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여느 때처럼 탑을 향하던 이동하의 눈에 보인 건 채플랭크와 갸르였다.
여느 때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쫓기고 있는 쪽이 우리라는 것.
점점 다가오는 기우라와의 만남에 머릿속이 지배당했던 최현준은 라인전을 아무 생각 없이 정석적으로 해버렸다.
정석의 의미는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 상대는 최현준의 플레이를 쉽게 예측했고, 그보다 반걸음 앞선 플레이의 누적은 정글의 개입 없이는 좁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린 최현준은 조금 이르지만 억지로 정글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형! 언제 와요?"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뒤로 빼 봐···."
채플랭크는 갸르에게 패시브인 독칼을 묻히곤 빨라진 이속으로 이리저리 도망가며 깊숙이 들어 오도록 유인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갸르는 채플랭크의 의도대로 [ 콩콩! ]으로 미니언의 머리를 타고 넘어 채플랭크를 향해 도약하며 [ 부우우메랑! ]을 던졌다.
가까스로 부메랑을 피한 채플랭크. 아마 부메랑에 맞았다면 느려짐 CC에 걸려 갸르에게 하염없이 카이팅당했을 것이다.
부메랑이 빗나가는 순간 채플랭크를 놓아줄 법하지만 더욱 매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갸르.
"왔어···."
이제 갸르의 시야에 보이는 수준까지 올라온 용리는 먼저 [ 용 비늘 ]로 채플랭크에게 붙어 주려던 순간.
[ 포효 ]
-어흥!
기다렸다는 듯 호랑이의 포효와 함께 탑 부쉬에서 용리를 향해 튀어나오는 호걸.
[ 호승심 / 용 비늘 ]
성사된 용과 범의 대결.
호승심으로 공속과 이속, 피해 흡혈까지 얻은 호걸의 선공.
[ 호권 / 비늘 과열]
[ 호권 ]으로 출혈과 흡혈 감소 디버프가 생긴 용리. 아쉽게도 [ 용 비늘 ]로 생긴 쉴드는 출혈로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나마 있던 피해 흡혈까지 무의미한 상황 속.
[ 범의 강림 ]
궁극기 [ 범의 강림 ]으로 완전히 호랑이로 변한 호걸.
[ 점멸 ]
용리는 점멸로 급하게 전장에서의 이탈을 꾀했다.
그리 강한 용리가 용의 제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허겁지겁 도망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용리가 좋은 정글 챔피언인 이유는 Q, W, E 세 스킬 모두 스위칭 스킬이기 때문.
궁극기가 없는 6렙 이전에 남들보다 많은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정글링도, 초반 교전에서도 우위를 점하는 건 당연한 사실.
하지만 99개의 챔피언 중 스위칭 스킬을 가진 챔피언이 용리뿐만은 아니다.
호걸 또한 기본적으로 [ 범의 강림 ]이란 궁극기가 열려있고, 궁극기를 쓸 때마다 Q, W, E 스킬이 스위칭 된다.
[ E:달려들기 / Q:할퀴기 ]
순식간에 들어온 콤보에 용리는 너덜너덜해진 피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 용의 날개 ]를 펼칠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울리는 죽음의 신호.
[ 퍼스트 킬! ]
이동하의 시야에 살며시 보이던 최현준의 화면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이동하가 개입하는 순간 상대의 타겟팅이 이동하에게 쏠린 덕에 그대로 후퇴했다면 분명 살았을 것이지만, 손해를 입은 채로 뒤돌기 싫었던 최현준의 자존심이 그를 무너뜨렸다.
'나...나라도 살아가야 해···.'
[ 아군이 당했습니다. ]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려는 순간에 울리는 또 하나의 비극.
"미...미안합니다."
최현준의 사과와 동시에 나온 비보가 믿기지 않아 시선을 돌린 찰나의 순간 목덜미로 날아드는 호걸의 날카로운 송곳니.
[ 깨물기 ]
-콰직!
[ 아군이 당했습니다. ]
순식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동시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짧은 순간에 최현준 구교환, 이동하가 죽었다.
"아···."
싸늘한 공기.
시끄럽게 정보가 오고 가던 헤드셋은 조용하게 얼어붙었다.
'어떻게든··· 일단 어떻게든 분위기를···.'
침체한 분위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머릿속을 정리해 보지만, 온전히 내 잘못에서 이루어진 사고였기에 이 분위기를 환기할 말 따위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정도로 뒤처진 채 초반을 시작한 적이 없었다.
벌써 3킬이나 내줬다. 죽음의 순간에도 라인은 유지해 둔 탑과 애초에 상성인 미드는 둘째치더라도 정글은 타격이 크다.
정글링 속도는 물론이요 교전 능력까지 뛰어난 호걸이 이제부터 용리의 정글에 기웃거리며 울부짖기만 해도 호랑이의 포효를 들은 용은 꽁지 빠지게 도망칠 수밖에 없다.
