이 조금 넘어가는 시점에서 탑은 그야말로 붐!
근거리에서 샷건을 쓰는 브레이브즈와 거위를 메인 무기로 쓰는 가위엔에 대항하기 위해 꺼낸 받아치기 전문가 자이렐라. 그녀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뽑은 초 원거리 폭격수 슈이가 그녀의 아름다운 꽃이 피기도 직전에 꺾어버린 결과.
꽃뿐만 아니라 꽃다운 나이에 프로를 향한 욜로!팀의 마음까지 꺾어버리며 19분 만에 1세트 승리.
벤픽에서의 완벽한 심리전과 압도적인 피지컬로 패배한 1세트에 전의를 상실한 욜로!는 2세트를 불과 21분 만에 내주며 오인사격의 압승.
그리고 이 모든 시나리오를 1세트 벤픽에서부터 예측한 자가 둘 있으니.
구교환이 언노페를 밴하고 25초 뒤 구교환의 생각을 눈치챈 정승원 감독과.
수많은 분석과 이세계에서의 지식이 조화를 이루어 픽이 정해지면 앞으로의 경기 양상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능력을 얻기 시작한 구교환이다.
"경기 끝나신 팀은 감독관님 따라서 밖으로 나가주시면 됩니다."
"어··· 근데 다른 경기 좀 지켜보면 안 되나요?"
"네. 규정상 안 됩니다. 경기 끝나신 팀은 3분 내로 나가주셔야 해요."
"크~아쉽네. 오늘 다들 고생했다! 각자 조금 쉬고 아까 카페 그 자리에서 보자."
""네.""
오인사격은 즐거운 분위기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교환도 자기 예측대로 경기가 흘러갔다는 것에 자신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음을 체감하며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잠시.
'뭐...뭐야 저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이라도 본 듯한 얼굴로 구교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귀신도, 이세계도, 마법도 아니요.
그저 비어있는 다섯 의자였다.
그 다섯 의자 앞에 쓰여 있는 네 글자 '반달곰들'.
'말...말이 안 되잖아.'
구교환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은 이세계까지 경험한 구교환의 상식선에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
구교환은 반달곰들 팀의 빈 좌석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감독관을 불렀다.
"저...저기요 감독관님."
"네? 무슨 일이세요?"
"혹시 저희가 처음으로 경기에 이겼나요?"
"아, 아니요. 처음 경기에 이긴 건. 반달곰들이에요. 여러분들은 두 번째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듯 해맑게 답하는 감독관.
오인사격의 상대는 140점의 욜로! 프로 연습생이 없는 아마추어팀인 데 반해 반달곰들의 상대는 프로 연습생이자 우승 후보라 점쳐지던 150점의 곰 같은 여우.
오인사격의 플레이타임은 총 40분.
반달곰들의 빈자리의 의미는 그들이 우승 후보이자 라이벌인 곰 같은 여우를 상대로 2세트를 40분 이내로 승리했다는 것이다.
분명하다···.
분명히 그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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