타이밍 좋은 미드의 합류로 풀 수밖에 없는 호걸의 구속은 미드의 솔킬로 인해 두둑해진 갈리만의 아이템 창, 그 이점으로 빠르게 라인을 밀어 넣어 렉스가 호걸의 식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서서히 죄어오는 범의 송곳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움직임이 봉인돼 성장이 멈출 용리.
용리의 도움 없이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호걸과 싸우며 타워에 갇히게 될 채플랭크와 렉스.
쏟아져 내려온다.
단 한 번의 방심이 빗어낸
실수라는 눈덩이가 산사태가 되어
구교환의 머릿속을 패색이라는 글자로 하얗게 칠한다.
.
.
.
.
[ 아군이 적을 처치했습니다. ]
"나이스!!!"
헤드셋을 뚫고 들어올 정도로 크게 울리는 김수하의 목소리.
그 어떤 라인의 개입 없이 바텀 스스로 따낸 킬 하나.
"좋았다! 수하야!"
밝은 목소리로 외치는 정한진의 목소리까지.
그 둘의 목소리가 경기의 흐름이 보이는 저주에 걸려 스스로가 만든 재앙에 파묻혀 있던 구교환의 정신을 깨웠다.
"뭐...뭐야?! 땄어?"
"네! 뭐 서폿 하나뿐이지만요."
"잘했어! 진짜 잘했어."
"상대 원딜은 요람으로 갔어요. 아마 서폿이 태어나는 시간에 맞춰서 같이 라인에 복귀하려는 것 같아요. 대충 라인 박아 넣고 저희도 귀환할게요."
아직 스코어는 1대3, 불리한 스코어인 데다 따낸 1킬이 하필 상대 서폿이라는 점에서 숨통이 트였다고 말할 순 없지만, 지금 당장 구교환과 최현준의 머릿속을 지금, 이 순간에 집중시키는 데엔 크게 기여했다.
"후우~."
한숨이다.
딱 한숨만 돌린 거다.
지금부터 어떻게 이 상황을 뒤집을지에 대해 온 집중을 다 한다.
크게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라인에 복귀하는 아주 짧은 시간. 그 시간 안에 생각하는 거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수많은 상황.
'패배. 승리. 패배. 패배. 승리···.'
아직 많은 방법이 남아있다.
"바텀에 힘 실어. 두 번째 플랜으로 간다."
""네.""
탑에서 강한 챔피언이 다수 밴당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레우스가 아닌 레이틀린을 뽑은 게 활로를 열었다.
물론 적의 바텀도 만만하진 않다.
빗속의 학살자 레인은 이름에 걸맞게 [ 산성 화살 ]이라는 3타마다 최대 체력 비례 대미지를 주는 패시브형 스킬과 상대를 밀쳐내고 밀쳐진 적이 벽에 부딪히면 기절 당하는 [ 박제 ]스킬을 가진 하드한 딜러.
심지어 적을 쫓을 때 혹은 물 위에서 이속이 빨라지는 패시브를 가지고 있는 데다 짧은 쿨타임의 [ 구르기 ]로 짧은 거리지만, 도주기도 확보한 챔피언.
단점이라면 원딜이라는 이름에 비해 절망적으로 짧은 사거리와 궁극기 [ 빗속으로 ]가 맵 전체에 비를 내리게 하며 [ 구르기 ]시 잠깐의 은신을 부여하는 [ 신출귀몰 ]과 비슷한 반푼이 궁극기.
잘 크면 누구도 못 말리는 녀석이지만, 그랩류인데다 유리한 상황을 굳히기에 특화된 쓰레이 슈와 함께한 조합에서 방금의 교전으로 전세가 약간 밀린 상황.
'충분히 할만하다.'
이 전략의 가장 중요한 점은 상대 호걸의 움직임.
상대가 우리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바텀으로 동선을 잡아 카운터 갱을 오거나, 지금까지 우리의 승리 플랜처럼 바텀을 사리게 한 뒤 탑에 생긴 작은 스노우 볼을 이용한다.
분명 상대도 앞으로 우리의 움직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보단 상대가 수를 먼저 둘 수 있는 상황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눈에 보는 순간엔 늦는다.
그렇다고 예측했다 틀리기라도 한다면 수하와 한진이가 만들어준 한숨조차 버리는 꼴.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다면 강제하라.'
적의 움직임을 제한시키는 방법엔 수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중 가장 간단한 방법.
"현준아. 밀어!"
"이미 하고 있어요!"
전 경기에서 내가 미드를 억지로 미는 바람에 갱을 당했다.
그땐 실수였지만, 그 실수로 알게 된 사실.
정글을 불러들이는 플레이는 유효하다.
내 주문이 들어가기 전부터 현준이는 라인을 폭발적으로 밀기 시작했다.
[ 럼주 폭발 / 해애애애적이다! ]
심지어 궁극기까지 쓰면서.
"가자아~!"
[ 버스터콜! ]
아무리 라인을 밀라지만 궁까지 쓰는 건 호걸을 불러들이기도 전에 갸르한테 죽을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믿는다.
왜냐면 우리 탑은 제너러(G2n2ral)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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